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3년(30세)
 
I.  서언-사람들은 너무 쉽게 인정하고 앞으로 나아간다.이제 철학은 신앙에 대한 진지한 성찰없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II. 조율-아브라함 이야기의 이런저런 버전
 
III. 아브라함에게 드리는 찬사-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은 부조리를 넘어서 하나님을 믿었다.
 
IV. 문제제기
  1. 토로하고 싶은 심정
     무한한 체념의 완성-부조리의 힘- 유한성으로의 복귀의 운동
     무한한 체념 가운데 안식과 평화가 있다.
     이 운동에는 필연성이 아닌 영이 필요하다.
     무한한 체념(절망)은 신앙에 선행하는 최후의 단계이다.
     오성을 포기하게 되는 그의 단계에서,믿음을 통해 부조리를 얻으며 부조리 안에서 모든 것을 얻음.
     체념하는데는 신앙이 필요없다. 오성이면 충분하다.
    문제는 시간성과 유한성이다. 인간은 체념으로 아무런 유한성도 얻지 못한다.
     체념의 고통에서 평안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부조리에서 기쁨을 발견하는 것이 기적이다.
    낭만주의적 이상주의 안에 있는 빈정거림과 익살도 사실 무한한 체념이다.
    마지막 운동, 신앙으로의 운동 그것은 인간이 실행할 수 없다.
    우리가 묘사하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싸구려 시험의 통과가 아닌,시험의 고통이어야 한다.
   신앙의 역설, 하나의 살인과 하나님의 뜻,이삭을 아브라함에게 돌려준다는 역설이 이 책의 목적
    
* 체념의 고통으로 몰고간 사람들: 파스칼, 피히테, 쇼펜하우어, 키에르케고르, 엘룰
 
 2. 문제1: 윤리적인 것의 목적론적 유보라는 것이 있는 것일까
  보편적이 되기 위해선 단독성을 지양해야 한다. 윤리의 보편성은 개별자가 자신을 보편성 안에 해소함으로써 완성되는 목적이다.
 신앙은 단독자가 보편적인 것보다 고차원적이라는 역설이다. 이런 신앙의 입장은 매개될 수 없다.
그래서 이것은 신앙이 아닌 다른 것으로 교환하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윤리적인 보편성에 대한 목적론적 유보를 포함한다. 윤리적 표현이라면 그것은 자식에 대한 고차적 사랑이어야 했다(이피게네이아,입다의 딸, 브루터스의 아들처럼) 이것은 윤리의 범위내에 있다. 하지만, 아브라함에게 윤리는 그의 의무 곧 하나님의 의지를 표현하고자하는 그를 막는 유혹일 뿐이었다.
 아브라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매개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설명될 수 없는 것이다.이것은 동정도 공감도 시로 표현도 되지 않는 것이다.
 윤리적인 것이 보류될 때 개별자는 어떠한 방식으로 실존하는가? 보편자에 대한 모순은 곧 죄이다. 그는 믿었다. 그는 단독자로 절대자에 대한 절대관계 안으로 들어갔다. 단독자로 이런 권리를 얻었다. 이것은 결과에 따라 판단하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아브라함과 마리아는 불안과 고난을 지났다. 비난과 조롱, 몰이해와 이해시킬 수 없슴, 이런 고통과 역설 속에서 비극의 영웅이나 여장부 이상의 것이 되었다.그들은 단독자로 보편성을 넘어 지나갔다.
 아브라함은 비극적 영웅이 아니다. 그는 보편자로 볼 때 살인자일 뿐이다. 이것은 말하여질 수 없다. 그를 이해하는 사람도 충고하고 설득할 사람도 없다. 그는 역설의 길을 가기 때문이다. 이런 역설의 신앙에서 제외될 사람은 없다. 모든 인생의 유대는 정열이며, 신앙도 하나의 정열이기 때문이다. 즉 신앙을 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3. 문제2: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의무라는 것이 있는 것일까
모든 윤리적 의무마다 하나님에 대한 의무이다. 하지만 이것은 보편성으로 이끌며 이 안에서 하나님은 극히 희미한 점이 되고 무력한 사상이 되고 만다.
윤리에서 단독자의 과제는 내면성의 규정을 소외하여 외적으로 표현(헤겔)하는 것이다. 신앙은 외적인 것으로 헤아려질 수 없는 내면성이 있다는 것이다.
신앙은 단독자가 보편자보다 고차적이며 그와 절대적인 것과의 관계에 따라 보편적인 것과의 관게를 규정하지, 그와 보편적인 것과의 관계를 통해 그와 절대적인 것과의 관계를 규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앙은 보편자를 상실한다. 즉 하나님을 위해 그 두려운 일을 하는 것이다.(절대적 의무)
보편자로 설명되는 기독교를 만들려는 것, 주해나 히브리어 원문, 비평이나 신학,싸구려 신앙을 만들어 기독교를 가장 가련한 것으로 만들고 말 것이다.
단독자로 실존하고 교회이념의 보편성 안에 매몰되지 않는 것이야말로 가장 두려운 또한 위대한 일이다. 보편자 안에 사는 일은 훌륭하고 존경 받을만하고 모범이 될만하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 그것은 시험이요 유혹이다. 그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을 하려한다. 그는 머뭇거리며 가고 있다. 이 무서운 일의 끝은 하나님과 친밀한 자가 되며, 주님의 친구로 그분을 당신이라 부르는 것이다.
 
보편자 안에 행하는 영웅은 윤리적인 것을 목적론적으로 넘어설 때 보편자에 의지하며, 그것을 행하고 난 뒤 보편자 속에서 안식을 발견한다. 신앙의 기사는 오직 홀로 이 경계를 넘어가며 행하고 난 후 부단한 긴장 가운데 살게 된다.그리고 다시 하나의 운동을 행하여 기적을 향한다. 홀로인 기사는 독립되어있고 서로를 지지하는 종파적 동료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타인을 위한 인도자가 된다는 헛된 욕망을 품지도 않으며, 증인이지 선생이 되려하지 않는다. 결국 하나님에 대한 절대의무가 존재하든지, 인간끼리 서로 만족하며 사는 것(보편성)이 끝이든지 어느 하나이다.
 
** 그는 교회를 부인하거나 교제의 필요성, 공동체로서의 부름을 부정하고 교회를 파괴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교회 회원이 됨과 성도가 됨을 동일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오류인지를 보여주기 위함이다.교회에 속하는 것이 아닌 교회로 모이되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실존으로 하나님 앞에 서기를 요구하고 있다. 이것은 기독교를 윤리됨에서 벗어나게 해야만 가능하다. 기독교가 윤리라면 그것은 철학이지 신앙이 되지 못한다는 각성 때문이다. 신앙을 헤겔의 철학과 같은 싸구려 보편성으로 만드는데 이 사람은 분노한다.
 
** 이것이냐 저것이냐는 결국 파스칼의 도박의 비유와 같은 것은 아닌가?
 
 4. 문제3: 아브라함이 사라나 엘리자나 이삭 앞에서 자기의 계획을 침묵에 붙여버린 것을 그가 윤리적으로 책임질 수 있는 것일까
 윤리적인 것은 보편적이며 현시적이다. 단독자는 직접 감성적, 심령적이며 은폐자이다. 은폐성이 없이 아브라함은 변호될 수 없다. 신앙은 최초의 직접성이 아니라 최후의 직접성이다. 최초의 직접성은 심미적이다. 미학과 윤리학의 한계영역에서 흥미가 존재한다.(심미-윤리-신앙)
미학의 반전과 재발견은 해소이며 은폐는 극적 긴장을 주는 요소이다.은폐성은 자유로운 행위이며 미학의 책임이 있다.윤리학은 경험도 우연도 모른다. 미학은 은폐성을 요구하고 이에 보답하며 윤리학은 드러남을 요구하고 은폐를 처벌한다.
미학의 드러남은 우연에 맡겨진다. 윤리학은 직접 비극적 영웅이 드러냄을 통해 만족을 발견한다.
 
인간을 위대하게 만드는 비밀과 침묵은 본래부터 있는 것. 즉 내면성의 규정들임. 델피 신랑의 침묵은 윤리적 요구에 노출되어있다. 물의 요정은 아그네테에게 후회를 은폐함으로써 단독자로서 악마적인 것과의 절대관계에 들어가지 않고 구출된다. 역설로의 도피이다. 죄 때문에 단독자가 된 요정은 더 나아가는 운동인 역설을 통해 보편자를 실현한다.이것이 미학의 영역이다.토비아서의 사라는 동정을 견딜 수 없는 존재이다. 보편자 밖에 놓이는 것은 악마적인 것의 시초일 수 있다. 천재는 이런 보편자의 테두리에서 악마적 안식을 찾든 종교적으로 귀의하든 할 수 밖에 없다. 파우스트는 회의자로 침묵은 그를 오만에 대한 회의로 몰고가며, 발설은 모든 사람을 혼란에 빠뜨린다. 절대적 관계 속의 단독자가 된다면 침묵의 이유를 소유할 수도 있다.
 
아브라함은 미학적 침묵의 범주가 아니다. 미학은 타인을 구할때 침묵을 허락한다. 아브라함의 침묵은 이삭을 죽이는 침묵이다. 윤리학은 우연적 단독성을 가진 그의 침묵을 정죄한다. 그는 비극적 영웅도 심미적 영웅도 아니다. 결국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확신하는 자는 신앙의 기사가 아니다. 그는 고난과 불안 속에 침묵하고 있다.이삭을 포기하는 무한한 체념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부조리한 결과를 믿었다.
 
단 한마디는 질문에 대한 응답이었다. [얘야 하나님께서 번제물을 친히 예비할 것이다] 그는 알지 못한다. 신앙의 부조리의 운동이 수행된다. 그는 이삭의 희생을 알았다. 그는 주저주저하며 수수께끼 같은 말을 한다.우리는 그를 역설을 이해한다는 뜻으로만 이해할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렀다. 그는 자기의 고뇌를 잊었다. 하나님은 기억하시고 헤아리신다. 개별자로서 단독자가 절대자와의 절대적 관계 가운데 선다는 역설이 있는 것이든지, 아니면 아브라함은 아무것도 아니든지. 이것이냐 저것이냐이다.
 
** 부활의 역설도 마찬가지로 보편성이 아닌 미학도 아닌 하나님의 사랑과 약속을 포함한다. 이것 역시 이것이냐 저것이냐이다.
 
V. 끝맺는 말
어느 세대나 정열은 새로이 시작하는 과제이다. 신앙은 인간에게 있어 최고의 정열이다. 누구도 이것을 뛰어넘어보지는 못한다. 신앙에 이른 사람은 거기에 빠져있다는 말을 싫어하며 더 앞으로 나아가 보려한다.
[사람은 두번 다시 같은 냇물을 건널 수 없다]고 말한 스승 헤라클레이토스에서 더 나아간 제자는 [사람은 한번도 동일한 냇물을 건널 수 없다]고 앞으로 나아갔다. 앞으로 나아가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제자가 되고자했던 그는 스승에게 돌아오지 못했다.
 
** 실존의 존재는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지 보편성 앞에 서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에게 유한성을 약속하시고 인간존재 자체의 부조리의 산실인 보편성은 지양된다.
아브라함은 단독자로서 보편성의 눈으로 보기에는 부조리에 불과한, 심미적 직접성으로 비치는 것을 절대적 의무로 받아들였다. 이것은 신앙의 비밀이다. 그는 할 말이 없다. 오직 눈물과 고통 모든걸 헤아리고 기억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안에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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