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자본주의 / 자본주의 문명 창비신서 119
이매뉴엘 월러스틴 지음 / 창비 / 199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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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러스틴이 말하는 세계체계로서의 자본주의는 근본 성격에 있어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이해에 뿌리를 둔다. 만물의 상품화를 향해 진행하는 자본주의는, 자본의 자기확장 위한 연쇄체계를 완성하였으나 이 관계안에 내재적 모순을 가지고 있어 이를 극복하고자  끊임없이 확장하여야만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프롤레타리아화되어 왔으나 이는 도리어 이윤하락을 가져왔고, 지리적 팽창으로 새로운 노동력을 편입하여 상쇄해 나가야만 했다. 이런  절대 불합리한 체제가 자리 잡은 이유는 이 체제에 의해 이득을 얻는 1450년대 위기의 지배층에서 그대로 1650년대  자본주의 체제의 상부층된 계급의 의지에 있다. 
 
월러스틴의 주제는 이런 자본의 확장과 계층의 이행이라는 주제하에 국가가 어떻게 역사적 자본주의를 지지해 왔으며, 국가간의 견제와 무역관계가 이 체계에서의 탈피를 불가능하게 하면서 점점더 많은 국가들을 그 하부조직의 한 분업자로 끌여들였는지를 설명해 나간다. 결국 겉으로 보기에  민족, 반제국주의,민주주의,진보지향을 보였던 투쟁들은 그 의미에서 결국 결국 가진자와 못 가진 자의 투쟁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흔히 반체제 운동이라는 것도 결국 국가권력의 장악을 통한 개량에 목적있으며, 결국 권력획득 후 역사적 자본주의 분업체계의 일부 기능을 맡게 되었다.  여러 세력들은 역사를 통해 부글거렸으나 결국 끊임없는 자본 축적을 이롭게 하고, 실질적인 격차의 끊임없는 확대를 돕는 역할만을 해 왔다는 것이다.
 
흔히 이런 사상적 파행의 감시자 역할을 기대해 왔던 지식층과 여론의 역할은 도리어 이런 체제를 공고히하고 확산되도록 도왔다. 인종차별주의는 노동력을 계층화하고 재생산시켜 하부층을 지배하기 편리케 했으며, 계몽주의에 뿌리를 둔 보편주의는 중간층을 회유하고, 부의 소유를 합리화하여 자본을 방어하며, 능력주의라는 미명하에 교묘한 계층을 만드는 구실이 되어왔다. 진보의 이념이 결국 반자본주의를 타도하여왔다. 아무도 진보를 반대하지 않고 자본주의의 반대자도 진보를 찬양하는 가운데 공산주의 역시 진보의 그늘아래 있었고 또 실패의 길을 내달았다.
 
아무도 진보를 반대치 못하는 이유는 진보가 인간을 부유하게 했고 빈곤을 몰아냈다는 환상때문이다. 실제 20세기 인간의 대다수는 오히려 절대빈곤에 떨어지게 되고 합리화의 계층인 10-15%만이 서로 합리화 시키며 이를 부정하고 있다. 진보이데올로기는 부르조와지로 변신한 토지귀족의 창작품이다. 이런 상태에서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이라는 것은 결국 자본주의의 껍질만 벗는 새로운 차별수단의 지속이 될 수 있다. 이제 반체제 투쟁이란 자본주의가 평등한 사회주의로 이행하는데 기여해야만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투쟁의 장은 사실 반체제세력 자신의 내부, 즉 그 진보에 대한 애착과 이권에 대한 집착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월러스틴은 내 안에 자본주의의 이해에 대한 또 하나의 벽을 무너뜨리는 역할을 한다. 한국의 중산 지식계급이 도저히 경험적으로 인정할 수 없는 세계의 모습을 들이대고 옳음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과연 더 많은 동료 인간들이 비인간적이고 열악한 삶으로 버텨내야하는 피라미드의 윗층에서, 장난감 놀이 같은 피라미드 상층부의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삶을 살고 말 것인가라고...나의 연구가 자본주의가 원하는 연구가 되지 않고 더 많은 고통받는 사람을 위한 것이 되기 위해선 결국 거슬러 일해야 한다. [생명이 있는 것은 강을 거슬러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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