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소독시 -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
G. K. 체스터튼 지음, 윤미연 옮김 / 이끌리오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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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신앙이라면 이미 검증이 끝난 것이 아닌가? 서양철학의 19세기는 정통신앙이 현대인의 삶을 설명하기에는 너무 낡았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규정과 함께 19세기의 인간은 삶의 기쁨과 의미, 자유와 행복을 위한 근거를 잃었고, 지금 21세기까지 계속되어오는 [작은 조각배처럼 부유하는] 의미없는 삶을... 이런 목적지 없는 망망대해에서의 표류를...과연 자유라고 불러야할지 난파한 삶이라 불러야할지 고민하고있다.
 
체스터턴의 시대는 버나드쇼와 스펜서의 시대, 니체와 다윈의 제자들의 시대였다. 인간은 [결정적 발견들] 앞에 들떠있었다. 인간은 동물의 한 변종이었던 것이다. 모든 도덕은 어처구니없는 사기극이었고 이제 모두 벗어던져도 되는 것이었다. 모든 제도는 항상 불완전하며 무한한 진화를 향한 길 위에 서있는 것이었다. 그 순간 인간은 갑작스레 자살을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사는건, 개인은, 이웃은 아무 의미없는 것들이었다. 아름답다고 하는 모든 것은 정글의 한 모습인 더럽고 추하고 구역질나는 것들이었다. 사는건 무의미했고 내 주위의 인간은 모두 적이었으며 나는 강물 위에 부유하는 쓰레기 정도의 가치를 지닌 존재였다. 죽지 않을 이유가 있는가?
 
20세기초, 이런 잃어버린 사람들을 향한 체스터턴의 질문이 시작된다.그는 인간이 빠진 이 어이없는 자기학대와 무의미성의 처참함에 대해 따뜻하다. 당시 철학의 이성적 결말의 파멸을 지적한다. 이성은 인간을 너무나 [이성적으로] 파멸로 인도했다. 니체와 다윈에게 감탄하며 다다른 길은 어처구니없는 결론이었다. 유머와 촌철살인의 비유로, 체스터터은 인간이 너무 스스로의 지적 유희에 흥분한 것은 아닌지 묻는다. 객관적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자료라는 것이 임의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던가. 이성이라고 균형과 전인이어야지 단지 theory와 evidences라면 이것들은 도리어 이성을 도탄에 빠뜨리는 끊임없는 순환의 고리가 되는 것은 아닌지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20세기초 유행하던 사고는 결국 인간을 현재의 즐거움에 탐닉하는 존재로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반짝이는 것들. 맛있는 것들. 최고급의 것들을 향유하도록 이끌었다. 왜냐하면... 인생은 무의미하니까. 빤짝이로 치장한 인생의 속내는 너무도 처참하리만큼 어둡다. 어두운 빛깔옷의 그들 선조의 우주가 무한한 광휘와 뚜렷한 희망과 절대적 기쁨의 약속으로 가득찼던 것과는 반대로...그들은 그들의 놀이에서 너무 큰 뱃팅을 했고 그는 금칠된 시계(무한히 돌아가기만 하는 반짝이는 인생의 상징물인...)를 상품으로 얻고 [돌아갈 집]을 잃었다. 
 
체스터턴은 나에게 스스로를 테스트해보는 방법도 가르쳐 준다. 자유한가? 즐거운가? 가벼운가? 마음 깊은 곳에서 그러한가? 아니면 그렇다고 믿고 싶고 아직도 그걸 찾아 헐떡거리고 있는가? [항상 기뻐한다. 쉬지 않고 기도한다. 범사에 감사한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마음속 한 가운데 기쁨이 있는 사람. 그 기쁨의 근거가 조각배에 탄 자신이 아닌 사람은 정말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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