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주석
쟈끄 엘뢸 지음 / 한들출판사 / 2000년 1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나를 깊은 깨달음과 고민으로 몰아넣은 책이다. 잘 모르던 사람 얘기를 듣고 고민하진 않는다. 고민을 일으키는 것은  내가 좋아하던 사람의 [낯선 이야기]인 경우가 많다. 사람을 좋아하면 그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엘룰은 내가 좋아하는 인물이고, 엘룰은 바르트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이 책은 엘룰의 변증적 성서해석과 바르트의 객관적 화해론이 만나고 있다. 내 고민은 엘룰을 통해 만난 바르트와 물려있다.

우선 이 책이 준 독특하고 뛰어난 인사이트부터 살펴보면... 첫째 요한계시록의 구조에 대한 분석과 그 구조에서 그리스도 성육신의 중심성이다 (바르트적이지...). 중심인 8-14장을 전적으로 성육신 사건으로 해석해낸다. 그리고 그 연관구조로서 그 앞의 역사에 대한 그림과 그 뒷부분의 심판의 부분을 엮어내고 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5장에서 22장에 걸친 반복적 구조에서 벗어나 하나의 스토리를 보여준다.

둘째,  계시록의 심판을 십자가 사건과 연관시킨 부분이다. 중심부인 8-14장의 해석에서 하늘에서 내리는 심판은 온전히 그리스도위에 쏟아진다. 우리가 당할 심판을 그가 대신 하시는 [그리스도의 열정]의 고난이다.  그리스도위에 인간전체가 당할 고난이 쏟아진다.(그 채찍, 인간의 분노와 광기, 하나님의 유기, 십자가) 그리고 우리는 이 역사적 사건의 침묵자가 된다.

셋째 국가권력과 그 지배에 대한 이해이다. 수많은 알레고리적인 해석을 뛰어넘어, 국가(첫째 짐승)와 그 지배시스템(둘째 짐승)에 대한 이런 통찰은 사실 어느 누구의 책에서도 볼 수 없는 큰 전망(perspective)를 준다. 우리의 시대 역시 세계대전 시대 못지 않게, 국가 논리위에 휘둘리어 살고 있음을 피부로 느끼니까...미국은 또다시 팔루자를 폭격했다.

넷째 천년왕국에 있어 인간행위의 의미들에 대한 통찰이다. 그리스도이후에 사단의 매임과 다시 풀려남 사이의 기간을 교회시대로 본 것은 [무천년설]과 유사하다. 하지만 그는 이 시기를 [인간책임의 절대적 의미]의 기간으로 본다. 마치  에덴동산이 회복된 것과 같이 더이상 역사의 책임이 악한 권세에 있지 않다. 비록 그가 위협하긴 하지만... 인간은 이 시기에 자유롭게 하나님의 사랑을 선택할 수 있고, 또 그렇게 살 수 있다. 성육신으로 인해 인간의 책임이 회복된 것이다. 사단은 하늘에서 번갯불처럼 떨어졌고 다시 인간은 하나님 앞에 두번째 선택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삶에 의해 그 진실성이 검증될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론 내겐 이 책안에 비판적으로 고려해 보아야 할 주장들도 없지않았다. 첫째 엘룰은 십자가사건이 무효화시킨 심판이 인간 위에 임할리가 없다고 주장한다. 인류전체에 대한 대재앙이 주제인 계시록은 그래서, [선택의 문제]에 봉착케 한다.  엘룰은 심판의 대상이 되는 선택이 [권세와 타락의 결과]와 같은 영적인 것이라 해석한다. 물론 그랬으면 좋겠다. 그러나, 성경자체와의 충돌, 심지어 계시록 자체와의 충돌은 어찌할까. 정죄와 둘째사망은 결코 인간에게 임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그 구절들을 게속 읽어봐도, 다른 부분들과 비교해보아도 무리다. 심지어 이런 구절에 손대지 말라고까지 계시록은 경고한다.  

둘째, 십자가사건에 의한 은혜의 편만성을 주장하다보니, 인간책임의 무효화까지 가게 된다. 인간의 의는 쓸모없는 것이라는 논리의 확장이, 인간의 모든 책임도 무효하고 의미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믿음은 무엇인가?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으로 간 아브라함의 믿음도, 먹고 죽을 떡을 선지자에게 대접한 과부의 믿음도, 생활비 전체, 아니 목숨 전체를 던져넣은 가난한 과부의 믿음도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라는 면에서 의미가 없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예표로 세우신 것이외의 이 성경의 인물들은 아무런 다른 계시를 우리에게 전달하진 않는 것일까? 이 점에서 [오직 은혜로]와 더불어 [오직 믿음으로]를 같이 말한 종교개혁자들의 강조점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은혜의 자리에 믿음이 같이 있어야한다.

셋째, 이런 생각 발전의 배경에는 똘레랑스를 위한 [타종교와의 화해의 필요]가 깔려있다. 더 이상의 종교분쟁은 우리가 갖는 이성적 하나님 상(image)과 충돌한다는 것이다. 수많은 종교간 충돌의 기저엔 독선적 유일주의가 있으므로 그 뿌리를 교정하자는거다. 과연 그럴까? 성경이 말하는 바를 부분적으로 접고, 이성적으로 좋은 것(그것을 현재적 성령사역이라 부르던, 십자가 사건 이후의 인간이성의 해방이라 부르던)을 따른다면, 그런 진리가 우리를 이끌 자격이 있는 것인가? 상대적이고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진리라면 그리고 성경의 해석이라면, 우리 본성을 따라 필요에 따라 또 이리저리 왜곡되어져 가진 않을까?. 논리적 귀결이나 현실적 필요가 진리자체를 바꾸려해선 안된다. 화목하고 사랑하는 일에 대해 선한 의지를 갖는 것과 구원의 방향 자체를 돌리려는 것은 다른 문제인 것 같다.

생전에 바르트 자신은 왜 이 문제에 대한 답변을 미루었을까? 미루는 것도 답변이다. 우리가 대답할 문제인가 생각해 볼만하다. 칼 라너의 답변을 바르트가 몰라서 내뱉지 못한 건 아니리라... 바르트의 답변은 하나님을 우리가 만나 아는바로는, 너무 은혜롭고 자비하신 분이라는 사실이다. 어떻게 엄하고 잔인한 심판이 있을까? 그러나 여기까지다. 내 아버지의 나에 대한 사랑을 느껴 안다. 그리고, 나는 그분의 세상에 대한 판단을 배워 알 뿐이다. 우리 입맛에 안 맞아도 어쩔 수 없다.우리가 의논해서 결정하면 그렇게 되는건 신학이고, 신앙은 우리 결정권 밖 심지어 그리스도의 결정권 밖에 있었다. 그래서 아들이셨을까? 완성의 시간은 이곳에 사셨던 그리스도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다. 그분은 깨어있으라고, 성문밖에 내어쫓기는자들을 통해 우리 정신을 번쩍 들게 하실 뿐이다.

엘룰을 좋아하는 나로선 엘룰이 이런 한쪽의 이야기를 함으로써 변증법적 반대를 이루어 구원의 하나님은혜에 대한 더 감격스런 신앙고백이 있게 하려 한건 아닐지,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싶다. 분명 이런 예수님의 죄인사랑은, 우리맘 속에 있는 의인의식을 깨고, 믿음을 자기의로 삼는 교만을 무너뜨린다. 오직 그분을 구주로 고백하는자에게 구원이 있다는 것은 긍정적으로나(죄인이 구원받는다는) 부정적으로나(죄인이 구원 받지 못한다는),  여전히 이성으로 받이들이기 어려운 사실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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