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를 기다리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
사무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 / 민음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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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라한 몽파르나스 바빌론 소극장에서 공연되던 이 연극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1953년 [피가로]지에 장 아누이가 쓴 [광대들의 팡세]라는 논평이었다. 고도를 누구로 여기느냐는 베게트의 말처럼 관객 자신의 몫이지만 나 역시 아누이와 같은 느낌으로 고도를 본다.
 
삶의 질곡을 담아낸 구두와 이성적 사고의 모자로 대변되는 고고와 디디가 처음 등장하는 1막은 십자가 옆의 두 도둑들의 구원의 가능성에 관심이 모아진다. 죄인됨을 수락하는 회개로서 이분의 일의 구원의 가능성을 얻을 수 있는가? 디디는 회의적이고 고고는 긍정적이다. 고도를 기다리는 두 사람은 회개의 문제에는 다르다. 이들은 인본주의와 전통, 혹은 구교와 신교, 자유주의와 오소독시를 보여주는 대비의 재미가 있다.
 
이들 앞에 등장하는 20세기적 삶의 조건, 자본주의. 땅의 주인인 포조는 고도를 기다리는 두 사람 앞에 자본가의 잔혹함으로 나타난다.  포조는 럭키에 기생하며 럭키의 이론(자본론이라 할 수 있을까)에서 자본주의의 합리화를 배워낸존재이다. 그는 군림하나 정작 자신의 중요한 면들이 소모되어짐을 깨닫지 못하는 자이기도 하다 
 
같은 장소, 2막은 자못 심각한 주제를 논하며 시작한다.  분주함과 말장난, 혹은 이데올로기는 죽음 앞에 선 존재들로 죽음을 잊게 하는 파스칼적 회피이다. 이런 무가치한 시간 보냄에서 확실한 것은 기다림뿐. 시간이라는 가혹한 운명에 기다림조차 없다면 까뮈의 말처럼 나무에 매달릴 수 밖에 없는 존재인걸. 포조는 고도가 아니다.  결코 아니다.  포조를 고도로 믿고 싶어하는 고고와 디디가 비록 몇 있을지라도...포조가 가는 길은 눈이 멀고 귀가 머는 길이다. 일상의 습관과 투쟁의 변증법 속에 길을 잃고 마는 존재들.
 
아일랜드인다운, 조이스를 연상케 하는 예술에 대한 견해와 파스칼과 까뮈를 보는 듯한 프랑스적 사변 속에서 베게트는 20세기를 관통한 기독교 사회의 한 질문을 던진다. 슈바이처가 말한 영원히 [연기된 종말]인가 아니면, 자비로우신 오래참음인가. 대답은 사색이나 토론에 있지 않고 오리라 약속한 이에 대한 신뢰와, 나 자신의 구원의 가능성에 대한 겸손함 안에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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