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리주의
존 스튜어트 밀 지음, 이을상.김수청 옮김 / 이문출판사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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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처럼 자신이 옳다는 깊은 확신으로 서로를 적대시하고, 옳음에 대한 기준이 흔들린 적이 있었을까? 해방직후의 충돌이후 드문 일이었던 것 같다. 기준이 무엇인가? 기준이라는 것이 있기나 한걸까? 공리주의는 더 많은 수의 사람이 더 많이 행복할 수 있으면 옳은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벤담의 이런 공리주의적 사고는, 행위의 결과를 정량화하여 선악의 판단기준으로 삼는다는 비난을 받아왔다. 도덕에 있어 결과가 판단점이라면, 기준이란 사실 없는 것일 수도 있다. 더욱이 선악의 판단이 쾌락의 양에 따른다는 주장은 비아냥과 더불어, 사람마다 다른 삶의 기준과 가치를 어떻게 서로의 양적 평가로 판가름할 수 있느냐는  비난도 받았었다.
 
존 스튜어트 밀은 이런 공리주의의 문제를 잘 이해하고도, 결국 해결책은 공리주의 밖에는 없다고 믿는다.  부친 제임스 밀과 벤담의 영향아래 공리주의적 교육을 받고자란 그는 성년이 되며 공리주의에 등을 돌린다. 하지만 결국 그는 종교적 가치를 상실한 인간의 궁극적 기준을 인간 공동 이익에서 찾을 수 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공리주의의 변호자가 된다. 재전향한 대변자로 공리주의를 보완코자 이 책을 쓴 셈이다. 
 
밀은 공리로 도덕의 기준을 삼을 수 있다고 한다. 미래의 예측결과라는 것 혹은 과거로부터 축적된 경험의 결과들이 현재의 동기와 이유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19세기 지대한 성과를 거둔 기술이나 자본경영 혹은 인간경영manipulation의 테크놀로지가 똑같은 방법론으로 도덕과 인간가치의 절대적 기준점으로손색이 없다는 확신이다. 인간의 가치도 도덕도 공리 밑에서 비로소 일사불란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정말 이 시대는 무엇이 됐든 확고한 가치관이 필요하기도 했다.
 
공리주의가 나의 현재 삶과 어떤 관계가 있나? 20세기를 거치며 이런 새 기준은 정말 삶의 목적을 이루는 핵심어가 되었다, 다수의 행복은 정의와 도덕의 동일어가 되었다. 우리가 매일 거침없이 내닫고 있는 인간기술의 발달과 이를 변호하는 공익의 가치가 이끌어낸 우리 삶을 되집어보면 공리가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고 [의미]를 가져가 버렸음을 느낀다. 배아복제를 반대하는 이유도 찬성하는 이유도 [가져다줄 혜택과 손실]에 있지 그 의미에 있지 않은 내 판단기준이 나의 이런 사고의 한계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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