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종교에 관한 대화 나남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232
데이비드 흄 지음, 이태하 옮김 / 나남출판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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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신에 대해 갖는 이해는 역사 이래 반복되고 유사하다. 신적 존재를 느껴 알므로 그것을 설명해 내려하고 그 설명의 틀 안에서 주어진 규칙, 도덕률, 계시를 인용하게 된다. 이 틀 안에서 이해된 신은 인간을 제한하고 규범을 소유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구별시킨다. 인간으로서의 특장점이 아닌 다른 차별점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성론적 신이해는 인간이 납득할 수 없는 어려움을 당하지 않는 한 깨어지지 않고 유지된다.

 

또 다른 선택은 인간의 이성의 관여를 전혀 허락치 않는 규칙, 도덕률, 계시 중심성이다. 기존의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포기하고 주어진 것에 부착하여 삶을 설명해 내려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다양한 삶의 경험과 의문들에 대해 침묵할 수 밖에 없으며 스스로도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갖지 못함에 불만스러워 한다. 계시를 중심 삼는다고는 하나 여전히 살아있는 존재가 아닌 주어진 내용에 집중하므로 현재 자신과 연관된 신과는 별 연관성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회의론은 그래서 이 모든 문제를 의심한다. 규정이 갖는 원래 의미, 전승의 타당성, 이성의 순수성, 논리의 궁극적 타당성의 의심 위에서 아무런 결정적 증거를 찾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흄의 입장이기도 한 회의론은 고통은 이유를 갖다 붙힐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인정하라고 한다. 하지만 이런 논리의 귀결은 자신을 잃어버리게 한다. 다른 생명체와 인간을 동물과 자신을 구별하지 못하는 상태에 들어간다. 우리가 데카르트에서 시작한 과학의 시대에 얻은 자연스런 귀결이기도 하다.

 

이 모든 것이 인간의 머리가 생각할 수 있는 범위이다. 우리라는 존재는 알을 깨뜨리지 않으면  우리의 이해의 범주 안에 머물게 된다. 그것이 유신론적 신이든 전승적 신이든 회의적 불가지론이든 우리가 스스로 자라 알이 깨어져 이런 이해를 넘어서지는 못하는 것 같다. 아예 우리는 알에서 나올 생명이 없는 무정란적 존재인지 모른다. 알은 외부로부터 생명을 부여받아야만 깨고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어느 틀로도 설명 되지 않는 신을 만날때. 그래서 흄의 필로는 고난 당하며 논리적으로 헤매이며 하나님을 찾던 욥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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