김인식의 <얼굴없는 미녀> (2) - 매개된 욕망과 반복강박, 경계성 장애

영화를 잘 보면 재미있는 것이 발견된다. 정신과의사는 아내를 포기하다시피 했다가 제3의 남자가 아내를 사랑하게 되자 아내에 대한 강한 애착이 생긴다. 그러나 아내는 그 사이 죽어버린다. 그는 아내의 애인이 이미 죽은 아내에게 걸어오는 전화를 계속 받으면서 대답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을 '복수'라고 여긴다. 이번엔 외환딜러의 경우를 보자. 그 역시 아내 몰래 오입질을 하지만 아내에게 남자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고는 외도를 그만두고 아내에게로 돌아가려고 한다. "나 그 여자 못 버려" 왜 못 버려? 애착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그 사이 그의 아내는 죽어버린다. 그는 아내의 애인(정신과 의사)이 이미 죽은 아내에게 걸어오는 전화를 계속 받으면서 대답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을 '복수'라고 여긴다.

이 두 인물은 두 가지 착오를 하고 있다. 하나는 그들의 사랑(혹은 애착)이 애착의 대상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른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죽은 아내에게서 걸려오는 전화에 대답하지 않고 흐느껴 우는 전화 속의 목소리를 듣는 것을 '복수'라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바로 얘기하자면 그들의 애착은 아내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제3자에 의해 매개된 애착(욕망)일 뿐이다. 남이(그것도 어디 하나 빠질 것 없는 근사한 자가) 자기 아내를 사랑하게 된다는 점 때문에 열정이 되살아난 것이다. 따라서 전화 속의 흐느끼는 목소리를 듣는 것은 그것이 '복수'가 아니라 매개된 열정을 아내가 죽은 상태에서도 지속시키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것은 르네지라르의 유명한 '3각형 욕망이론'을 영화적으로 풀어놓은 것인 듯 하다. 모든 욕망은(요구가 아닌) 타자의 욕망이다. 게다가 제3자에 의해 매개된 욕망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애착하지만 그것은 그 누군가때문에 애착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누군가가 그 누군가를 애착하기 때문에 그 누군가를 애착하는 것이다. 이로인해 나는 어떤 이를 사랑한다고 여기지만 왜 사랑하는지에 대해 분명히 대답할 수 없다. 나의 사랑(애착)은 설명할 수 없는 외부(혹은 '제3자' 혹은 넓게보면 '사회')에 의해 매개된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의정을 매력적이다라고 느낀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정말 이의정을 그렇다고 여기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에 의해(혹은 매스컴에 의해) 귀엽다고 판단해주었기 때문에 그렇게 여긴다.)

정신과 의사는 제 3자에 의해 촉발된 열정을 지속시키기 위해 피암시성이 강한 경계성 장애자를 도구로 삼고자 한다. (어쩌면 특별출연한 이사비도 그런 정신과 의사의 노리개가 되었던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경계성 장애의 여자(김혜수)가 병동 복도에서 정신과 의사의 죽은 아내의 환영을 보고 1년 후에 정신과 의사의 진찰실에서 최면도구로 보이는 디지털 시계를 언급하는 장면은 그녀가 처음부터 정신과 의사의 매개되고 좌절된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해준다. 그는 그가 아내를 욕망하게 했던 구조/형식을 다시 반복하게 하려고 그녀에게 거짓 과거를 최면으로 주입시킨다. 그는 '다른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를 사랑하는 자신'이란 형식에 빠져들때 강력한 성욕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코 충족되지 않는 욕망으로 반복강박적으로 재생된다.

'얼굴없는 미녀'란 말은 말이 안된다. 우선 얼굴이 없다면 괴물이지 미녀는 아니다. 그런데 이는 다른 측면에서 보면 말이 된다. 제3자(혹은 사회)에 의해 미녀로 보일 수도 있고 추녀로 보일 수도 있다. 그녀가 내재적으로 어떤 요건을 갖추었느냐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녀의 이미지는 오리지널한 얼굴이 없이 텅빈 괄호로 사람과 사람 사이를 떠돌아다닐 뿐이다. 그럼 진짜 그녀의 얼굴은 어디 있을까? 나는 그녀의 얼굴을 정말 만날 수 있을까? 아니면 어느 순간 괴물로 돌아오는 미녀에게 기겁하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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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eetmagic 2004-08-15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님 글보니 영화 못 보겠어요...
어쨌든 또 퍼갑니다

간달프 2004-08-15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비관적인가요?

sweetmagic 2004-08-16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요 심하게 동감하는 바, 제 눈에 그게 다 안들어오면 좌절할 것 같아서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