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의 생애

  

니체는 자신이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어떤 것이 철학자의 삶의 신비를 구성하는 것인지를 이해했다. 그 철학자는 금욕주의적인 미덕 ― 겸손, 청빈, 정숙 ― 을 전유하고 이것들을 완전히 자기 자신만의 목적에, 사실은 전혀 금욕주의적이지 않은 비범한 목적에 귀속시킨다.(주1) 그는 이것들을 자신의 독특함의 표현으로 만든다. 이것들은 그의 경우에 있어서 도덕적 목적도, 또 다른 삶을 이루기 위한 종교적인 수단도 아니며 오히려 철학 자체의 '효과'이다. 이 철학자에게는 절대적으로 다른 삶이란 없기 때문이다. 겸손, 청빈, 정숙은 특히나 부유하고 매우 윤택한 삶의 효과가 되며, 사유를 정복할 정도로 충분히 강력한 삶의 효과, 그리고 모든 다른 본능을 스스로에 종속시킬 만큼 충분히 강력한 삶의 효과가 된다. 스피노자가 자연이라고 불렀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삶은 더 이상 수단과 목적을 통해 필요에 기초하여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원인과 결과에 의해 생산, 생산성, 역량(potency)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겸손, 청빈, 정숙은 그의 위대한 삶의 방식이며, 그 자신의 신체의 사원(寺院)을 만든다. 왜냐하면 원인은 너무도 자랑스럽고, 너무 부유하며, 너무 감각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 철학자에 주목함으로써 겸허하고 가난하며, 자애로운 외양을 공격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 이 외양은 사람들의 무능력의 범위를 증가시킨다. 그리고 이 철학자는 어떤 빌미도 주지 않지만 온갖 공격을 받는다.


여기에서 이 철학자의 고독의 충분한 의미가 분명해진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어떤 환경에 처해 있는가를 결코 따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이 환경들 중의 그 어떤 것에도 적합하지 않다. 의심의 여지없이 그가 가장 나은 생활조건, 혹은 생존 조건을 발견하는 곳은 바로 민주적이고 자유주의적 환경 속에서이다. 그러나 그에게 이러한 환경들은 사악한 의지가 삶에 독을 풀어놓거나 황폐화시킬 수 없게 하는 유일한 보증인이자, 또 이 환경들은 국가의 목적, 사회의 목적을, 환경일반을 약간이라도 넘어서게 하는 사유의 역량으로부터 삶을 분리시킬 수 없게 하는 유일한 보증인이다. 스피노자는 모든 사회에서 그것은 복종의 문제이며, 그 밖의 어떤 것도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바로 이 때문에 과오, 장단점, 선악이라는 통념은 복종 및 불복종과 관련을 맺고 있는 매우 사회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나은 사회는 사유의 역량을 예속의 책무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사회이며, 그 자신의 이해관계에 있어서, 사유를 국가의 규칙에 종속시키지 않게 돌보는 사회이며, 이는 행동에만 적용된다. 사유가 자유롭고 따라서 생동적인 것인 한, 어떤 것도 타협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기를 멈출 때, 모든 다른 억압 또한 가능해지고 이미 현실화되었기에 모든 행동은 비난받게 되며, 모든 삶은 위협에 처하게 된다. 확실히 그 철학자는 가장 좋아할 만한 조건을 바로 민주적 국가와 자유주의적 서클에서 찾는다. 그러나 그는 결단코 자기의 목적을 국가의 목적이나 환경의 목표와 혼동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복종은 물론 비난도 피해 나가는 사유 속의 힘들을 애타게 간청하며, 선악을 넘어선 삶, 장점이나 책잡힐 것이 없는 엄격한 순진무구함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이 철학자는 다양한 국가에서 거주할 수 있으며, 자주 다양한 환경 속에서 거주할 수 있으되 그러나 그는 은둔자, 그림자, 여행자 혹은 떠돌이 하숙생의 태도로 그렇게 한다. 이 때문에 우리는 스피노자가 보다 개방적일 것이라고 추정되는 환경에 들어가기 위해 보다 폐쇄적일 것이라고 추정되는 유태인 환경과 단절했다고 상상해서는 안된다. 자유기독교, 데카르트주의, 데 비트(de Witt) 일파들에 찬성한 부르주아지 등등... 왜냐하면 그는 어디로 가든지 간에 성공의 기회가 많든 적든 간에, 그 자신과 그의 보기 드문 목표가 관용될 수 있는지를 묻고 요구하며, 이 관용으로부터 그는 한 사회가 가질 수 있는 민주주의의 수위, 진리의 수위를 판단하거나 혹은 이와 정반대로 모든 인간들을 위협하는 위험과 관련되는 것을 판단한다.


바루흐 스피노자(*역주1)는 1692년,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에서 추방당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암스테르담의 유태인 지구에 있는 부유한 상인가정에서 태어났다. 유태인 학교에서 그는 신학과 상업을 공부한다, 13세부터 그는 아버지의 회사에서 일하지만 여전히 공부를 좋아했다(1654년에 아버지가 죽고 나서 1656년까지 그는 형과 함께 회사를 경영한다). 그를 유태인 공동체 및 사업과 단절하게 만들고 1656년의 파문으로 이끌었던 철학적 개종은 얼마나 느리게 일어났던가? 우리는 이 시기 동안 암스테르담 공동체가 동질적이었다고 상상해서는 안된다. 이 공동체는 매우 다질적이었으며, 기독교 환경처럼 이해관계와 이데올로기들도 매우 다양했다. 대부분 그것은 이전의 '마라노'들로, 즉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는 외향적으로는 카톨릭주의를 실천했으며 16세기 말에 이주당해야만 했던 유태인들로 구성되었다. 심지어 성실하게 유태인 신앙을 고수한 사람들도 전통적인 랍비적 유대교와 결코 화해할 수 없었던 철학적, 과학적, 의학적 문화에 깊이 물들어 있었다. 스피노자의 아버지는 분명히 회의주의자였으나 그럼에도 시냐고그(*역주2)와 유태인 공동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암스테르담에서는 랍비와 전통의 역할은 물론이고 성서 자체의 의미를 문제삼는 것에까지 이르게 된다. 우리엘 다 코스타(Uriel da Costa)는 1647년에 영혼과 계율의 불멸성을 부인하고 자연법을 인정했다는 이유로 비난받는다.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후안 데 프라도(Juan de Prado)는 영혼은 신체와 더불어 사멸하며 신만이 철학적 말씀으로 존재하며 신앙은 헛된 것이라고 주장했다는 이유로 1656년에 회개해야 했으며, 이후 파문당하고 비난받게 된다.(주2) 최근 간행된 문서들을 스피노자가 프라도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는 것을 입증한다. 우리는 위의 두 경우가 함께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스피노자가 보다 냉엄하게 심판을 받고 1656년보다 더 일찍 파문을 당했다면 이것은 그가 회개를 거부하고 스스로 단절을 추구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많은 경우에서처럼 랍비는 순응을 바랬을 것이다. 그러나 회개하는 대신에 그는 "시냐고그를 떠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변명"를 쓰거나 미래의 ≪신학정치학논고≫의 초고를 썼다. 틀림없이 스피노자가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났다는 사실, 공동체의 아이였다는 사실은 그의 사례를 더욱 나쁘게 만들었다.


암스테르담에서는 더 이상 살 수가 없었다. 광신자에 의한 암살 기도가 뒤따랐기에 그는 철학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서 레이든으로 갔고 린스뷔르흐의 교외에 정착했다. 흔히 스피노자는 사유가 항상 인간들의 사랑을 받는 것은 아님을 보여주는 징표로 칼로 찢겨져 구멍이 뚫린 코트를 착용했었다고 말해지곤 한다. 때로 철학자가 소송을 끝내는 경우도 있었으나 파문과 더불어서 그의 삶을 새롭게 하고자 하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유주의적 기독교의 영향력이 스피노자의 단절을 설명하는데 요청되어야 한다고 믿을 때, 또 마치 이 단절이 외적인 원인에 기인하는 것인 양 믿을 때 이것은 유태인 공동체의 다질성과 철학자의 운명을 고려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미 암스테르담에서 확실히, 그의 아버지가 생존해 있었을 때에도 그는 판 덴 엔데(Van den Ende)의 학교에서 교육과정을 이수했는데, 이곳에서는 라틴어와 더불어 데카르트 철학, 수학, 물리학의 기초를 배웠던 수많은 청년 유태인들이 참석했었다. 이전에는 제수이스트였던 프란시스 판 덴 엔데는 데카르트주의자라는 평판을 일찍이 얻었으며 또한 자유사상가이자 무신론자이며 심지어 정치 선동가라는 평판도 얻었다(그는 1674년에 프랑스에서 하층귀족인 드 로앙의 반역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추방당했다.)(주3) 분명히 스피노자는 또한 자유주의적이고 반-성직자적인 기독교도들, 어떤 범신론과 평화적 코뮤니즘(pacifist communism)에 고무된 콜레지안트파(Collegiants)(*역주3)와 메노니파(Mennonites)(*역주4)와도 교제했다. 그는 이들의 주요 거점 중의 하나인 린스부르그에서 이들을 다시 만났다 : 그는 야리크 엘레스(Jarig Jelles), 피에터 발링(Pieter Balling), 시몬 데 브리스(Simon de Vries), '진보적' 서적 판매상이자 출판가인 얀 리에우베르트(Jan Rieuwerts)와 친구가 되었다. (1655년에 스피노자가 올덴버그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평온주의pacifism를 주창하며, 1671년에 엘레스(Jelles)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공동체주의적 테마가 나타난다). 어쨌든 판 덴 엔데는 카톨릭주의의 한 형태를 여전히 고수했던 것 같다. 네덜란드에서 이 종교의 난점들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콜레지안트파와 메노니파의 철학에 관해서 볼 때, 이것은 종교 비판을 물론이고 윤리적 개념과 정치적 관심에 있어서 스피노자의 철학을 완전히 압도한다. 메노니파나 심지어 데카르트주의에 의한 영향을 생각하는 대신에 우리는 스피노자가 가장 관용적인 서클에, 그가 태어났고 혼자서 그 단절을 책임져야만 했고 유대교만큼이나 기독교 또한 거부했던 파문당한 유태인을 환영하기에 가장 적합한 서클에 자연스레 가담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유태인 파문이 의미하는 것 중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의미를 갖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오히려 빈번히 적용되었고 종종 돌이킬 수 없는 수단이었다. 국가권력을 갖지 못한 공동체의 수장들은 재정적 기여나 심지어 정치적 정통성을 거부한 사람들을 처벌한 어떤 제재 수단도 갖고 있지 못했다. 칼뱅주의 당파의 저명인사들처럼,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엄청날 정도로 증오하고 있던 유태인 수장들은 정치적으로는 오렌지 왕가와 결탁했으며 인도 회사들에 대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었다. (스피노자의 스승 중 하나인 랍비 메나사헤 반 이스라엘(Menasseh ben Israel)은 동인도 회사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1640년에 파문당했다. 그리고 스피노자를 심판한 평의회 의원들은 왕당파, 친-칼뱅주의자이자 반-스페인적이었고 대부분이 동인도 회사의 주주들이었다.) 스피노자의 자유주의자와의 결탁, 거대 독점체들의 와해를 요구한 요한 데 비트의 공화당에 대한 동조 ― 이 모든 것이 스피노자를 반역자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어찌되었든, 스피노자는 종교적 환경은 물론이고 동시에 경제적 환경과도 단절한다. 가족의 사업을 포기하면서 그는 렌즈를 가는 일을 배웠으며 수공 소매업을 구비하고 광학법칙을 파악해 작업할 수도 있는 장인, 즉 철학자 장인이 되었다. 그는 또한 다음의 것을 이끌어내기 시작했다; 그에 대한 초창기 전기작가 코렐루스(Colerus)는 마사니에로(Masaniello)의 나폴리 혁명가의 태도와 의복을 하고 있었다는 것에서 그가 끌어낸 것과 연결시킨다.(주4)


린스부르그에서 스피노자는 그의 친구들에게 후일 ≪소론≫라 불리우게 되는 라틴어로 된 글을 설명한다. 그들은 각주를 달았고, 옐레스는 독일어로 이를 번역했으며, 아마 스피노자는 그가 이전에 썼던 어떤 텍스트를 구술했을 것이다. 1661년 경에 그는 일종의 정신적 여정에 따라서 넓어져간 ≪지성개선론≫을 구상했는데, 이것은 메노니파적인 태도로 부를 비난하는데 집중했다. 이 논고, 즉 스피노자의 방법에 관한 장엄한 설명은 미완성된 채로 남겨지게 된다. 1663년 경, 그와 함께 살았고 그에게 많은 희망을 주면서도 동시에 그를 괴롭혔던 청년에게 스피노자는 ≪데카르트 철학의 윤리적 원리≫를 선물했다. 이 책은 스콜라적 통념들(형이상학적 사유들)의 비판적 검토로 보충된다. 리에우베르츠(Rieuwertz)가 이 책을 출판했고 엘레스(Jelles)는 출판을 위한 재정을 감당했으며, 발링(Balling)은 이를 독일어로 번역했다. 물리학자이자 시인이면서 암스테르담의 새 극장의 조직자인 레비스 마이어(Lewis Meyer)가 서문을 썼다. ≪원리들≫과 더불어 스피노자의 '교수적(professorial)' 저작은 끝나게 된다. 매우 극소수의 사상가들만이 자기의 발견물의 교수가 되려는 강력한 열정을 피할 수 있으며, 사적인 정신 교육의 세미나 열정을 피할 수 있다. 그러나 1661년 초에 스피노자가 세운 계획과 집필 시작은 그를 또 다른 차원으로, 상이한 요소로 나아가게 했는데, 우리가 앞으로 보게되듯이 이것은 더 이상 '설명'의 요소도 방법론적인 차원도 아니게 된다. 아마도 이런 연유 때문에 스피노자는 ≪지성개선론≫을 미완성된 채로 남겨두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후기 의도는 그것을 기꺼이 다시 쓰려고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주5) 우리는 준-교수적 시기 동안에 스피노자가 데카르트주의자였다고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소론≫은 모든 스콜라주의, 유태인 사상, 르네상스 철학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들로부터 단지 스피노자에게만 귀속되는 심오하게 새로운 어떤 것을 추출해 내기 위하여 정화를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서 데카르트주의를 사용하고 있는 사유의 방식을 이미 보여준다. ≪원리들≫의 설명과 ≪형이상학적 사유≫의 설명 간의 복합한 관계는 이중 게임의 증거를 제시하는데, 이 게임에서 데카르트주의는 마치 하나의 여과기처럼 다루어지지만, 바로 이러한 방식에서 더 이상 낡은 철학과도, 또 데카르트주의와도 관계를 맺지 않는 새롭고 심오한 스콜라주의가 출현한다. 데카르트주의는 결코 스피노자의 사유가 아니다. 이것은 그의 수사학이나 진배 없다. 그는 데카르트주의를 그가 필요로 했던 수사학처럼 사용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단지 ≪에티카≫에서만 그 명확한 형태가 부여된다.


1663년에 스피노자는 헤이그의 교외인 포르뷔르그(Vorrsburg)로 이주한다. 그는 나중에 헤이그에 정착한다. 스피노자를 여행가로 정의하는 것은 그가 걸어간 거리가 아니라 하숙집에 머무르려고 하는 경향, 부계 상속에 대한 비난 이후의 그의 집착, 소유, 부의 결여이다. 그는 ≪에티카≫에 대한 작업을 계속한다. 1661년 초에 스피노자와 그의 친구들 사이의 편지는 그의 친구들이 스피노자 책의 테마를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며, 1663년에 시몬 데 브리에스(Simon de Vries)는 스피노자가 보낸 텍스트를 읽고 토론한 연구 그룹에 대해서 언급하기도 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일군의 친구들에게 1675년에 라이프니쯔와 관련해서도 그 자신이 그렇게 할 것이듯이 낯선 사람을 경계하라고 털어놓으며 그의 관념을 비밀에 부쳐줄 것을 요구한다. 그가 헤이그 근방에 살았던 이유는 아마도 정치적인 이유 때문일 것이다. 수도 가까이에 사는 것은 행동적인 자유상사가적(libertins)(*역주5) 서클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콜레지안트파 그룹의 정치적 무관심으로부터 벗어나는데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두 주요 정당인 칼뱅주의 당과 공화당의 상황은 다음과 같다. 전자는 독립을 위한 투쟁이라는 주제, 전쟁의 정치학, 오렌지 왕가의 야심, 중앙집중적 국가 형성에 여전히 헌신적이었다. 후자는 평화의 정치학, 지방분권적 조직화, 자유경제의 발전에 헌신적이었다. 군주제의 열정적이고 호전적인 행위에 대해 요한 데 비트는 자연적이고 기하학적인 방법에 의해 인도되는 공화국의 합리적 행위를 대립시켰다. 이제 다음의 것은 신비가 된다. 사람들은 칼뱅주의와 오렌지 왕가에, 불관용과 전쟁도발행위에 여전히 신뢰를 보내고 있었다. 1653년 이래로 데 비트는 네덜란드의 총리였다. 그러나 여전히 공화국은 선호에 의해서라기보다는 놀랍고도 우연적으로 왕이 없는 공화국으로 남아 있었으며, 이것은 인민들에게는 불충분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스피노자가 혁명의 해로움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혁명이 크롬웰 혁명이 고무한 실망에 의거해서, 혹은 오렌지 왕가의 가능한 쿠데타에 의해 야기된 불안들에 의거해서 생각되었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이 시기 동안 '혁명적' 이데올로기는 신학은 물론이고 칼뱅주의 정당에도 스며들었고, 종종 반동의 정치학에 봉사했다.


그러므로 1665년에 스피노자가 ≪에티카≫ 작업을 일시적으로 중단하고 ≪신학정치학논고≫를 쓰기 시작했다는 것은 놀랄만한 것이 아니며, 이것은 다음의 질문과도 연결된다. 왜 인민들은 그렇게도 비합리적인 것일까? 왜 그들은 그들 자신의 노예화(enslavement)를 자랑스러워할까? 왜 그들은 그들의 속박이 마치 그들의 자유라도 되는 양 속박을 '위해서' 싸우는 것일까? 어째서 자유를 획득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유를 간직(유지)하는 것이 그렇게도 어려운 것일까? 왜 사랑과 기쁨을 요청하는 종교는 전쟁, 불관용, 증오, 적의, 양심의 가책을 자극하는 것일까? 1670년에 ≪신학정치학논고≫는 익명으로 가공의 독일 출판사에서 출간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저자는 곧 밝혀진다. 그렇게도 많은 면박, 저주, 모욕, 중상모략을 일으킬 책은 아마도 극히 드물 것이다. 유태인, 카톨릭인, 칼뱅주의자, 루터파 ― 데카르트주의자를 포함한 모든 우익적 사고를 한 서클들 ― 는 서로 경쟁적으로 그를 비난할 정도였다. 이후 '스피노자주의'와 '스피노자주의자'라는 단어는 모욕이자 위협이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모진 의심을 받았던 스피노자의 비평가들도 심지어 매우 비난받았다. 의심할 여지 없이 이들 비평가들 중에는 몇몇 매료된 자유주의자와 데카르트주의자도 있었다. 그럼에도 이들은 이 공격에 가담함으로써 그들의 정통성을 증명했다. 폭탄같은 책은 항상 폭탄적인 비난을 받는다.(주6) 우리는 ≪논고≫에서 탈 신비화의 급진적 모험으로서의, 혹은 '효과'의 과학으로서의 철학의 기능을 발견하지 않고서는 이 책을 읽을 수 없다. 최근의 주석가들은 ≪논고≫의 진정한 독창성은 그것이 종교를 효과로서 여기고 있다는 점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인과적 의미에서는 물론이고 광학적 의미에서도 필연적인 합리적 원인이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듯이 생산과정을 이 원인과 연결시킴으로써 추구될 수 있는 생산과정의 효과가 있다(예를 들어, 이 방식으로 자연적 법칙은 강력한 상상력을 가졌으나 약한 지성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필연적으로 '기호'로 지각된다). 심지어 종교를 다룰 때에도 스피노자는 생산된 효과와 그 생산의 법칙을 드러내는 유리들을 반짝반짝하게 닦는다.


공화당과의 유대, 그리고 아마도 데 비트의 보호가 스피노자를 더욱 특정한 종류의 근심으로부터 구출했다(1669년 초에 스피노자적 가르침 때문에 비난받은 철학 사전의 저자인 Koerbagh가 체포되어 감옥에서 사망했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그의 삶이 곤란에 처해졌던 교외를 떠나야만 했고, 헤이그에 거주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것은 침묵을 대가로 했다. 네덜란드에서 전쟁이 벌어졌다. 데 비트 일파들이 1672년에 암살당하고 왕당파가 권력에 복귀하자 이제 더 이상 스피노자가 ≪에티카≫를 출간한 것은 문제시되지 않았다. 1675년에 암스테르담에서의 간단한 노력은 그로 하여금 그 관념을 포기할 수 없도록 확신을 주었다. "어떤 신학자들은 왕과 행정장관들 앞에서 나를 불평할 근거를 찾는다. 게다가 나를 좋아하는 어리석은 데카르트주의자들은 도처에서 나의 의견과 글을 남용함으로써 비난을 제거하려고 노력한다. 그들은 여전히 이런 과정을 추구한다."(주7) 스피노자에게는 그 나라를 떠나는데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더욱 더 혼자였으며 병이 들었다. 그가 평화롭게 살 수 있었던 유일한 환경도 그의 기대를 져버렸다. 그러나 그는 ≪에티카≫를 알고자 하는 계화된 사람들의 방문은 받아들였다. 비록 이것이 이후의 그 비판가들과의 동조를 의미하거나 심지어 그에게 요청된 방문이 부인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지만(1676년의 라이프니쯔의 경우). 팔라틴(Palatine) 선거의 당선자가 1673년에 그에게 제공한 하이델베르크의 철학 교수직도 그를 유혹하지 못했다. 스피노자는 가치들을 전복하고 망치로 때리듯이 철학을 구성한 '사적 사상가(private thinkers)'의 계열에 속한다. 그는 '공식 교수'의 일원이 아니다(라이프니츠의 격찬하는 말에 따르면, 이들 공식 교수들은 기성의 감성, 도덕성의 질서, 폴리스를 결코 어지럽히지 않는다). "공공[영역]에서 가르치는 것은 결코 소망이 아니기 때문에, 저는 이렇게 훌륭한 기회를 받아들이도록 제 자신을 꼬드길 수 없습니다. 비록 제가 그것에 대해 오랫동안 심사숙고하긴 했지만."(주8) 스피노자의 사유는 이제 가장 최근의 문제를 제기한다. 상업적 귀족제를 위한 기회는 무엇인가? 왜 자유주의적 공화국이 설립되었던가? 대중(multitude)을 노예들의 무리 대신에 자유로운 인간의 집단성으로 바꾸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이러한 모든 질문들이 미완성된 채 남겨진 ≪정치학논고≫의, 상징적으로 볼때 민주주의에 관한 장의 초반부에서 멈추어버린 ≪정치학논고≫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1677년 2월에 스피노자는 아마도 폐병으로 사망했으며, 이 때에 수고를 가지고 있던 친구 마이어(Meyer)가 배석했다. 그 해 말에 ≪사후 저작≫이 익명의 기증자의 희생을 치루면서 출판되었다.


병으로 서서히 침식당한, 이렇게 검소하고 청빈한 삶, 이렇게 가늘고 연약한 신체,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의, 이러한 갈색의 타원형의 얼굴 ― 우리는 어떻게 삶 그 자체로 가득찬, 삶과 동일한 역능을 가진 인상을 설명할 수 있을까? 살고 사유하는 전체적인 방식에서 스피노자는 사람들이 외관상 만족하는 것과는 대립된 입장에 서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삶의 이미지를 투사한다. 사람들은 외관상 만족하기에 삶을 증오하고 부끄러워한다. 인간성은 죽음의 숭배를 복수화하며 전제자와 노예, 성직자, 판사, 군인의 단결을 야기하며 항상 바쁘게도 삶을 그 근거로 달려가게 하고 삶을 진동시키고 분노로 혹은 단계적으로 삶을 죽이고 법률, 특성들, 임무들, 제국들로 삶을 압도하거나 삶을 질식시키는 자기파괴에 복종한다. 이것은 스피노자가 세계에 내렸던 진단, 즉 우주와 인류의 파괴이다. 전기작가 코렐루스는 스피노자가 거미 싸움을 좋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몇마리의 거미들을 지켜 보았고, 그들끼리 싸우게 만들거나 혹은 몇 마리의 파리를 거미집에 던져 넣었으며 그 싸움을 매우 즐겁게 지켜보았으며 때로는 너털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주9) 동물들은 적어도 우리에게 죽음이 가진 환원불가능할 정도의 외재적 성격을 가르쳐준다. 동물들은 각기 죽음을 필연적으로 초래하지만 그들은 내부로부터 죽음을 실행하지는 못한다: 자연적 실존들의 질서에 있어서 불가피한 나쁜 조우자. 그러나 동물들은 아직 내재적 죽음을, 전제자-노예의 보편적 사드마조히즘을 발명하지 못했다. 헤겔이 스피노자는 부정적인 것과 그 역량을 무시했다고 비난하는 바로 그 지점에 스피노자의 영광과 순수함이, 스피노자의 발견물이 놓여 있다. 부정적인 것에 의해 소비되는 세계에서 스피노자는 죽음에 도전할 수 있는 삶을, 삶의 역량을, 인간의 살인 욕동들(appetites)을, 선과 악의 규칙들(rules)을, 정당한 것과 부당한 것의 규칙들을 충분히 신뢰했다: 부정적인 것의 모든 환상(phantoms)을 폐기하는 삶을 충분히 신뢰하기. 파문, 전쟁, 전제, 반동, 마치 그것이 자신들의 자유라도 되는 양 자신들의 노예화를 위해 싸우는 인간들 ― 이것이 스피노자가 살았던 세계를 형성한다. 드 비트 일파들은 그에게 모범적인 사례이다. 궁극적 야만(Ultimi barbarorum). 그가 보기에 굴욕적이고 파탄적인 삶의 모든 방식, 부정적인 것의 모든 형태들은 두 가지 원천을 갖는다. 원한과 나쁜 양심, 증오와 죄에 대해서 하나는 외부를 향하고 다른 하나는 내부를 향한다. "인류의 두 가지 최대의 적들(archenemies), 즉 증오와 연민."(주10) 그는 이러한 원천들이 인간의 의식과 연결된 것이라고 거듭 비난하며, 새로운 의식, 새로운 견해, 삶을 위한 새로운 욕동이 있기 전까지는 결코 소진될 수 없다고 비난한다. 스피노자는 그가 영원하다는 것을 느끼며 경험한다.


스피노자의 사유에서 삶은 관념의 문제도 이론의 문제도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방식이자 모든 속성들에 있어서 하나의 동일하고 영원한 양태이다. 그리고 기하학적 방법은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 ≪에티카≫에서 이 방법은 스피노자가 현자라고 불렀던 것과 대립된다. 그리고 현자는 인간의 무역능성(powerlessness), 근심에서 즐거움을 취하는 모든 것이며, 중상모략(accusation), 악의(malice), 헐뜯기, 비천한 해석을 먹고 자라는 모든 것이자, 인간의 영혼을 파탄시키는 모든 것이다(전제자는 파탄난 영혼들을 필요로 한다. 마치 파탄난 영혼들이 전제자를 필요로 하듯이). 기하학적 방법은 더 이상 지적인 설명의 방법이 아니다. 기하학적 방법은 더 이상 교훈적인 표현 수단이 아니며 오히려 발명(invention)의 방법이다. 그것은 생동적이고 광학적인 교정(rectification) 방법이 된다. 인간이 다소 일그러져 있다면 이러한 긴장 효과는 인간을 보다 기하학적인 그 원인들과 연결시킴으로써 교정될 것이다. 이러한 광학적 기하학이 ≪에티카≫ 전체를 관통한다. 사람들은 ≪에티카≫가 사유를 통해서 읽힐 수 있는 것인지, 역능을 통해서 읽힐 수 있는지를 묻는다(예를 들어, 속성들은 역능들인가 개념들인가?). 현실적으로 거기에는 단지 하나의 용어만이, 즉 삶(Life)만이 존재하는데, 이것은 사유를 에워싸지만 그러나 역으로 이 용어는 단지 사유에 의해서만 에워싸여진다. 삶은 사유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며 오로지 그 사상가만이 죄와 증오로부터 자유로운 잠재적(potent) 삶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단지 삶만이 그 사상가를 설명한다. 기하학적 방법, 렌즈를 가는 직업, 그리고 스피노자의 삶, 이것들은 전체를 구성하는 것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스피노자는 살아있는 선구자 중 한 명이기 때문이다. 그가 증명들은 "정신의 눈"(주11)이라고 말할 때 바로 이 점을 표현한 것이다. 그는 세 번째의 눈에 대해서 언급하는데, 이 눈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허위적 외양들, 정념들, 죽음들을 넘어서 삶을 바라볼 수 있게 한다. 덕 ― 겸손, 청빈, 정숙, 검약(frugality) ― 은 더 이상 삶을 변전시키는 덕으로서가 아니라 그것을 관통하고 그것과 하나가 되는 역능으로서 이러한 종류의 비젼에 요구된다. 스피노자는 희망이나 심지어 용기를 믿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즐거움과 비젼을 믿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그를 살도록 내버려 두었다고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살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는 단지 고무하고 깨우고 드러내기를 원했을 뿐이다. 세 번째의 눈으로 기능하고 있는 증명의 목적은 명령하거나 심지어 확신시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렇게 고무된 자유로운 견해를 위해서 안경 알을 만들거나 렌즈를 가는 것이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제게 그것은 예술가들, 과학자들, 철학자들이 렌즈를 갈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은 결코 일어날 수 없는 무언가를 위한 거대한 준비입니다. 어느날 렌즈는 완벽해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는 또한 명확하게, 비틀거리고 놀랍고 아름다운 세계가 있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Henry Mil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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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Nietzsche, ≪도덕의 계보학(On the Geneology of Morals)≫, Ⅲ.

* Baruch는 히브리어로 이를 라틴어로 표현하면 베네딕트(Benedict)라는 말이 되는데, 히브리어에서 이 말은 '축복받은'이란 뜻이다.

* 유대인들의 종교적 집회나 교회당.

I. S. R vah, Spinoza et Juan de Prado, Mouton, 1959.

Eug ne Sue의 소설, ≪로트레아몽(Lautr amont)≫에서 Van de Ende는 민주주의적 공모가로서 활동한 사람으로 묘사된다.

* 평등주의적이고 평화주의적인 원시기독교로의 복귀를 실천하고자 하는 파.

* 16세기에 창시된 기독교 신교의 한 파

암스테르담 레이크 박물관의 판화실에 소장되어 있는 판화는 이 초상화의 복제품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 논고를 포기한 가장 정확한 이유는 ≪에티카≫에서 나타난 '공통 통념'이론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이 이론은 ≪논고≫의 주장들을 작동하지 않도록 하거나 불충분한 것으로 만들었다. (5장을 참조).

* 성서적 신과 철학적 신의 모순을 강조하는 자연신교적 이신론자들을 지칭.

Feuerbach의 ≪기독교의 본질(L'Essence du christianisme)≫에 실린 J. -P. Osier의 서문, "Ou Spinoza ou Feuerbach", Maspero, Paris를 참조하라.

올덴버그에게 보내는 편지 68.

Fabritius에게 보내는 편지 48 . 가르침에 관한 스피노자적 개념화에 대해서는 ≪정치학논고≫, 8장, 49 참조. "허가를 요청한 모든 사람이 공개적으로 그것도 자신의 비용과 책임하에 가르칠 수 있도록 허용된다면 ..."

이 일화는 진짜(authentic)처럼 보이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많은 스피노자적인 울림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거미 싸움, 혹은 거미-파리의 싸움은 몇가지 이유로 스피노자를 매혹시켰을 것이다. 1. 필연적인 죽음의 외재성의 관점에서, 2. 자연에서의 관계들의 합성의 관점에서(어떻게 거미집이 그 자체로 파리에게는 특이한 관계를 전유하는 세계와의 거미의 관계를 표현하는가), 3. 완전함의 상대성이라는 관점에서(인간의 불완전함을, 예를 들어 전쟁을 표식하는 하나의 상태가 만일 곤충의 본질과 같은 상이한 본질과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면, 이 상태는 어떻게 그 반대로 완전함을 시험할 수 있는가: 블리옌베르크에게 보내는 편지 19를 참조).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이후의 장에서 다시 부딪치게 될 것이다.

≪짧은 논고≫, 첫 번째 대화록.

≪신학정치학논고≫, 13장; ≪에티카≫, Ⅴ, 23,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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