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의 불복종
헨리 데이빗 소로우 지음, 강승영 옮김 / 이레 / 1999년 8월
평점 :
절판


그의 글은 당시의 독일이나 영국의 사상적 전통이나 사고와 구별되는 19세기 미국정신이라는 것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첫째는 기독교적 세계관이다. 그 자신이 교회에 나가길 거부하긴 했지만 그의 뿌리에는 미국의 건국이념과 올바른 신정국가에 대한 기본이념이 깔려있다. 시민정부에 대한 관점에서 루소와의 차이점이라 할 수 있다. 루소는 로마에 미치지 못하는 프랑스의 엉뚱한 군주정치에 대안으로서 시민정부를 생각했다면, 소로우에게 시민정부의 잘못은 존엄한 피조물의 격에 어울리지 않는 정치의 허접함에 있었다.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지향하는 점에는 닮았으나, 로마적 모델이 아닌 성경적 모델에서 그 이상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것은 19세기 뉴잉글랜드의 숨쉬는 공기와 마찬가지였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둘째, 개인주의적 정치관이다. 집단은 오로지 개인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가치는 청교도 정치관의 전형이며 이후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초 미국적 침례교 전통의 핵심이기도 하다. 청교도에게 미국적 정치란 영국으로부터의 단절이며 또한 국가지배적 종교와 사회에 대한 반발이기도 했다. 개인의 존재는 오직 신 앞에만 의미가 있으며 국가,단체, 교회는 오직 이들의 모임체로만 존재할 뿐, 그들은 헤겔과 같은 살아있는 절대정신의 국가도, 지상의 유일한 그리스도의 대변자인 교권도 거부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뿌리에서 소로우의 정치관은 신적 기준으로 현실의 정부에 냉엄한 판단을 가한다. 개인에게 의미없는 정부란 없는 것과 같다.

세째, 그래서 이런 높은 기준은 근본주의적 미국 행동의 뿌리를 이룬다. 옳다면 소수라도 끝까지 저항할 것이며 분리 또한 두려워하지 않는다. 노예제도에 반대한다면 나라를 깨서라도 서로 결별하거나, 하나로 남으려면 결말은 전쟁이다. 남북전쟁... 끝은 결국 하나됨이다. 그들의 역사는 옳음이 정복한다는 믿음에 근거한다. 승리는 신적 명분을 보여줄 것이다.  그의 북부정신은 분명 전쟁을 불사했다. 그는 권력의 승리를 거두지 못해 존경받을 인물로 남았지만, 이런 정신이 권력의 승리를 거두었다면 혹 경멸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명분 없는 정부에 대한 불복종 운동과 명분을 갖는 전쟁에 주저하지 않음. 이 둘은 모두 미국정신의 양면이다.

네째, 삶의 실제적 강령으로서의 사변이다.  미국정신은 거대한 사고체계의 완성이 아닌 실제로 되느냐(Does it work?)의 입증에 있다. 소로우의 강점 또한 자신의 신념을 살아낸데 있다. 그는 말하지 않고 살아냈다. 그의 폐결핵 또한 걸어서 숲속을 헤매지 않았다면 걸리지 않았을 그의 삶살이의 결과임에 틀림없지만, 그에게 영향 받은 수많은 사람 또한 그의 이런 실제적 행동에 따른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그가 한 말은 [작은 듯 보여도 한번 행해진 옳은 일은 영원히 행해지기 때문이다.]는 힘이 있고 분명 살아있는 진실로 남아있다.

당시의 유럽국가의 분위기와 사뭇다른 이런 뉴잉글랜드적 사고는 19세기초 신생 주변국 미국의 상황에선 존경할만한 것임에 틀림없다. 간디와 함선생님의 감탄도 이런 [정신적 힘의 우월에 대한 명확함]에 기인한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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