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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사람’ 예로센코…
[한겨레21]

[한겨레] [박노자의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천재이자 기인이었으며 아나키스트였던 러시아 태생 맹인 동화작가의 동화같은 일생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도쿄 국립근대미술관을 방문하는 외국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의아함을 가지는 순간이 있다. 방문객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저명한 화가 중 한 명인 나카무라 쓰네(中村 彛·1887~1924)의 1920년 작, <예로센코씨의 초상화>(エロシェンコ氏の像) 때문이다. 깊은 인상을 주는 청결하면서 예민해 보이고 왠지 표정이 어두워도 보이는 한 젊은이의 그림…. ‘예로센코’와 같은 성씨나 외모로 봐서 러시아 계통에 속하는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가. 일본에서 명작의 주인공이 된 이 ‘맹인 시인’(그림 밑 설명)의 이름을 본국 러시아에서도, 구미 지역에서도 일반인들은 물론 전문가들도 잘 모른다. 과연 한 외국인 맹인이 어떻게 해서 일본사에 그 이름을 남기게 됐는가?

4살 때 성수를 뿌리다 눈을 잃다 일본의 아동 문학, 사회주의 역사, 동아시아 에스페란토 운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남긴 방랑 시인 예로센코(1889~1952)는, 중부 러시아 벨고로드의 오부코브카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광적인 종교인이었던 친척들은 홍역을 앓았던 4살의 아이를 데리고 교회에 가서 정교회의 완쾌 기도 형식대로 그 눈에 ‘성수(聖水)’를 무리하게 뿌렸는데 파란 하늘과 지붕 위의 비둘기 보기를 좋아했던 아이는 더 이상 세상의 빛을 못 보게 되고 말았다. 일손이 되지 못해 가정에서 소홀한 대접을 받았던 눈먼 아이는 군대식 규율로 유명했던 모스크바 맹인학교에서 음악 등의 교육을 받았는데 수업 때는 인종주의에 젖은 교사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흑인종이 백인종보다 덜 문명적이라 하신다면 여름철 불볕에 피부가 많이 타서 까맣게 되면 문명인의 자격을 잃게 됩니까?” 재학 시절에는 벌받느라 고생하고 졸업 이후에는 레스토랑에서 바이올린 연주로 생계를 이었는데 그의 비장미 넘치는 음악으로 부르주아적 청중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한 예로센코는, 한 톨스토이주의자로부터 에스페란토라는 새로운 ‘만국의 언어’를 익히고 1912년에 영국 유학 길에 나섰다. 음악 공부보다는 제정 러시아의 군사주의적 억압의 분위기를 벗어나려는 것이 진정한 이유였다. 런던에서 거물 아나키스트 크로포트킨(1842~1921)의 제자가 돼 “진화란 상호 경쟁이 아닌 상호 사랑으로 인해서만 진행된다”는 것을 배운 그는 영국 경찰에 의해서 ‘불온 인물’로 분류돼 1914년에 일본으로 가 도쿄 맹(盲)학교의 청강생이 됐다. 세계가 제1차 세계 대전의 살육으로 접어들었던 1914년에 전쟁을 무엇보다 혐오하는 예로센코의 생애의 새로운 장이 열린 것이다.

에스페란토를 공동 언어로, 그리고 무정부주의적 상부상조의 사상을 공동 이념으로 하는 초(超)국가·초(超)인종적 세계 공동체를 이상으로 삼았던 예로센코는, 톨스토이·크로포트킨을 흠모했던 일본의 진보계 인사와 친하게 되었다. 나중에 진보적 연극의 선구자가 된 아키타 우쟈쿠(秋田 雨雀·1883~1962)는 그로부터 러시아어와 에스페란토를 배웠으며, 여성 수필 문학의 개척자 소마 곡고(相馬黑光·1876~1955)는 예로센코를 자신의 집에다 투숙하게 해주고 함께 예술과 정치를 토론했다.

천재적 어학 능력을 보유한 예로센코는, 일본의 사회주의자들과 사귀면서 2년 만에 일본어로 소설과 시를 쓸 정도로 일본어를 완벽하게 익혔다. 지금도 아동 문학의 고전으로 여기는 <등잔의 이야기>(提?の話)나 <복숭아 색깔의 구름>(桃色の雲) 같은, 깊이와 아동에게 쉬운 아름다운 언어를 겸비한 일본 근대 동화 선집에서 볼 수 있는 유명한 작품들이었다.

“세계는 가족일 뿐”이라는 것을 굳게 믿어 일본에서 일본인 사회주의자로 살려고 했던 예로센코는, 그 당시에 판쳤던 인종주의는 물론 ‘동양적 가치론’까지 ‘민족’의 허구를 유지시키려는 착취자의 도구로 정확하게 파악했다. 아키타 우쟈쿠의 일기장을 보면, 나중에 일본 사회주의자 사이에서 전설처럼 전해졌던 예로센코와 1916년에 일본을 방문했던 인도의 저명한 시인 라벤드라나트 타고르(1861~1941)와의 공석 논쟁 이야기가 나온다. 타고르가 “동양 정신의 진수인 일본 정신”을 들먹였던 일본 민족주의자들의 사고 구조에 맞는 “물질·합리성 일변도의 서구 기독교적 문명과 정신적 아시아 문명의 차이”를 논하자 듣다 못한 예로센코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물질에 동서의 차이가 어디에 있겠는가? 당신의 이야기는 중점을 다르게 둘 뿐 구조상으로는 서구 인종주의자들의 ‘동양과 서양의 본질적 차이’ 궤변과 동질적이다. ‘서양’과 ‘동양’을 차별화시키는 것은 민족들을 이간질시키려는 지배층의 수법일 뿐, 실제로 노동하는 사람들의 이해 관계는 동서를 막론하고 똑같다”라고 일갈했다.

인도 시인 타고르와 뜨거운 논쟁

그 말에 놀란 타고르가 “당신 도대체 어디 사람이냐?” 따졌고 그는 “원래 러시아에서 왔지만 지금 일본 시인으로 산다”고 대답했다. 타이, 버마, 인도 등지를 돌며 전래 동화를 수집하고 인도에서 영국 경찰들에게 잡히고 일본 감옥의 맛도 본 일이 있었던 예로센코에게는 “어디 사람이냐”는 질문은 의미가 없었다. 신음하는 민중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서 그쪽 언어를 단 몇 개월에 익혀 그쪽 사람으로서 함께 글과 말을 통해서 계급 투쟁을 같이 했다. 돈키호테의 정신과 근대적 세계 무정부 혁명가의 의식이 그에게 결합된 것이었다.

그의 소설을 중국어로 옮기기도 한 그의 막역한 친구 루쉰(魯迅·1881~1936)이 이야기했듯, 세계 혁명가인 그에게 일본은 ‘너무나 협소한 공간’이었다. ‘세계를 살인자들의 손에서 탈환하려는 목적’으로 일본 동료들과 함께 사회주의 동맹을 조직한 예로센코는, 데모하다가 경찰에게 붙잡혀 구타를 당한 뒤에 1921년 6월4일에 일본에서 강제 추방을 당한다. 일제에게 그는 일개의 ‘외국계 불온 분자’였지만, 본국 ‘붉은 러시아’도 괘씸한 아나키스트에게 처음에 입국을 불허했다. 낙심한 그는 상하이에 체류했다가 1922년 2월부터 루쉰의 소개로 베이징대학교에서 에스페란토 교수의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루쉰의 집에서 기거했던 그는 아나키즘을 공부했던 정화암(鄭華巖·1896~1981) 등의 조선 혁명가들과도 교류했으며, 그의 강의에는 수강자가 500명씩이나 몰려와 학생들에게도 흠모의 대상이었다. 그야말로 ‘입신양명’의 경지에 이른 것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안주’란 있을 수 없었다. 1년 뒤 그는 러시아 정부로부터 귀국 허가를 어렵사리 얻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벼슬’을 헌신짝처럼 버린 그는 물론 공산당 치하의 소련이 폭력 없는 미래 사회가 아니었음을 알고 있었다. 몇 년 동안 모스크바의 동방 노력자 공산대학에서 일어 통역원이 되었는데, 일본인 학생 사이의 대화 내용을 일러바치라는 소련 비밀 경찰의 요구를 거절하자 해고를 당하고 말았다.


스탈린 독재를 싫어했던 그는 1930년대 중반까지 가능했던 해외 에스페란토 대회에서의 참가차 외유를 이용하여 사실 서구로 얼마든지 망명할 수 있었는데, 그는 소련 체제하에서의 고생의 길을 스스로 택했다. 소련 오지의 소수 민족 맹인 청소년의 교육을 위해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이었다. 오지의 여러 맹인학교 교직에 서고 지금도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사용되는 투르크멘어의 점자를 개발하기도 한 예로센코는 결국 빈곤하게 살다가 암에 걸려 고향인 오부코브카에서 생을 마쳤다.

마을에서 ‘착한 사람’으로 통했던 그가 조금씩 죽어가면서도 풀 냄새를 맡는 것을 매일 행복해했다는 이야기를, 후에 연구자들은 지역의 촌로에게 들을 수 있었다. 1950년대 후반 아키타 우자쿠를 비롯한 예로센코의 일본 진보계 친구들이 그가 일본에서는 근대 문학의 고전 작가로 알려져 있다는 사실을 소련 당국에 알리고 나서야 이름도 없었던 ‘착한 사람’의 묘에는 묘비가 세워졌다.

고향의 풀 냄새를 사랑했던 세계인 아나키스트 예로센코, 공산당 시절은 물론 군사적인 민족주의가 새로이 ‘지도 이념’으로 등장되는 오늘의 러시아에서도 ‘위험 사상의 보유자’로밖에 안보일 것이다.

장애인에게서 느끼는 세계 혁명가의 정신

지금도 도쿄 미술관에서 그의 초상화 앞에서 러시아인을 위시한 외국인들은 “그가 누구인가”라고 궁금해하며 서로 수군거리기도 한다. 천재이자 기인이었던 동화 작가이자 아나키스트. ‘착한 사람’ 예로센코…. 우리가 그에게서 배울 점은 무엇일까. 시력이 없는 사람도 비장애인과 다를 바 없는 문학적·혁명적 활동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주장해왔으며 그 사실을 실천적으로 입증한 그의 장애인 차별의 부정·극복의 의식은 선구적이었다. 그리고 후대의 사람들이 그에게 배웠으면 하는 것이, 명예와 안정된 생활을 팽개치고 크로포트킨이 진화의 원천이라 여겼던 인류애의 길을 선택할 수 있었던 그의 용기, 그리고 세계 민중을 인종이나 민족별로 나누려 하지 않았던 세계 혁명가의 정신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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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4-09-17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폭스바겐님 서재에서 이 글을 보고 따라 왔습니다. 퍼갑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간달프 2004-09-18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주셔서 고마와요. 퍼가지만 마시고 좋은 글 있으시면 코멘트로라도 퍼다주세요. 상부상조^^

숨은아이 2004-09-18 0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블루님 서재에서 보고 왔어요. 좋은 정보 고맙습니다. 퍼갈게요.
 

'왕따' 획일을 강요하는 자본의 몬스터
인권 특강은 국가인권위가 직원들을 대상으로 매월 실시하는 특강으로, 박 교수의 강의는 지난 7월 6일 진행됐다. 박노자 교수는 오슬로 국립대 한국학 교수를 맡고 있으며, <당신들의 대한민국> 등의 저서를 낸 바 있다.

정리: 월간 <인권> 편집부

▲ 강의하는 박노자 교수
ⓒ2004 인권위 김윤섭
먼저 제가 왜 스칸디나비아에서의 집단 따돌림이라는 주제를 택했는가에 대한 ‘변명’의 성격이 짙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저는 소련이 망할 때까지 소련 사회의 가장 큰 인권 문제로 생각한 것이 이른바 양심수였습니다. 그런데 사회주의 체제가 망하고 나서, 옐친 체제로 접어든 후 체첸 독립운동 투사를 잡아 둔 것을 제외하고는 공식적인 양심수는 거의 없어지게 된 겁니다.

러시아 사회의 일상적 인권 유린

그런데도 시민들이 몸으로 겪는 인권 상황은 대단히 악화되었습니다. 사회가 빈곤해지는 과정에서 과거의 중산층 대부분이 빈곤층으로 추락하고, 인간 존엄성이 무참히 짓밟혔기 때문입니다. 즉, 연금 생활자들이 연금으로는 연명할 수 없는 상황에서 집에 있던 책이나 잡동사니를 지하철역에서 파는 그런 광경을 흔하게 볼 수 있는 게 현재 러시아의 상황입니다.

노점상들은 경찰한테도 괴롭힘을 당하고, 뒷골목 깡패들에게도 갈취를 당합니다. 자릿세를 내지 않으면 모욕을 당하고 심지어 죽음을 당하기까지 합니다.

또한 기업 입사 과정에서는 여성이 입사를 원하는 경우, 이른바 성상납은 불문율입니다. 대다수의 여성들이 취업을 못하고 있기 때문에 성상납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는 현실인데, 언론에서 이를 다룰 때는 일종의 낭만적인 에피소드로 거론하지 인권 침해 문제로 언급하지 않습니다.

러시아 사회가 폭력화되면서 가장 나쁜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중산층 가정의 아동과 청소년들입니다. 집단싸움이 일반화되었고, 빈민 거주지역의 공교육 기관들은 집단싸움과 마약밀매의 온상이 되었습니다.

러시아에도 국가적 인권 보호 기관이 존재하지만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하등의 관심을 갖지 않고 실제로는 사회의 극단적인 폭력화를 방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국가에 의한 인권 탄압을 지적해도, 국가의 경제실책이나 언론의 오도(誤導)로 인해 황폐화된 사회의 인권 유린이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 국제 인권단체들도 잘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 대단히 아쉽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일반인에 의한 인권 유린의 한 형태를 말씀드리면 어떨까 하는 마음에 스칸디나비아에서의 집단 따돌림이란 주제를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매우 길어진 변명이지만 이제 조금씩 본론으로 들어갈까 합니다.

한국에서 집단 따돌림을 다루는 석·박사 논문들이 꽤 있는데, 대개는 집단 따돌림 현상을 개인적인 문제로 다루려는 분위기가 강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경향이 그렇지 않아도 복잡한 문제를 더욱 더 엉뚱한 방향으로 몰고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혐의를 갖고 있습니다.

1998년에 교육개발연구원에서 학생들에게 집단 따돌림당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87%가 “튀는 행동을 해서 그렇다”고 답변했습니다. 이것은 어떤 얘기입니까. 똑똑한 척한다, 남보다 아는 척한다 등을 지목한 것 같은데, 남과 다르게 행동한다면 집단 따돌림당하기 쉽다는 얘기입니다. 최근엔 직장인들의 집단 따돌림 현상에 대한 여론조사도 있었는데, 역시 튀는 행동이 집단 따돌림의 한 원인이라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집단 따돌림당하는 이유가 이와 같다면, 집단 따돌림은 사회문제라는 견해를 지울 수 없습니다. 한국의 집단 문화를 문제삼아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한국의 집단 문화는 남과 다른 행동, 남과 다른 외모까지도 포용하지 않습니다. 집단 차원에서 상처를 주는 폭력이라는 것이 군사주의적인 집단 문화와 상당한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실제 한국에서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는 근대 지상주의적 집단 통합의식에서 파생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근대 지상주의란 ‘서구 표준’과 다른 모든 것에 대한 불인정, 괄시를 말합니다.

한국 사회, ‘서구 표준’과 다른 것을 불인정

예를 들면 한국 직장인 가운데 턱수염이나 콧수염을 기르는 사람을 거의 볼 수 없습니다. 한국에서 면도 문화가 생긴 개화기 초에는 면도를 한 사람은 근대적인 문명인이었고 수염을 기르는 사람을 전근대적인 야만인으로 취급했습니다.

지금도 수염을 기른다는 게 너무 ‘튀는 행동’이라고 취급되는 경우가 없지 않습니다. 비교적 자율적이라는 교수집단에서도, 한복을 입거나 수염 기른 사람을 이상하게 대한다는 것이 제가 감지한 분위기였습니다.

결국 ‘다름’에 대한 근대 지상주의적인, 군사주의적인 불인정 등이 아이들에게 그대로 반영돼 집단 따돌림 현상을 유발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겁니다.

한국은 그렇다 치고, 군사주의·집단주의가 만연되지 않은 유럽에서 집단 따돌림은 어떤 요인으로 발생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져 볼 수 있습니다.

유럽에서 집단 따돌림은 가장 잘 알려진 사회문제 중 하나입니다. 유럽 역시 한국과 같은 정도로 집단 따돌림이 만연되었고, 구타 등은 한국보다 더 심각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특히 영국에서 집단 따돌림을 경험한 사람이 40%에 이르고, 피해를 많이 보는 학생들이 거의 20%에 달해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높은 편입니다.

제가 살고 있는 노르웨이에서 폭력 문제가 가장 심각한 곳이 학교입니다. 학교에 이른바 모빙(mobbing) 문화라는 게 있는데 모빙은 원래 무리로 하는 악행으로 지금은 주로 왕따 현상을 의미합니다. 영어로 표현하면 불링(bullying)인데 이는 학교 안에서의 이른바 왕따 현상, 특히 집단구타와 같은 형태를 지칭합니다.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스칸디나비아에서 집단 따돌림이 시작되는 곳은 유치원입니다. 대개 15~25%가 상습 피해자로 나오고, 20~25%의 학생들이 상습적인 가해자로 나타납니다. 유치원에서의 집단 따돌림은 무척 가혹해졌고, 이때 고립된 아이들은 심각한 성장 장해를 갖게 돼 문제가 큽니다.

특히 중학교에서는 피해 형태들이 고약하고 악질적이며, 한국보다 구타의 비율이 약간 높습니다. 한국은 주로 학생을 고립시키는 방식인데, 스칸디나비아는 인격 모독이 주를 이뤄 침 뱉기, 분비물 가방에 넣기, 이름 대신 좋지 않은 별명 부르기 등입니다. 이로 인해 학교마다 1년에 적어도 거의 한두 명씩 전학을 갑니다.

따돌림 방지는 ‘국가적 과업’

▲ 박노자 교수가 국가인권위원회 배움터에서 특강을 하고 있다
ⓒ2004 인권위 김윤섭
조사 결과 스칸디나비아의 집단 따돌림은 신자유주의 분위기가 한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노르웨이는 납세자의 납세액에 대한 정보가 인터넷으로 공개됩니다. 부동산을 많이 보유한 사람들이 납세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 주민들이 확인하는 것입니다.

사민주의 국가는 세금 징수에 완전히 의존하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사는 동네 학교에서 학생들이 쉬는 시간에 인터넷에 접속해 학부모들의 납세액이 얼마인지를 조사해, 납세액이 가장 적은 10%의 부모 아이들을 따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심각한 문제인 집단 따돌림을 예방·근절하기 위해서 노르웨이 등의 스칸디나비아 국가에서 국가·지자체·개별 학교 등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국가 차원에서 따돌림으로 인한 피해에 대한 책임을 해당 학교의 교장 및 담임들에게 묻는 등 따돌림 방지를 의무화시키고 폭력방지요원(대개 대체복무를 하는 병역 거부자들)을 학교마다 상주시켜 가해자·피해자들의 상담, 갈등 조절 등을 하게 합니다.

교육부 당국자들이 관련 연구자와 협력하여 따돌림 현황에 대한 전국적인 조사를 벌이고 피해가 가장 심각한 학교에서 특수 프로그램을 운영케 하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따돌림 근절에 실적이 가장 우수한 학교를 국무총리가 직접 방문해 그 성과를 축하하는 등 따돌림 방지는 ‘국가적 과업’의 위상을 가집니다.

중앙·지역 일간지에서 피해자의 편지들을 공개하여 그들의 고통에 대한 사회적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가해자 및 그 부모들의 양심에 호소하기도 합니다. 사실, 많은 일간지들이 따돌림 근절의 당위성에 대한 의식이 높아 피해 사례가 있으면 꼭 편지로 써 달라고 공고하기도 합니다.

학교에서는 따돌림 방지 차원에서 역극극(role-play)을 진행해 피해자가 느끼는 고통의 일단이라도 ‘놀이’를 통해서 맛보게 합니다. 그리고 많은 학교들이 따돌림 방지 웹사이트를 운영하면서 피해자·가해자의 고백을 인터넷으로 공개합니다.

피해자의 솔직한 심정이 만인에게 알려지면 그 피해자를 보는 가해자의 눈은 달라지게 돼 있습니다. 이와 같은 다양한 프로그램을, 한국의 관련 기관들도 참고해 볼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일중독’에 빠진 부모들

그러나 이와 같은 전 사회적인 노력과 일련의 국지적 성공들에도 불구하고, 따돌림이 근절되기는커녕 오히려 피해 건수가 증가하고 그 수법들이 더 악질적이 되고 있습니다. 즉, 각종 방지 프로그램들이 그 확산을 어느 정도 견제하는지 모르지만 병근(病根) 제거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은 자명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집단 따돌림을 유발시키는 사회·문화적 심층적 요인들이 자본주의 체제에서 근본적으로 제거될 수 없다는 것이 원인인 듯합니다.

예컨대 많은 학생들이 저지르는 가해 행각의 직접적인 원인이 부모로부터의 애정 결핍, 가정에서 느끼는 소외감, 부모의 무관심 등으로 밝혀져 있는데, ‘일중독’과 ‘소비중독’에 빠져 아이를 ‘2순위’로 인식하는 상당수 부모들의 사유 형태는, 생산·소비를 물신화시키는 자본주의적 체제가 근본적으로 변혁되지 않는 한 바뀔 것 같지 않습니다.

아이들에게 가혹 행위의 당위성을 가르쳐 주는 것은 텔레비전에서 매일같이 보는 싸움·죽임의 장면인데, 역시 이윤 추구적 대중문화는 폭력이라는 ‘눈요기’의 주된 요소를 폐기 처분할 것 같지 않습니다.

심지어 한두 살 된 아이들이 하루에 두세 시간씩 텔레비전으로 보는 만화에서마저도 추격·충돌·격투 등의 이미지들이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아이들이 폭력을 당연지사로 여기게 되는 것이 어찌 놀라운 일이겠습니까?

‘현실’과 ‘연출’을 구별할 능력이 없는 아이들이 연출된 영상물에서 본 폭력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여 본받으려 한다는 것은 이미 많은 연구자들이 입증한 결과인데, 이윤 추구에 몰두하는 대중문화 생산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신문에서 텔레비전까지 모든 매체들이 늘 주목해 부각시키는 것은 프로 스포츠나 연예계 소식 등인데, 의식·무의식적으로 남학생들이 강인하고 자신만만해 보이는 스포츠 스타들을, 여학생들이 요즘 시쳇말로 ‘몸짱’·‘얼짱’으로 인식되는 연예계 스타들을 인간의 ‘표준 모델’로 각각 삼게 돼 있습니다.

그 ‘표준 모델’의 틀에 맞지 않은 - 즉, 허약해 보이거나 사교 능력이 없어 보이거나 너무 ‘빈티’ 나거나 ‘외모에 문제가 있는’ - 남녀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왕따 후보’가 되고 맙니다.

‘자유’를 표방하는 자본주의는 놀라울 정도의 일상적 사고의 획일화를 가져다 주는데, 그 획일적인 규범에 맞지 않은 자는 곧잘 일상적인 폭력에 시달리게 됩니다. 인권 이상(理想)에 완전히 상반되는 현실이지요.

그러나 이윤 추구적 시스템이 이 지구를 계속 괴롭히는 이상 이 시스템이 고쳐질 것 같지도 않고 인권의 이념이 제대로 실현될 것 같지 않습니다. 결국 인권 신장을 위한 투쟁은 바로 반(反)자본주의적 투쟁과 둘이 아닌 하나라고 봐야 할 듯합니다.

긴 시간 동안 부족한 제 이야기를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박노자 기자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발간하는 월간 <인권> 8월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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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eetmagic 2004-09-16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정말 너무하네요..............

Fithele 2004-09-16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관심을 끄는 부분들이 있어 퍼갈게요

간달프 2004-09-16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에게서 자유를 앗아가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보면, 그것은 국가나 권력 따위가 아니라 자기 내부의 불안과 불만이 아닐까? 그런데 자본주의 혹은 자유경쟁체제는 바로 그 내면의 불안, 불만을 통해 지탱되는 체제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평등과 자유를 조화시키는 것은 기회의 평등이 아니라, 결과의 평등이 아닐까?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 여유없이 자유없다.

sweetmagic 2004-09-16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그 여유를 만들어 내는 요인들이 문제예요 ........................


으앙~~!! ㅠ.ㅠ;;;

간달프 2004-09-16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유 만들기 (1) 결과의 평등 -> 국가의 일 (2) 가치의 평등 -> 문화(사회)의 일

갈대 2004-09-17 1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든지 '튀는 것'을 싫어하고 비난하는 성향은 인간의 본성인 것 같습니다. 집단에서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표준을 위험하게 만들고 깨뜨리려는 자는 흔히 처벌을 받습니다. 자본주의와 한 사회의 특수한 문화가 집단 따돌림의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더 심화시킬 수는 있겠습니다만). 하워드 블룸은 <집단정신의 진화>에서 동조를 강요하는 집단의 성향을 '동조집행자'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간달프 2004-09-17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집단 따돌림'을 자연적으로 정당화하고자 하시는 것인지요? (하워드 불룸은 접하지 못했습니다만) 집단 따돌림을 일종의 '집단적 지혜'(혹은 networked intelligence)라고 보시는 것인지요? 하지만 집단 동조적인 성향만으로 이루어진 집단이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만일 이 전제를 받아들인다면, '튀는 것'과 '튀는 것을 배척하는 집단적 동조 성향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 마저도 본성(?)이 아닐까요?

간달프 2004-09-17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본주의(혹은 특정 문화)가 근본적인 원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성향을 증폭시키는 것만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성향을 단순히 '자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윤리적 판단을 중지한다면(윤리의 은폐) 일종의 범주 오류는 아닐런지요?

갈대 2004-09-17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집단 따돌림'을 정당화 하려는 건 결코 아닙니다. '집단 따돌림'은 집단의 단결을 해치는 위험요소를 제거하려는 행위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모방과 동조가 인간 집단을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요인임은 분명합니다. 분열된 집단보다는 단결된 집단이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에 이런 본능이 길러진 게 아닌가 합니다. '튀는 것', 즉 다양성을 생성하는 것이 집단에 이익을 줄 경우에는 큰 보상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여기엔 위험이 뒤따르죠. 결국 튀는 것도 위험을 감수한 본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하워드 블룸은 이런 성향을 '다양성 생성자'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해서 모방과 다양성은 적당한 균형을 이루게 되는 것이지요. 여기까지가 진화론을 근거로 한 하워드 블룸의 인간 집단에 대한 설명입니다.

갈대 2004-09-17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론 이런 설명을 가지고 '집단 따돌림'을 자연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정당화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집단 따돌림'의 원인에 대해서 훌륭한 통찰을 제공해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문제의 원인을 아는 것과 그 문제를 판단, 해결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이지만 원인을 알면 해결에 한 발짝 더 다가설 수 있을 테지요. 개인적으로는 다양성이 보장받을 수 있는 집단이 더 건강한 집단이라 여기기에 집단 따돌림은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동조 집행자'가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인간의 야만성을 억누르고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집단 구성원을 집단에 적응하도록 하는 것도 모두 '동조 집행자'의 작용으로 볼 수 있으니까요.

간달프 2004-09-18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덕분에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미심적은 부분도 있습니다. (쓰신 글로만 보아 판단하건데) 인간의 야만성을 억누르고 사회질서를 유지한다고 하셨는데 만일 사회질서(혹은 집단) 자체가 야만적일 경우에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물론 여기선 야만성에 대한 고찰이 먼저 필요하겠지만... 하워드 불룸의 논리는 혹시 개인의 실천에 대해 집단의 실천(혹은 생존)을 선험적으로 우위에 놓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네요. 혹시 파시즘의 뉘앙스가 깔려 있는 것은 아닌지요?

간달프 2004-09-18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또 하나는, 왕따 현상의 근본적 원인이 자본주의(혹은 특정문화)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왕따현상을 그 특정문화가 교정할 수 있느냐의 문제에 촛점이 맞춰져야 하지 않을까 하네요. 그러니까 왕따현상와 특정문화의 관계를 '문화적 실천'의 차원에서 봐야지 인과관계가 있느냐 없느냐로만 파악해서는 안되지 않을까요? 물론 불룸의 진화행동학적(?) 통찰이 그 문화적 실천에 긴요한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엔 동감합니다.

갈대 2004-09-18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질문을 던지셨군요. 우선 하워드 블룸은 생물학적 결정론자가 아니며(오히려 그 반대입장에 서 있다고 볼 수 있죠. 물론 인간의 본성을 인정하지만요) 파시즘 뉘앙스를 깔고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라는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그는 <집단정신의 진화>에서 진화의 핵심은 신다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유전자의 이기성 때문이 아니라 인간들 사이의 '네트워크'(공존)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관심은 네트워크를 통한 '집단정신'이 어떻게 형성, 발전하는가에 쏠려 있습니다. 그의 이론에 비추어 보면 파시즘이 발생하는 원인은 집단 구성원들의 무비판적이고 그릇된 동조 때문입니다. 이러한 동조가 가능했던 이유는 집단을 위협하는 강력한 외부요인(위기에 처했다고 느낄 때 인간의 이성은 객관적인 판단력을 상실하기 쉽죠)과 그런 외부요인을 이용해 자신들의 야망을 실현하려는 몇몇 선동가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파시즘의 경우엔 외부요인의 위협은 분명 부풀려진 것이고 또 외부요인에 대응하는 방법 역시 다른 집단 모두를 적으로 만들면서 스스로 고립상태에 빠뜨리는 것이었으므로 잘못된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벌어졌던 비인륜적, 우생학적 행위들 역시 용서받을 수 없는 것들임은 말할 필요도 없겠죠.

갈대 2004-09-18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만성은 말씀하신 대로 고찰이 먼저 필요할 것 같습니다. 가령 아직도 원시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부족들의 잔인한 행위를(문명인의 관점에서 보기에) 야만적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그런 행위들이 집단의 지속적인 생존에 유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으니까요. 개인의 실천과 집단의 실천을 놓고 봤을 때는 둘 중 어느 하나가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개인의 실천은 집단의 실천에 영향을 미치고 또 그 반대과정도 성립하니까요. 또 무조건 개인에게 집단을 위해 희생하라고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이구요.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집단의 실천이 우선적으로 작용하는 듯 합니다. 하워드 블룸은 책의 말미에서 집단 전체의 지속적인 생존(공존)을 강조하고 극단주의를 경계할 것을 역설합니다. 파시즘(집단주의)은 집단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획인을 강조한다는 점만 봐도 배척함이 마땅하고 자본주의는 말씀하신 대로 개인의 마음에 불안을 심어줌으로써 소수의 사람들이 다수의 사람들을 착취하는 체제이고 장기적으로 집단 전체의 생존에 위협이 되므로 역시 경계해야 합니다. 왕따문제는 당연히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이므로 해결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옳겠지요. 너무 횡설수설한 것 같습니다. 아는 것 없는 저보다는 책과 얘기를 나누시는 편이 유익하겠네요^^;

간달프 2004-09-19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찮은 의문에 이렇게 긴 응대를 해주시니 오히려 제가 더 고맙습니다. 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불룸의 책을 선입견없이 읽어보아야 겠다는 의욕이 생기는 군요. 거듭 감사드립니다.
 

그가 대마초를 꿈꾸는 이유

이 책의 주장은 상당 부분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만 그건 이에 반대되는 주장 또한 마찬가지다. 믿든 믿지 않든 어디까지 받아들이든지 간에 그건 당신의 자유다. 진위를 판단할 수는 없다. 다만 우리 시대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고정관념을 벗어나는 의미에서 귀를 기울일 필요는 있다. 이 책의 저자 유현은 소설가다. '창작과비평'으로 등단했고 아시아 현대사를 소재로 '시하눅빌 스토리'와 '메콩의 슬픈 그림자, 인도차이나' 등을 썼다.

대마초는 담배보다 덜 해롭다.

대마초는 환각물질이 아니다. 기분을 좋게 하는 진정 효과가 있을 뿐이다. 묶어서 대충 마약이라고 부르지만 그래서 대마초는 필로폰이나 코카인 같은 독성 마약과 다르다. 엘에스디나 엑스터시 같은 확각약물과도 다르다. 대마초를 피워도 당신의 감각은 살아있다. 대마초는 중독성이 없다. 줄 담배는 피울 수 있지만 줄 대마초는 피울 수 없다. 대마초는 한 대 말아서 두세 명이 나눠서 피우고도 1시간 이상 효과가 지속된다. 대마초는 담배만큼 자주 피울 수 없고 당연히 담배보다 연기를 훨씬 덜 들이마시게 된다. 독성도 담배보다 낮다. 성인 남자가 담배를 3개비 이상 삼키면 죽을 수도 있다. 그러나 대마는 식용 치료약으로 널리 쓰인다. 대마초의 중독성은 담배보다 훨씬 낫다. 종합해 보면 대마초도 분명히 몸에 해롭긴 하지만 담배보다는 훨씬 덜하다. 그런데도 담배는 허용되고 있고 대마초는 금지돼 있다.

대마초 불법화를 둘러싼 추악한 음모

이 같은 대마초의 억울함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1937년 미국에서 마리화나 세금법이 제정되고 대마초에 대한 대대적 탄압이 시작되었을 때 앞장선 사람은 연방마약관리국의 국장, 헨리 안스링거였다. 헨리 안스링거는 멜론은행의 은행장, 앤드류 맬론과 사돈 사이고 멜론은행의 가장 큰 고객 화학회사 듀폰이었다. 화학섬유를 개발해 재미를 보려던 듀폰에게 최대의 적은 대마였다. 대마는 대량생산이 가능한 유일한 천연섬유였고 나일론과 레이온의 시장 진입을 막는 큰 걸림돌이었다. 이게 엉뚱하게도 대마초가 마약이 되고 대마의 생산과 판매를 대대적으로 억압하게 된 이유였다.

여기에 신문 재벌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오손웰스의 <시민케인>의 주인공의 모델이 된 인물)까지 개입한다. 목재 펄프 사업에 뛰어들었던 허스트는 대마 펄프의 공격적인 시장 확장을 경계했다. 허스트는 모든 언론과 영향력을 총동원하여 대마초의 위험을 과장 선전했다. 특히 허스트는 인종차별주의를 교모하게 끌어들여 대마초를 유색인종이나 찾는 저급한 환각물로 사회에 인식시키는데 성공했다. 결국 대마초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시작됐고 그 이면에서는 대마산업의 몰락과 함께 화학섬유와 목재 펄프 시장이 급속도로 팽창했다. 당연히 듀폰과 허스트는 떼돈을 벌었다.

최근 공개된 1972년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대마초가 개인이나 사회에 유해하지 않으며 대마초의 생산과 유통을 규제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그해 대마초 흡연 혐의로 무려 42만명을 잡아들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1970년대 이후 30여년 동안 미국에서 대마초 흡연 혐의로 체포돼 실형을 선고받은 사람은 모두 1500만명을 넘어선다. 우리나라에서도 2002년을 기준으로 마약 사범은 모두 5594명, 이 가운데 대마 사범이 1302명에 이른다. 우리나라는 다만 미국을 따라 대마초를 금지하고 지금까지 그 법을 그대로 지켜오고 있다.

우려하는 것과 달리 네델란드에서는 76년 대마초 합법화 이후 대마초 흡연 인구가 오히려 크게 줄어들었다는 통계도 있다. 필로폰이나 코카인의 흡연 인구도 줄어들었다. 무조건 처벌과 단속이 능사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2000년대 들어 벨기에와 룩셈부르크, 스위스 등 유럽 국가들이 대마초를 합법화하고 있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유현은 한발 더 나아가 대마초를 합법화해야 필로폰이나 코카인같은 독성마약을 줄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은 대마초나 필로폰이나 코카인이나 그 차이를 구별하지 못한다. 대마초가 합법이라면 대마초를 피울 사람들이 필로폰이나 코카인에 손을 대지 않게 된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필로폰이 대마초보다 훨씬 넓게 퍼져있다. 심지어 대마초가 흡연인구와 폐암 사망률을 낮춰줄 수 있다고도 주장한다. 대마초가 담배의 대체제이면서 몸에도 훨씬 덜 해롭고 중독성도 없다는 이야기다. 물론 상용화만 된다면 가격도 훨씬 더 쌀 수 있다.

대마초와 별개로 대마산업을 다시 육성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듀폰과 허스트 때문에 무너졌던 대마 섬유와 대마 펄프가 뒤늦게나마 환경 문제의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종이 1톤을 만들려면 30년생 나무 172그루를 잘라내고 다시 30년을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대마는 다음해에도 그 다음해에도 똑같이 열매를 맺는다. 1에이커에서 재배된 대마는 2-4 에이커에서 자란 나무를 대체할 수 있다. 게다가 종이의 질도 훨씬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유현은 자본주의가 대마초를 혐오했던 가장 큰 이유가 노동자 계급에게 지나치게 적은 비용으로 큰 기쁨을 줬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대마초와 비교할 때 담배는 현실을 겨우 견뎌낼 만큼의 적당한 기쁨을 준다. 대마초와 대마초가 상징하는 삶의 방식은 금욕적 노동에 기초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반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아마도 자본주의는 그래서 노동자 계급에게 대마초를 허락하지 않았고 유현은 거꾸로 그래서 대마초를 꿈꾼다. 금욕을 강요하는 사회가 받아들이기에는 참으로 불온한 상상이다.

이정환/ 월간 '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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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eetmagic 2004-09-12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역사학계 '고종시대' 해석 놓고 논쟁
이태진 서울대 교수 vs 김재호 전남대 교수… 國體·財政의 근대성이 쟁점
 
국사학계와 경제사학계의 풀리지 않는 '역사해석' 갈등이 조선후기 농업분야에서 '고종시대'로 장소를 옮겨 정면으로 맞붙었다. 이태진 서울대 교수(국사학)와 김재호 전남대 교수(경제사)가 교수신문 비평섹션에서 반론과 재반론을 통해 치열하게 논쟁중이다.

이 논쟁이 주목되는 이유는 '고종시대'가 '내재적 발전론'과 '식민지 근대화론'이 맞붙을 수 있는 마지막 시공간이라는 데 있다. 만약 이 곳에서 '식민지 근대화론'에 입각한 경제사적 주장이 우세를 점할 경우, 조선시대 전반을 '근대성'의 실현과정으로 묘사해온 국사학계의 길고 긴 작업은 아마 '쇠락'의 길로 접어들 지 않을까 하는 전망도 있다.

논의의 발단은 이태진 교수의 1999년 저작 '고종시대의 재조명'과 故 김대준 교수의 '고종시대 재정연구'에 대한 김재호 교수의 논쟁적 서평이었다. 김 교수는 이태진 교수 책이 고종의 업적을 과잉 강조했으며, 김대준 교수 책은 아예 첫단추가 잘못 끼워져 대한제국 시대의 재정상태를 '근대적 기획'으로 잘못 인식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교수신문 321호).

이에 맞서 이태진 교수는 반론에서 "대한제국은 일본의 입헌군주제에 비견될 만한 것"이라는 점을 실증적으로 주장했고, "대한제국의 제정제도를 비판하는 학계의 주류적 입장은 왕실의 권력을 약화시키려했던 일제의 기준을 따르는 것"이라며 반박했다.

그러나 김재호 교수의 재반론은 전혀 주눅들지 않은 채 이태진 교수가 자료를 조합하는 과정에서 사료해석의 과학성이 부족함을 보여준다며, 고종시대가 근대국가이기 위해서는 '국민'과 그 국민의 대표로서 국왕이 존재해야 하는데, 고종은 여전히 백성의 아버지였으며, 당시에는 '民'이라는 개념으로 묶일만한 군중도 없었다고 반박했고, 고종시대에 잠깐 존재했던 '황실재정의 팽창'은 "전제적 군주권력의 재정적 표현"이라고 일축함으로써 맞서고 있다.

이에 대한 이태진 교수의 반론은 교수신문 다음호에 실릴 예정이다. 또한 두 교수의 논쟁을 지켜본 왕현종 연세대 교수의 제3의 시선도 함께 소개된다. 고구려사 문제가 쟁점이 되고 있는 지금, 역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대해 역사학계를 넘어 학계 전체의 관심이 필요하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대한제국 매장이 식민사관의 출발점…일제의 평가 잣대부터 비판해야
반론 : 김재호 교수의 서평(교수신문 제321호)에 대해
2004년 08월 26일   이태진 서울대 

김재호 교수가 내 책 ‘고종시대의 재조명’과 故 김대준의 ‘고종시대의 국가재정연구’에 대해 “고종 업적 과잉 강조”로 평했다. ‘재조명’은 전에도 비슷한 서평을 받았지만, 이번 논평은 다수의 ‘문제점’들을 망라해 좋은 해명의 기회로 삼고 싶다. ‘국가재정’은 1974년도 박사학위 논문인데 저자가 타계한 후 사장돼 필자가 이를 안타깝게 여겨 출판에 붙인 것인데, 뜻밖의 혹평으로 변호의 책임을 느낀다.

김 교수는 ‘재조명’에는 왕조극복이란 문제의식을 찾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대한제국이 18세기 이래의 君民 일체의 민국정치이념을 계승해 이를 근대국가 수립 기반으로 삼고자 했다고 하더라도, 독립협회의 민권운동을 탄압할 정도로 전제주의였던 만큼 내 견해에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전에 나온 서평도 대한제국은 봉건왕조의 재판이라고 해 나의 근대국가론을 비판했다. 나는 이런 비판 자체가 일제 식민주의 역사왜곡의 덫에 걸려 있는 것이라고 본다.

봉건왕조설은 대한제국의 ‘國制’(1899. 8)가 ‘전제정치’, ‘무한한 군권’(2, 3조)을 규정해 전제군주체제를 선명하게 표방한 이상 근대 국민국가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런 표현은 19세기 유럽의 입헌군주제에서 흔한 것이며, 明治 일본의 ‘대일본제국헌법’(이하 ‘일본헌법’)도 마찬가지다. 일본헌법은 ‘신성불가침’의 ‘萬世一系의 천황’이 ‘통치권을 총람한다’(1, 3, 4조)라고 명시했다. ‘국제’의 전제군주정 명시를 두고 봉건왕조라고 한다면 명치 일본도 봉건왕조로 보아야 한다.

부정론자들은 ‘국제’가 全文 9조에 불과한 것도 탓한다. 7장 77조의 ‘일본헌법’에 비하면 헌법으로 간주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명치 헌법은 1889년 반포의 ‘일본헌법’이 중심이지만, 그 전후의 형법(1880), 민법(1898) 등으로 완결된다. 한국도 1895년의 회계법을 필두로, ‘국제’ 선포 뒤 육군법(1900), 형법대전(1905) 등으로 이어졌다. 이외에도 법률화를 기다리는 많은 시행 勅令들이 있었다.

‘일본헌법’이 의회제도를 도입한 반면 대한제국은 그렇지 못하다는 지적도 있다. ‘국제’에는 의회 규정이 없지만, 9개월 전 1898년 11월 2일자 칙령 ‘중추원관제개정건’은 황제와 인민협회 추천 각 25인, 총 50인으로 구성되는 중추원을 탄생시키고 이에 법률 칙령의 제정 폐지, 개정의 권한을 부여했다. ‘국제’ 반포 시점에는 심사 議定의 범위를 의정부 대신회의 회부건에 한하는 것으로 수정했지만, 권한은 동일했다. 明治 제국 의회가 장식적인 것이란 평가를 감안하면, 이 정도 뼈대를 세운 중추원 제도를  과소 평가할 이유는 없다.

김 교수는 민국정치 이념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다. 18세기 탕평군주들이 민을 군주의 분신으로, 나라의 주체를 군주와 민으로 개념화 한 것을 인정하더라도, 19세기 민중사회가 西學 수용, 東學 발흥 등으로 왕조의 비전을 문제삼은 것을 보면 그것을 새 시대를 이끌 사상체계로 평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나는 민국이념이 두 사조와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탕평군주들의 군민일체 사상에는 19세기 민중들이 서학을 통해 기대한 평등주의를 이미 반영했다. 正祖가 죽기 직전에 이의 한 실천으로 公私奴婢 전면 혁파 결정을 내린 것이 그 증거다. 동학도 反왕조, 反유교적이지 않았다. 東經大全은 유교경전을 읽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유교 윤리의식이 묻어있다. 동학 교도들은 유교세계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이를 동국사상의 근간으로 삼아 민중이 그 실현 주체가 돼 서학을 이기겠다는 의지를 다졌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연구하면 동학에 대한 이해도 새로워 질 것이다. 일반 서민을 유교 윤리 실천의 주체로 삼는 발상은 정조의 ‘향례합편’에서 이미 제시됐던 것이다. 18세기 이후 조선의 군주들은 양반의 우두머리가 아니라 온 백성의 지지를 받는 새로운 군주상을 그리고 있었다.

김 교수는 김대준의 ‘국가재정’은 출발부터 잘못된 연구라고 혹평했다. 갑오개혁에서 처음 도입된 근대적 재정제도가 대한제국기에 유지 발전됐다는 관점 자체가 오류라는 것이다. 새 회계제도가 시대착오적 황제정 아래 직속 宮內府와 內藏院의 재정 팽창으로 뒤틀려 버린 사실을 모르고 연구를 진행시켰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대한제국기 근대화 사업의 실황에 대한 이해를 좀더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 대한제국은 제국의 威儀를 갖추기 위해 황실 의전 관계 예산을 다소 많이 책정한 때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궁내부와 내장원 배정 예산이 모두 황제의 私用 또는 법외 집행으로 보는 것은 큰 잘못이다.

궁내부는 단순한 황실 관리업무 부처가 아니라 황제 주도의 근대화 사업 집행부나 마찬가지였다. 황제는 일부 관료들의 부정부패를 감안해 국운이 걸린 근대화 사업들은 황제권이 보다 쉽게 발동할 수 있는 궁내부가 수행하도록 체제를 짰다. 그 결과, 전환국, 철도국 등 근대화 사업 관련 관서 20여개가 이에 배속됐다. 내장원은 궁내부 내의 재정을 통괄하는 관서였다. 따라서 내장원이 다루는 예산을 지세 수입을 담보로 해서까지 늘인 것은 전횡 때문이 아니라 근대화 사업을 차질 없이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갑오년 일본은 서울에 8천여명의 병력을 불법 진주시킨 상태에서 꼭두각시 內閣을 급조해 총리대신에게 통치전권을 부여코자 했다. 이때 나온 宮中 府中의 분리 슬로건은 곧 10여년 전 죠슈번 세력이 천황 주위에 포진한 적대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만들어낸 주장 바로 그것이었다. 바로 그 잣대로 조선의 국정의 선악을 논하는 것은 곧 그 침략주의를 따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김대준은 1970년대 초반 역사학자가 아닌데도 놀랍게도 규장각 자료인 ‘議政府奏議’ 등에서 정부 예산관계 자료들을 뽑아 예산제도 전문가의 식견으로 이를 분석해 역사의 진실 찾기에 앞장섰다. 나는 그의 형안에 경탄해 ‘국가재정’ 출판을 서둘렀던 것인데, 김 교수는 같은 사회과학자인데도 이를 일고의 가치조차 없는 것으로 매도한다. 김 교수는 전환국이 황제의 사금고였고, 백동화 남발이 화폐제도 문란의 주범이라고도 했다. 이런 인식은 사실 일본이 러일전쟁 중 일본인 재정고문을 강제 투입해 한국정부 재정을 송두리째 삼키면서 국제사회를 상대로 퍼뜨린 유언비어의 잔재다. 일본은 러시아로부터 받지 못한 전쟁 배상금을 한국에서 벌충하기 위해 제일은행권을 강제 통용시키면서 한국의 재정과 화폐를 헐뜯는 음모적 국제 선전전을 폈다. 우리 학계는 아직 이 마수에서 벗어나지 못해 자력근대화의 역사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는 실정이다.

나는 ‘재조명’ 후 대한제국 근대화 사업을 좀더 체계적으로 이해하게 됐다. 전국 철도망 신설과 북한지역 광산 개발을 골자로 하는 국토개발계획이 있었으며, 내가 다룬 서울도시개조사업은 그 일부에 불과했다. 1898년 노선 답사를 마친 철도사업은 경부, 경의선 외에 호남선, 경원선, 경의선에 해당하는 것과 함경도와 평안도를 가로 지르는 2개 노선을 공시했다. 외국회사의 광산 개발은 사용료로 순익의 25%를 징수해 이권 침탈이란 표현이 부당한 것도 알게 됐다. 그 표현은 1907년 내정권을 빼앗으면서 5%로 낮춘 일본에게만 타당한 것이었다. 국토개발계획으로 측량사업의 비중이 커짐에 따라 1898년 7월 총리대신 총재관 제도를 도입해 量地衙門의 지위를 격상한 것은 제국의 근대화의 의지를 새삼 실감케 했다.

대한제국 근대화 사업은 더 많은 발굴자를 기다리고 있다. 그 사업은 일제 침략으로 미완에 그쳤지만 우리의 자학자조를 걷어내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대한제국은 무능으로 망한 것이 아니라 근대화사업의 빠른 성과에 대한 일본의 조기 박멸책에 희생되었던 것이다.

필자는 역사학계의 중진으로 오랫동안 조선시대의 정치, 사회, 문화, 경제에 대해 매우 폭넓게 접근하면서 독창적인 해석을 담은 논문을 발표해왔다. 최근에는 식민지 근대에까지 그 보폭을 넓히고 있다. 저서로 ‘한국병합 성립하지 않았다’, ‘한국사회발전사론’, ‘의술과 인구 그리고 농업기술’ 등의 저서가 있다.

 
재반론 : 이태진 교수의 반론(교수신문 제324호)을 읽고
국민 없는 근대국가는 없다, 사실의 부재와 해석의 과잉
2004년 08월 30일   김재호 전남대 

김재호 / 전남대 경제사

이태진 교수의 ‘고종시대의 재조명’(이하 ‘재조명’)과 故 김대준 교수의 ‘고종시대의 국가재정 연구’(이하 ‘연구’)에 대한 본인의 서평에 대해 이태진 교수가 반론했기 때문에 이에 답하고자 한다. 서평에서 본인은 18세기 ‘탕평군주’(영조와 정조)의 ‘民國政治’를 계승한 대한제국의 國制가 근대적이었다는 ‘재조명’의 주장은 왕정의 극복에 대한 문제의식을 결여한 것이며, ‘연구’의 논의는 황실재정의 팽창과 정부재정에 대한 황실의 지배로 인해 갑오개혁의 성과가 전도된 것을 간과했다고 비판했다. 신문사에서는 본인의 서평을 “고종 업적 과잉 강조, 王政 극복 문제의식 不在”라고 요약해줬다.

조선왕조는 근대화라는 것으로 설명될 수 없다

이 교수의 반론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18세기의 ‘민국정치’와 대한제국의 ‘국제’가 동학과 서학으로 표현된 민중의 비전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었으며, 특히 동학은 조선왕조에 대해서 적대적이지 않았다. 둘째, 대한제국의 ‘국제’는 외견상 전제적인 것으로 보이나 의회를 갖춘 明治일본의 입헌군주제에 비견할 수 있는 것이었다. 셋째, 대한제국의 재정제도를 평가할 때 갑오개혁의 국가재정과 왕실재정의 분리라는 기준을 적용하는 것은 왕실의 권력을 약화시키려고 했던 일제의 기준을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에 부당한 것이다.

본인은 동학과 서학이 반드시 근대지향적인 것이었으며 조선왕조가 그 비전을 받아들여야 했다고 주장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동학이 조선왕조체제에 대해서 적대적이었음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나아가 조선왕조라는 하나의 문명을 근대성이라는 단일한 차원에서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 교수가 무리하게 근대화의 차원에서 조선왕조를 해석하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다. 본인의 주장은 동학과 서학과 같은 새로운 사회운동의 존재는 성리학적 세계관을 균열시키는 새로운 세계관의 등장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체제적인 위기를 반영하고 있으며, 탕평군주의 민국정치 이념이 그 위기를 극복하고 나아가 근대사회를 건설하기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는 것을 지적했을 뿐이다.

첫째 민국정치의 이념을 혁신적인 것으로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18세기의 민국정치 이념이 국왕을 양반의 우두머리에서 백성(국민) 전체에 대한 통치자로 새롭게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대(지향)적인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지만(이러한 기준을 중국에 적용하면 어디까지 소급할 수 있을까?), 조선왕조의 국왕은 왕조개창부터 “赤子”로 표현되는 백성의 어버이임을 자임하고 있었다. 본인은 조선조 어느 국왕이 자신을 양반의 이해만을 대변하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알지 못한다. 또한 정치이념이 근대적이려면, 국왕의 권력을 우주의 질서로부터 도출하는 것을 그만두고 현실정치로 내려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태극도를 재해석하는 방식의 권력이론과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대비시켜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둘째 18세기의 사회구조가 근대적 국민국가가 상정하는 ‘民’의 동질성을 상정하기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18세기에 들어와 노비제도가 완화되고 있었다는 점은 인정할 수는 있지만, 1894년의 갑오개혁에 의해서 신분제도가 혁파될 때까지 조선왕조는 제도적으로 良賤?班常차별이 엄존하던 신분제사회였으며 사람을 팔고 사는 인신매매가 관행되던 사회였다. 이러한 사회에서 동질적인 국민(또는 민족)을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황실재정 팽창=전제적 권력구조의 재정적 표현”

한편 이 교수는 대한제국의 ‘국제’가 전제적이지 않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을 넘어 사실상의 입헌군주제로 규정해 그 인식의 지평을 넓혀가고 있다. 중추원, 그것도 권한이 축소된 대한제국기의 중추원을 의회제도로 인식하고 있다(이 기준을 중추원이 존속한 일제시대에도 적용해주기 바란다). 의회와 자문기구는 전혀 다른 제도다. 서양에서 의회제도가 발생한 것은 중세유럽의 봉건제하에서 국왕이 전쟁 등으로 인해서 생긴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정치적 권력을 분점하고 있었던 영주, 도시, 교회의 동의를 구하기 위해서 소집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며, 가장 본질적인 요소가 국왕의 과세에 대한 동의권이었다. 동의를 필요로 했던 것은 봉건제하에서는 국왕도 자신의 영지에서 나오는 수입으로서 생활해야 한다는 ‘國王自活의 원칙’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중세의 신분회의를 계승한 근대의 의회 역시 가장 중요한 기능은 국가의 과세에 대한 동의권과 통치자의 재정운영에 대한 감시기능이었다. 주지하듯이 조선왕조는 전혀 다른 원리에 의해서 작동되는 중앙집권적 군현제 국가였다. 독자적 권력을 분점한 영주나 국왕의 지배를 벗어난 토지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鄭道傳이 “人君無私藏”(?朝鮮經國典?)이라고 표현하였듯이 국왕은 국가재정과 별도로 자신의 재산을 가질 필요조차 없다는 이념하에서 인민과 토지에 대해서 수취했다. 조선왕조의 국왕은 동의를 구할 대상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이 교수는 자신의 주장을 비판하는 연구자들이 대한제국의 ‘국제’를 “봉건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고 논단하고 있는데 이상에서 그러한 우려는 기우였음을 이해했을 것이다).

대한제국의 중추원이 국왕의 과세에 대해서 국민을 대표해, 적어도 어느 한 신분이라도 대표해, 동의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는가. 대한제국은 그 이전 조선왕조의 국왕이 그러했듯 아무런 동의가 필요없이 과세를 할 수 있었다. 사법, 행정, 군사, 재정, 외교 등 국가의 모든 업무에 대해서 분할되지 않는 권력이 국왕 일신에 집중돼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가 대한제국의 ‘국제’를 전제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 이전 조선왕조와 크게 달라진 점은 그렇게 전제적임을 명문으로 규정했다는 점에 있다. 황실재정의 팽창은 이러한 대한제국 ‘국제’의 전제적 권력구조의 재정적 표현일 뿐이다. 우리가 황실재정을 문제로 삼는 것은 근대국가의 초보적 조건이 통치자의 재정과 국가재정의 경계를 명확히 해 통치자의 자의적인 재정운영을 방지함으로써 통치자의 전제를 방지하고 납세자인 국민의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대한민국이 근대국가인 것은 대통령에게 권력이 집중돼 있지만, 청와대가 한국은행을 지배해 화폐를 남발하고 재정경제부 관할의 국가재원을 집중해 “국토개발계획”을 시행할 수 없도록 제도가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이러한 기준은 갑오개혁시에 일제가 강요한 것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는데, 대한제국의 많은 제도들이 갑오개혁의 성과를 이어받은 것으로서 이 교수가 높이 평가하는 회계법이나 예산제도도 갑오개혁에 의해서 도입된 것이다. 신분제도의 혁파도 마찬가지인데 자신의 기준을 갑오개혁에 의해서 시행된 모든 개혁정책에 적용하는 일관성을 보여주기를 희망한다.

객관적 사실인식에서의 오류 많다

마지막으로, 이 교수의 주장이 고종황제가 무능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으며, 대한제국이 근대화를 위한 정책에 주어진 조건하에서 나름대로 노력했다는 정도였다면, 본인은 굳이 비판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교수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고종황제가 외세의존적인 개화파들에 맞서 근대화정책을 자주적으로 그리고 성공적으로 수행했다고 주장함으로써 대한제국의 망국과 식민지화에 대한 고종의 책임을 면제시키는 한편, 갑신정변 갑오개혁 독립협회로 대표되는 개화기 선각자들의 고투를 단지 일본이라는 외세에 부화해 권력을 장악하고자 하는 권력투쟁으로 폄하하고 있는 것이다. 앞날을 내다볼 수 없이 전개됐던 한국근대사를 親日이라는 현재의 잣대 하나로 재단해서는 다 잘려나가 남는 것이 별로 없을 것이다. 대한제국의 재정의 난맥상과 악화(백동화) 남발에 의한 인플레이션마저도 일제의 ‘국제선전전’에 의해서 날조된 것이라고 사고하는 이 교수에게 객관적 사실인식을 기대하기 어렵지만, 주장하듯이 국왕만 홀로 남은 역사에서 우리는 과연 ‘자학자조’를 씻어내고 자긍심을 되찾게 될 것인가. 역사 연구가 어느 개인을 지목해 책임을 지우고 淸算하는 것으로 전락해서는 앞날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정말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만 한다면 대한제국 ‘국제’에서 규정하고 있는 유일한 주권자 고종황제에게 물어야할 것이다.

필자는 서울대에서 ‘甲午改革이후 近代的 財政制度의 形成過程에 관한 硏究’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기업의 발흥과 관료, 1876-1910’, ‘한국 전통사회의 기근과 그 대응:1392-1910’ 등의 논문이, ‘맛질의 농민들 - 한국근세촌락생활사’ 등의 저서가 있다.

 
'황제'가 아니라 '시대'의 복권을 위해
반론 : 김재호 교수의 재반론을 읽고
2004년 09월 10일   이태진 서울대 

이태진 / 서울대·국사학

고종시대 연구는 지금 시작 단계나 마찬가지다. 고종시대에 생산된 공문서 자료조차 체계적으로 정리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 시대의 정부와 군주의 무능을 논단하는 것은 순서가 잘못됐다. 나의 '고종시대의 재조명'도 실은 이 시대에 대한 그간의 부정적 인식으로 버려진 역사들을 찾아내 새로운 인식의 계기를 만들어 보려는 데 뜻을 둔 것이다. 김재호 교수는 나의 이런 기본 취지에 별로 동의하지 않는 듯하다. 나는 지난 번 답론에서 김 교수가 지적한 문제점들에 답하면서 대한제국이 꾀한 근대국가의 큰 구상을 정리해 제시했다. 김 교수는 이에 대해서는 특별한 언급 없이 각론 몇가지를 중심으로 다시 반론을 폈다.

첫째, 동학 대두, 서학 수용과 민국이념을 같은 사조로 볼 수 있다는 내 변론에 대해 설령 그렇더라도 민국이념으로는 근대사회를 보장하기 어렵다는 지적을 되풀이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동원해서 민국이념의 빈약성(?)을 부각하고, 그것은 조선 초기이래 군주들이 수없이 되풀이 한 赤子論에 불과할 것이라고 했다. 

김 교수는 내가 세가지 사조들이 근대 지향성을 띤 것으로 본 것에 대해 조선사회를 '근대성'의 단일 기준으로 지나치게 풀이하는 것이라고 했지만, 나에게는 마키아벨리즘의 잣대로 민국이념을 평가하려는 그의 논평 자체가 오히려 '근대주의'로 보인다. 서로 다른 공간에서 일어나는 탈중세의 현상들은 꼭 같은 모습일 수 없다. 서양 근대 이행기에 이 나라 저 나라에서 일어난 현상들을 우리 역사 하나가 다 갖추기를 기대하기는 더욱 어렵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근대적 왕정의 모델이 돼야 하는 이유도 없다. 적자론도 신분적 차별 의식이 있던 때와 거기서 벗어나는 때 사이에는 함의가 다른 것을 해독해야 한다. 김 교수는 조선사회는 1894년 신분제도 혁파 때까지 신분차별이 엄존한 사회라고 했지만, 잔재적 현상은 그 이후에도 계속되지 않았던가. 1894년 갑오개혁의 신분제 철폐는 독존적인 것이 아니라, 正祖가 민국이념 차원에서 결정한 공사노비제 전면 철폐, 이에 대한 고종의 사노비 세습 혁파 재천명(1886) 등을 배경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둘째, 김 교수는 중추원이 자문기관으로 초기형 의회가 될 수 없다고 하면서 유럽 의회제도의 기원을 상론했다. 즉 중세 유럽의 의회는 국왕의 과세에 대한 영주, 도시, 교회의 동의를 구하는 것에서 대두한 것으로, 근대 의회제도는 국왕의 과세에 대한 동의권 여부가 핵심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비춰 그런 권한이 없는 대한제국의 중추원은 의회가 될 수 없다고 했다. 대한제국 황제는 그 이전 조선국왕들이 그랬듯이 누구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마음대로 과세를 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김 교수가 만약 조선의 왕정을 이렇게 군주 전횡의 역사로 알고 있다면 이는 큰 잘못이다. 조선왕조는 군주정이지만 '경국대전' 이래 시대 변화에 맞춰 새로운 법전 편찬을 여러 차례 할 정도로 법치의 기반이 강했다. 대한제국의 '국제'와 각종 법률의 제정도 이 전통의 근대적 연장이었다. 대한제국의 황제는 법이 정하는 것에 따라 국무를 이끌었으며, 결코 예산을 마음대로 농단하는 전횡의 군주가 아니었다. 대한제국의 예산 자료는 '議政府奏議'의 '奏本'에 모아져 있는데, '주의'란 의정부 회의를 거친 예산안이 황제에게 올려진 것을 뜻한다. 전회에 언급한 '중추원관제' 규정에 따르면 이 절차를 거친 예산안은 중추원의 '심의'를 거치게 돼 있다. 대한제국 예산은 반이 사회단체 대표로 구성되는 중추원의 심의를 거쳤다.

김 교수는 나의 작업을 '고종 홀로 남기기' 역사라고 했다. 이것은 큰 오해다. 내가 그 동안 고종을 주로 거론한 것은 이 시대 역사 왜곡이 그의 무능을 핵심으로 삼았기 때문일 뿐이다. 어떻게 역사학도가 근대화란 시대적 대과제를 황제 1인이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겠는가. 그에게는 그의 노선을 지지하면서 소리없이 임무를 수행한 많은 신료들이 있었다. 그들 가운데는 변방 상공인 출신(예: 내장원경 이용익), 서얼 출신(예: 서울도시개조의 주역 이채연) 등 비양반 출신들이 많았다. 근대화의 주역이라면 김옥균 같은 존재보다 이들이 앞세워져야 한다는 견지다. 그리고 고종 자신도 근대국가 만들기에 官民이 모두 자발적으로 참여할 필요성을 절감해 독립협회 발족안을 스스로 내지 않았던가. 주한일본공사관이 대한제국의 안정을 흔들기 위해 이 조직에 친일분자들을 침투시켜 만민공동회 시위를 벌이게 한 사실이 최근 다른 연구자(주진오 상명여대 교수)에 의해 밝혀졌다. 이런 사실까지 드러난 이상, 고종시대 역사를 되짚어 보는 생각은 당연히 가져야 한다. 우리의 진정한 근대사를 알기 위해서는 일제가 침략을 목적으로 내세운 갑신정변, 갑오개혁, 독립협회 중심의 체계는 더 의심돼야 한다. 대한제국의 근대화 사업은 일제의 침략으로 미완에 그쳤지만, 근대화를 열망한 우리의 모습의 단초를 거기에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논쟁을 지켜보며 : 왜 다시 대한제국을 거론하는가
日帝의 영향 분석 없이, 대한제국 성격규명 의미 없어
2004년 09월 10일   왕현종 연세대 

왕현종 / 연세대 한국근대사

21세기에 들어 한국사회의 가장 큰 화두는 ‘개혁’과 ‘과거사 청산’이다. 누구를 위한 개혁인지 불분명하지만, 적어도 과거사 청산의 목표는 분명하다. 지난 16대 국회에서 논의된 4대 과거사 특별법 중에서 가장 세인의 관심을 끈 주제는 ‘친일파 진상규명법’이었다. 과연 누가 친일파로 규정되고 철저하게 민족반역자로 단죄를 받을 것인가. 해방 후 한국사회의 주류를 형성했던 이들 집단에 대한 ‘과거 캐기’, 곧 역사 바로세우기는 어디까지 진행될 것인가.

그런데 최근 갑자기 지상논쟁으로 대두된 논제가 있다. 고종과 대한제국기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다. 내년이면 1905년 체결된 ‘을사보호조약’이 1백주년을 맞이한다. 러일전쟁 이후 국권이 피탈됐던 그 때 그 순간을 연상케 할 정도로 최근 동북아의 패권을 둘러싼 열강의 다툼이 치열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논란은 상당히 시의적절한 것이기도 하다.

지난 7월 중순부터 교수신문에 연재된 경제사학자인 김재호 교수와 역사학자인 이태진교수의 반론과 재반론은 세간의 화제를 뿌리고 있다. ‘고종 업적 과잉 강조, 왕정 극복 문제의식 부재’로 볼 것인가, 아니면 ‘대한제국 매장이 식민사관의 출발점’이라는 것인가. 다름 아닌 ‘고종의 리더십과 대한제국의 근대성’ 여부를 둘러싼 논전이다.

두 사람의 논점을 요약하면 크게 세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영조?정조라는 ‘탕평군주’의 계승자로서 고종의 ‘民國’개념은 전제군주정을 유지하기 위한 이념에 불과한가 아닌가, 둘째 대한제국의 재정규모에 비추어 과대하게 지출된 궁내부와 내장원의 재정팽창이 근대화의 걸림돌인가 아닌가, 셋째 1899년에 제정된 ‘國制’를 전제군주제로 볼 것인가, 아니면 중추원의 의회적 개편을 들어 입헌군주제로 간주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우선 ‘민국’개념은 전통적인 조선왕조의 통치이념에 연유하고 있다. 그렇지만 19세기 후반 문호개방이후 그 개념은 결국 근대적 잣대로 재단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이 교수 자신도 아직 명확하게 정의하지 않았다. 실제 고종의 정조계승론은 親政 초기에 하나의 이상으로 제시될 뿐이었으므로 이를 이후까지 확대시키는 것은 곤란하다. 대한제국의 재정운영과 근대화정책에 대해 갑오개혁의 제도개혁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대한제국의 조세수탈을 단지 수구세력의 봉건수탈로 규정할 수는 없다. 다만 대한제국의 근대개혁을 통칭하는 ‘광무개혁’의 성공여부에 대한 평가에 대해 이 논쟁에서는 아직 유보적이다. 제산업정책의 실체규명과 더불어 양전?지계사업의 객관적 평가를 포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장 논란이 된 부분은 대한제국의 위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 중 ‘국제’와 중추원 개편은 가장 핵심적인 사안이다. 중추원이 의회와는 다르며 대한제국은 전제군주정이었다는 김 교수의 지적은 서구의 보편적인 정의에 의한 것일 뿐 구체적인 한국근대사의 맥락과는 크게 동떨어져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1898년 중추원개편논의는 일제하 자문기구로서 중추원과 달리 의회적 성격을 부여할 수 있다. 이것이 제도화되었다면 입헌논의는 탄력을 받아 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고종은 이를 허용할 것처럼 하다가 결국 좌절시키고 이듬해 ‘국제’를 제정한 것이었다.

따라서 1899년 이후에도 종전 중추원관제개정을 거의 그대로 수용했다는 이 교수의 설명은 실제 중추원이 무력화되었던 사실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대한제국의 국제는 당시 광범위한 입헌논의와 제반 정치세력의 입지를 수용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대한제국은 흠정의 법전 제정이후 더 이상의 근대법을 마련하지 않았다. 따라서 1899년 이후 헌법적인 체제를 확립하지 못한 채, 황제권은 이데올로기적인 성격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현재 논쟁의 원인으로 되었던 고종시대의 재조명에 대해 필자가 전에 지적한 것처럼, 주인공인 고종이 어떤 생각을 했으며, 어떻게 주체적으로 행동했는지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과연 고종은 1876년 개항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또한 1894년 농민전쟁과 갑오개혁을 어떻게 타개하려고 했는지, 그리고 대한제국기 근대화 개혁정책을 어디까지 끌고 나가려고 했는지. 고종의 주체적인 판단과 지향점이 구체적으로 찾아지지 않는다. 도리어 역사적 상황에 대비된 고종의 영웅적인 역할만 부각시킬 뿐”이라고 비판했다. 고종의 절대화만 강조하는 민족주의적 시각으로는 역사적 구조변화의 동인과 주체를 다각도로 분석하기에는 부적절하기 때문이다.

한편 이번 지상논쟁에서는 보다 본질적인 부분을 애써 피해가려고 하고 있다. 한국근대개혁운동의 전개에서 일본제국주의가 끼친 영향과 평가 문제다. 과연 갑신정변에서 독립협회운동에 이르기까지 개화파의 개혁운동을 일제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에서 친일파로 매도할 것인가, 아니면 그런 민족주의적 판단여부와 관계없이 근대개혁의 과제에 비추어 일제와 친일정치세력을 긍정적으로 재평가할 것인가. 이는 앞서 과거사청산의 과제와 맞물려있다.

최근 한국경제사학계에서는 19세기 생산력이 정체적 위기를 겪고 있다는 점에서 대한제국의 근대개혁 자체를 부정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대신에 근대주의적 관점에서 일제식민지근대화를 긍정하려고 하고 있다. 이런 입장을 취하다보니 1960년대 이래 한국역사학계의 화두였던 ‘내재적 발전론’이라는 관점은 이제 용도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의미에서 소위 ‘국사해체론’에 동조하고 있는 분위기다. 그러나 세계적 차원의 근대화지상주의는 결국 자민족의 억압과 민중적 삶의 해체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런 차원에서 대한제국시기 근대로의 내재적 발전이라는 흐름을 부정해서는 곤란하다. 앞으로 한국사회의 정체성과 역사성을 재발견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과연 내발론의 시각에서 대한제국의 역사적 위상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는 우리세대의 연구자들에게 남겨진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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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국사’의 굴레를 벗어던져라

[학술- 다시, 동아시아!]

‘역사전쟁’을 재생산하는 동아시아 역사인식의 문제점… 민족주의의 적대적 공생관계

▣ 임지현/ 한양대 교수 · 사학과

1992년 부다페스트의 한 강연에서 20세기를 대표하는 마르크스주의 역사가 홉스봄(Eric J. Hobsbawm)은 역사학이 핵물리학만큼이나 위험할 수 있다는 뒤늦은 깨달음에 대해서 이야기한 바 있다. 모든 역사가는 예기치 않게 정치가가 되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변이었다. 비단 동아시아의 역사학계뿐만 아니라 권력판과 시민사회를 뜨겁게 달군 동아시아의 역사전쟁이 북한의 핵무장이나 일본의 재무장 못지않게 동아시아의 평화 체제를 위협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 아시안컵 결승전에서 일본에 진 뒤 베이징 거리에 모인 중국 시민들. 과거에 대한 이해를 둘러싼 대립과 갈등의 밑바닥에는 현재의 국가간 대립과 갈등이 숨어 있다.
(사진/ AP연합)

갈등의 촉매제로 작용하는 역사

과거에 대한 이해를 둘러싼 대립과 갈등의 밑바닥에는 사실상 현재의 국가간 대립과 갈등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다이오유·센카쿠 열도를 둘러싼 일본·중국·대만의 갈등, 쿠릴·치시마 열도를 놓고 벌이는 러시아와 일본의 신경전, 독도·죽도를 둘러싼 한국과 일본의 오랜 영토분쟁 등이 역사전쟁의 정치적 배경인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의 ‘새 역사교과서’ 파동에서 시작되어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한층 가열된 동아시아의 ‘역사전쟁’은 과거의 역사적 실체를 사실적으로 구명한다고 해서 해소될 성격의 것은 아니다. 각국은 모두 문제가 되는 영토에 대한 자신들의 영유권을 뒷받침하는 자료들을 인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논쟁에서 역사는 해결책이 아니라 갈등을 유발하고 증폭하는 촉매의 역할을 한다. 다이오유·센카쿠 열도나 독도·죽도는 열렬한 민족주의자들이 가끔씩 국기를 들고 상륙하는 해프닝을 벌일 뿐, 자연적인 거주민이 없는 무인도이다. 어느 나라도 그 영토에 거주하는 주민들과의 문화적 유대를 주장할 현실적 근거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곳이 ‘우리나라 고유의 영토’라는 각국의 주장은 과거 역사와의 관련 속에서만 정당화될 뿐이다. 이때 역사학은 영토 분쟁의 학문적 첨병으로 복무한다. 유럽의 역사전쟁에서도 잘 드러났듯이, 때때로 고고학의 역할 역시 무시할 수 없다. 많은 경우, ‘역사적 진실’은 역사전쟁의 정치학을 학문의 이름으로 혹은 진실의 이름으로 은폐할 뿐이다.

역사전쟁의 가장 큰 인식론적 특징은 근대 국민국가의 주권 개념이 먼 과거에 개념적으로 개입한다는 점이다.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를 중국사의 공간적 범주로 규정하는 중국의 공식적 역사인식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한반도 북부에도 일부 걸쳐 있었지만, 만주의 큰 부분을 차지했던 고구려를 중국사의 일부로 편입하려는 ‘동북공정’의 시도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이에 대해 한국의 주류 역사학계는 문화적·형질적 연속성을 근거로 고구려사를 한국사의 일부라고 강하게 반발한다. 한국 역사학계와 시민사회의 주류는 역사적 정통의 계승을 강조하는 ‘역사 주권’의 관점을 취하고 있다. 중국의 ‘국가 주권’적 관점에 비하면 한국의 ‘역사 주권’적 관점은 근대 국민국가의 시각을 먼 과거에 그대로 투영하는 시대착오주의에서 다소 자유로운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독도와 센카쿠열도 등의 영유권을 둘러싼 논쟁에서 보듯이, ‘역사 주권’은 이 섬들에 대한 ‘국가 주권’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곧 비약된다. 일부이기는 하지만, ‘고토수복’을 외치며 한국의 주권을 만주 지역까지 넓히자는 일부 극단적 민족주의자들의 주장도 따지고 보면 ‘역사 주권’을 근거로 하고 있다. 과거에 대해 ‘국가 주권’을 고집하는 중국이나 이에 맞서 ‘역사 주권’을 주장하는 한국은 모두 근대 국민국가의 ‘국경’ 개념을 역사의 ‘변경’에 뒤집어씌우기는 마찬가지이다.

지도 위에 컴퍼스와 연필로 확실한 선을 그어 결정되는 근대 국민국가의 ‘국경’과는 달리 역사의 ‘변경’은 단일한 선을 가로질러 넘나드는 복수의 점들로 산포되어 있다. 변경은 이질적인 언어와 문화, 풍습 등을 지닌 다양한 종족들이 만나 서로 소통하고 교류하면서 서로 다른 문화의 가교가 되기도 하고 또 때로는 다양한 문화가 혼합된 다이내믹한 독자적 공동체를 형성하는 공간이다. 고구려의 역사가 가지는 의미도 한반도와 만주, 대륙의 서로 다른 문화와 종족 등이 혼합되어 만들어간 다양성과 역동성 그리고 그것이 대륙과 한반도에 미친 영향력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 중국의 역사 왜곡을 규탄하는 집회. 동아시아의 '역사전쟁'은 과거의 역사적 실체를 사실적으로 규명한다고 해서 해소될 성격의 것은 아니다. (사진/ 류우종 기자)

‘국경’에서 ‘변경’을 구출하라

고구려의 역사를 중국사나 한국사 어느 한쪽에 귀속시킬 것이 아니라, 중국인도 한국인도 아닌 고구려인들을 역사적으로 복권시켜 그들에게 돌려주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도쿠카와막부의 가신이자 조선 왕의 신하였던 쓰시마 영주와 그 섬의 과거를 일본사에서 구출하여, 동아시아의 문화를 풍요롭게 했던 ‘변경’의 역사로 복원하려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한국사로 포함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오해하지는 마시기를!). 자신에게 익숙한 지역의 과거가 자기 민족만의 독점적 소유물이라고 생각하는 태도야말로 동아시아의 역사인식이 갖는 큰 문제인 것이다. ‘과거는 외국’인 것이다.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일본의 ‘새 역사교과서’가 함축하는 그들의 민족주의에 대한 한국의 주류 학계나 시민사회의 대응은 우리의 민족주의였다. 19세기 독일의 문헌학적 전통이나 랑케류의 실증사학이 이미 독일의 역사를 발명하고 모든 나라의 국사를 창조하는 데 기여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임에도, 한국의 역사학계가 반론으로 제시한 역사적 실체나 진실은 아무리 객관성이나 과학성으로 포장해도 한국의 민족주의적 역사해석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새 역사교과서’를 지지하는 <산케이신문>이 일본의 우익 수정주의 역사가들에게 한국의 국정 역사교과서를 본받으라는 사설을 게재했을 때, 이미 한국 역사학계의 민족주의적 대응방식은 사실상 전략적 파산을 선고받은 것이었다. 일본의 ‘새 역사교과서’보다 더 강한 민족주의적 색채를 띤 한국 국정교과서의 해석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주장은 국내에서는 통용될지 모르겠지만 대외적으로는 설득력을 지니지 못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동아시아의 민족주의는 서로가 서로를 배제하고 타자화한다는 점에서 현상적으로는 첨예하게 충돌하지만, 사유의 기본적인 틀과 이데올로기적인 전략을 공유하는 것이다. 한반도의 민족주의 혹은 그 역사적 해석에 대한 비판이야말로 역설적으로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일본의 신민족주의 역사학에 대한 근원적인 비판이 될 수 있는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다.

동아시아의 민족주의가 맺고 있는 적대적 공범 관계의 은폐된 현실을 직시한다면, 한국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이 그들의 민족주의 앞에서 우리의 민족주의를 무장해제시킨다는 단순논리는 더 이상 현실의 비판을 견뎌낼 수 없다. 한국의 ‘국사’를 정사로 놓고, 중국이나 일본의 ‘국사’가 틀렸다는 주장은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 고구려사에 국한해보자면, ‘국경’에서 ‘변경’을 구출하는 것이야말로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가장 신랄하고 날카로운 비판의 무기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에서 일말의 여지 없이 당연시되는 ‘국사’는 일제의 용어이기도 하지만, 그에 앞서 민족과 국가를 역사의 주체이자 발전의 정점으로 간주함으로써 시민사회의 역사의식을 민족주의적으로 규율하는 효과적인 권력의 기제이다. ‘국사’의 패러다임에 갇혀 있는 한, 동아시아의 역사학은 권력의 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획일적 ‘국민’ 주체를 만드는 규율 권력의 기제로 작동할 것이다.

국사의 해체와 역사학의 민주화

한국, 북한, 중국, 대만, 일본 등 동아시아 5개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국사’를 해체하고 국가의 멍에로부터 역사학을 민주화할 때, 동아시아 민중연대와 평화체제가 가능하지 않을까 한다. 시민사회의 역사의식이 민족주의적으로 규율화되어 있는 한, 역사전쟁은 소재와 형식을 달리하면서 끊임없이 지속되고 그것은 다시 동아시아 민족주의의 적대적 공범 관계를 강화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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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달프 2004-08-20 2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싸우기만 하는 동아시아(한정숙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지난 몇 해 사이 한국의 지식사회에서는 동아시아 공동체 담론이 관심을 끌었다. 분쟁과 갈등의 역사를 극복하고 화해와 공존의 미래로 나아가자는 발상에서 모범 케이스가 된 것은 유럽연합(EU)이다. 그런데 유럽연합과 동아시아 공동체론은 논의의 형성 시기와 성장배경, 관련 국가들의 태도에서 차이가 있다.
유럽연합은 냉전 시기에 태동하여 반소 서방사회에 편입된 나라들을 주축으로 발전했다. 상호갈등과 전쟁의 역사를 극복하겠다는 의지도 의지였거니와, 정치적으로는 ‘공동의 적’에 대응하고 경제적으로는 미국과 일본에 맞서 보겠다는 의지가 유럽인들의 결속을 촉진했다. 미국은 반소 진영에 유럽을 묶어두는 데 관심이 있었으므로 이를 가로막지 않았다. 석탄철강공동체라는 맹아에서 출발하여 마침내 유럽연합이 형성되었을 때에는 이미 냉전이 끝났고, 과거 사회주의 진영에 속했던 나라들까지 차츰 포함되고 있지만 이제는 강력해진 유럽을 막을 세력이 없다.

최근 이라크전을 둘러싸고 미국과 유럽이 대립한 것은 미국으로서는 역사의 아이러니라 여길 법한 일이다. 반면, 동아시아에서는 개별국가들이 대외관계에서 너무나 다른 우선순위를 가지고 있다. 남한은 당분간은 한-미 동맹을 우선할 것이고, 아시아의 일원으로 머무르는 데 만족지 못하는 일본 또한 미국과의 관계를 최우선으로 삼을 테지만, 중국은 미국과의 패권경쟁도 마다하지 않을 태세이다. 북한과 대만도 고려되어야 할 터인데, 그림이 어떠한가.

그리고 유럽 연합의 구성원들은 국력이 엇비슷하여 유럽연합 가입으로 특정한 패권세력에게 주권을 상실한다는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독일이 패권 추구적 야심을 드러냈지만 혹독한 징벌을 받은 후에는 유럽 내에서의 평화공존이라는 국가적 목표를 바꾼 적이 없다. 주변국들도 독일을 신뢰하게 되었고 독일과 프랑스가 주도한 유럽통합 운동에 동조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유럽 국가들 사이에서는 적어도 자신들 사이에서는 공통의 규칙을 준수해야 한다는 합의가 형성되었다. 이에는 유럽에서 줄기차게 전개된 평화운동의 역할도 적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동아시아는 어떤가? 중국과 대만 사이의 긴장은 남북한 긴장보다도 더 심하다. 일본은 재무장 논의 때문에 주변국들의 불신을 사고 있는데, 재무장 논의에 빌미를 준 것은 북한의 미사일 실험과 핵무기 보유 논쟁이었다. 그런 일본은 중국이 러시아로부터 무기를 사들여 군비를 증강하고 있다고(그것은 사실이다) 비난하고 있다. 그 가운데 끼인 남한은 아슬아슬한 심정으로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대외정책에서 힘이 없다. 상호군축 문제는 언급조차 되지 않고 있다.

동아시아에서는 역사 왜곡 문제도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튀어나와 소모적인 국수주의적 논란의 빌미를 제공하곤 하는데, 이번에는 중국이 고구려사와 관련하여 어지러운 행보를 하고 나섰다. 소수민족 통제 차원일 수도 있겠고, 패권주의의 발로일 수도 있겠으나, 역사 해석을 국가기관이 주도하는 관제사학의 풍토 아래서는 시민적 역사연구가 지극히 어렵고, 역사논쟁이 그대로 외교 분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한 예라 하겠다. 덧붙인다면, 남한에서 전개되었던 간도 되찾기 운동을 비롯한 민족주의적 대응도 중국으로서는 유쾌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동아시아 국가들 사이에서는 아직까지 상호불신의 요인들이 너무나 많다. 합리적인 규칙보다 떼쓰기와 호전성 과시가 앞서기도 한다. 동아시아국가들은 한자 문화권에 오랫동안 속해 있었다는 공통성과 지리적 근접성 때문에 인적·문화적 교류를 강화해 왔지만, 국가적 차원에서 진정한 상호존중과 평화공영을 지향한다는 공동선언은 나오지 않았다. 공동체론은 고사하고 최소한 상호불신을 제거하기 위한 논의의 틀부터 마련해야 한다. 아래로부터의 압력이 이를 관철해 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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