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모든 것이 똑같다

아침이었다. 하지만 이것 역시 게라심이 물러가고 하인 표도르가 들어와서 촛불을 끄고 커튼을 걷으면서 방 안을 치우기 시작했으므로 그저 아침이 됐다는 것을 짐작할 따름이다. 아침이든 저녁이든 혹은 금요일이든 일요일이든 모두가 변함없이 마찬가지일 뿐이었다.

 

'한시도 멈추지 않고 나를 괴롭히는 견딜 수 없는 고통, 절망적으로 끊임없이 멀어지면서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생명에 대한 의식, 그리고 끈덕지게 엄습해 오는 저 가증스러운 죽음 그것만이 유일한 현실이다. 그리고 항상 변함없는 그 허위도 마찬가지다.... 도대체 날짜가 바뀌고 시간이 변화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차를 드릴까요?"

 

'이 놈은 매일 아침 제 주인이 차를 마신다는 습관이 있다는 것 외엔 아무 생각도 없어...'

 

"그만둬."

 

"긴 의자로 바꿔드릴까요?"

 

'방을 치워야 하는데, 내가 가로 걸리는 모양이군. 이들에게 나는 곧 불결이며 무질서일 따름이지.'

 

"아니, 내버려 둬."

 

그래도 하인은 곁에서 뭔가 부스럭거리고 하고 있다. 이반 일리이치가 팔을 벌리자 하인은 공손히 다가온다.

 

"어떻게 해 드릴까요?"

 

"시계."

 

하인은 옆에 있는 시계를 집어 든다.

 

"여덟 시 반이군. 저쪽 방에선 아직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나?"

 

"네, 아직 주무시는데요. 도련님은 학교에 가셨구요... 마님께선 나리가 부르시거든 깨워달라고 그러셨어요. 가서 일어나시라고 할까요?"

 

"그만 둬라."

 

'차라도 마셔볼까...' 그는 생각한다.

 

"그래, 차를 좀 가져와라."

 

하인은 문으로 걸어간다. 그러나 이반 일리이치는 갑자기 혼자 남는 것이 두려워진다.

 

"표도르, 거기 약부터 좀 집어 주렴."

 

'글쎄, 어쩌면 운이 좋아 약이 효력이 있을지도 모른다... 약 효험이 나지 말란 법은 없지 않은가.'

 

그는 숟가락으로 약을 마신다. '이까짓 게 들을 리 없지, 순 엉터리인 걸.' 그는 입에 익숙한, 들척지근한 그 맛을 느끼자 절망적으로 이렇게 단정한다. '그런데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 이 고통, 이건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 제발 일 분 간만이라도 이 고통이 멎어 줬으면...'

 

그는 끙끙 앓기 시작한다. 하인이 다시 들어온다.

 

"나가 봐. 가서 차를 가지고 오렴."

 

하인이 물러가자 이반 일리이치는 또다시 앓는 소리를 냈다. 고통도 심했으나, 그보다도 그는 외롭고 쓸쓸했다.

 

'모든 것이 언제나 그렇다. 언제까지나 변함이 없는 낮과 밤들. 제발 빨리 지나가 버렸으면... 그러면 그 다음엔 무엇이 오나? 죽음, 암흑, 정말 끔찍하다... 그 무엇이 오더라도 죽음보다는 낫지!'

 

하인이 쟁반에 차를 받쳐 들고 들어오자 그는 오래도록 멍하게 하인을 쳐다보았다. 마치 그가 누구이며 무엇 때문에 여기 들어왔는지 알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표도르가 그런 시선에 당황하여 어물거리자 이반 일리이치는 비로소 제 정신이 돌아왔다.

 

"그래, 잘했다. 거기에 그냥 놓아라. 그리고 내가 세수하고 셔츠 갈아 입는 것을 좀 도와주렴."

 

이반 일리이치는 세수를 시작했다. 쉬엄쉬엄 손과 얼굴을 씻고, 이를 닦은 다음 머리에 빗질을 하면서 거울을 들여다 보았다.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든다. 푸른 기가 도는 이마에 머리카락이 착 달라붙어 있었다.

 

셔츠를 갈아 입을 때 자신의 몸을 보면 더욱 공포감을 느끼게 된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그는 의식적으로 자신의 몸을 보려 하지 않았다. 이윽고 그는 가운을 걸치고 담요로 몸을 감싸고 차 쟁반을 앞에 놓았다. 이렇게 팔걸이 의자에 기대 앉는 짧은 순간 그는 상쾌한 기분을 맛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찻잔을 입에 대자 또다시 그 메스꺼움과 고통이 시작되었다. 그는 억지로 차 한 잔을 마신 다음 두 다리를 뻗고 모로 드러누웠다. 그리고 하인을 내보냈다.

 

그저 모든 것이 똑같다. 때로는 희망이 한 방울 반짝이는 듯 하다가 다음 순간 절망의 거친 바다가 파도를 일으킨다. 언제나 그 고통, 똑같은 그 고통, 그리고 외로움과 우울함, 모든 것이 항상 같을 뿐이다.

 

혼자 있노라면 무섭고 침울해진다. 그래서 누구든지 옆에 불러 같이 있고 싶었으나 또 누가 곁에 있으면 더욱 침울해진다.

 

'모르핀을 놓아 달라고 할까... 이 고통을 잊을 수만 있다면... 이번에 의사한테 부탁해서 좀 다른 방법을 써 달라고 부탁해야겠어. 제기랄, 이건 정말 미치겠군. 정말 못 견디겠어...'

 

한 시간 두 시간 이런 상태로 흘러간다. 문득 현관에서 초인종 소리가 난다.

 

'의사가 온 것이겠지.'

 

과연 뚱뚱한 의사가 팔팔하고 생기에 가득찬 표정으로, 쾌활한 태도로 들어선다. 마치 '이런, 또 시름에 잠겨 계시는군. 이제 곧 다 낫게 해 드리죠' 하는 듯한 표정이다. 의사 역시 자신의 쾌활한 표정이 이곳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미 그런 표정이 얼굴에 굳어져 버려 바꿀 수가 없다. 마치 아침부터 연미복 차림으로 여러 집을 방문하는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의사는 힘차게 위로라도 해주는 것처럼 두 손을 비빈다.

 

"몸이 꽁꽁 얼어버렸습니다. 추위가 대단하군요. 잠깐만 불을 좀 쪼이겠습니다."

 

마치 '불을 쪼이는 동안만 잠깐 참으면 곧 금방 낫게 해 드리죠' 라고 말하는 것 같다.

 

"아픈 건 좀 어떠세요?"

 

'요즈음 경기는 좀 어떠세요?' 의사는 이렇게 묻고 싶었으나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지난밤엔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이렇게 묻는 것이라고 느낀다. 적어도 이반 일리이치의 느낌은 그렇다.

 

'자네는 늘 거짓말만 늘어놓으면서도 그게 부끄럽지 않은가?' 이반 일리이치는 이렇게 묻는 표정으로 의사를 본다. 그러나 의사는 이런 질문을 이해하려 들지도 않는다. 이반 일리이치는 말했다.

 

"항상 마찬가집니다. 통증이 도무지 줄어들거나 덜하지도 않아요. 좀 어떻게 다른 방법이 없겠습니까?"

 

"환자들은 으레 그렇게 말하는 법이죠. 이제 겨우 몸이 좀 녹았습니다... 까다로운 프라스코바아 후요드로브나께서도 이제 제 손이 차다는 소리는 못하겠죠... 어디, 좀 볼까요?"

 

의사는 손을 내밀었다. 그는 지금까지의 표정을 싹 바꾸어 근엄한 얼굴로 진맥을 하고 열을 재어 본 후 손으로 환자의 몸을 두드리고 청진기를 대보기 시작한다.

 

이반 일리이치는 이런 것들이 모두 쓸데없는, 공허한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의사가 무릎을 굽히고 자신의 몸 아래 위로 청진기를 대어보면서 심각한 표정으로 진찰에 열중하는 것을 보노라면 어느결에 그의 태도에 빨려 들어가곤 했다. 마치 법정에서 변호사의 변론을 듣고 있노라면 그들이 뻔한 거짓말을 하고 있으며 그 거짓말을 하는 이유까지 훤히 보이면서도 어느덧 거기에 빨려 들어가듯이.

 

의사가 긴 의자 옆에 무릎을 굽히고 이반 일리이치의 몸을 똑똑 두드리고 있는데, 문에서 아내의 옷 스치는 소리가 났다. 의사가 왔다는 것을 알리지 않은 하인을 나무라는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방에 들어오면서 남편에게 입을 맞추기가 무섭게 자기는 벌써부터 일어나 있었다는 것, 의사가 집에 온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 방에 오지 않았다는 등 변명을 해댔다.

 

이반 일리이치는 그녀를 바라본다. 그녀의 온 몸을 이리저리 살펴보는 것이다. 그녀의 하얀 살결과 알맞은 몸집, 고운 팔목, 윤기 있는 머리카락, 생명력에 가득찬 눈 등이 모두 그에게는 트집 잡을 구실일 뿐이다. 그는 모든 정신을 기울여 그녀를 증오한다. 그녀와의 접촉은 그런 증오를 그에게 가득차게 했다. 그것은 그를 더욱 괴롭힐 뿐이었다.

 

그와 그의 병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는 과거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의사가 환자를 대하는 태도를 한 번 정해 놓으면 결코 고치지 못하는 것처럼 그녀가 그를 대하는 태도도 그랬다. 즉 그가 필요한 조치를 하지 않아서 저 지경이 되었다는 것, 모두 그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 그러나 자기는 애정을 갖고서 이를 나무라고 있다는 태도였다. 그리고 그녀는 이 태도를 완성해놓고 결코 바꾸지 못하는 것이다.

 

"이 양반은 남의 말을 통 듣질 않아요. 약도 때 맞춰 드시지 않구요. 아무리 그러지 말라고 그래도 다리를 치켜 들고 주무신다니까요. 그러니 열이 위로 오를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글세...?"

 

그녀는 남편이 게라심을 시켜 다리를 쳐들고 눕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의사는 비웃는 듯, 불쌍하다는 듯 입가에 미소를 띄운다. 마치 '뭐 별 수 없죠. 환자란 이따금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하곤 하니까요. 그래도 그 정도야 봐 주어야죠.' 라고 말하듯이.

 

 

14. 허위로 뒤범벅이 된 생활

 

진찰이 끝나자 의사는 시계를 보았다. 아내는 남편에게 그가 뭐라고 말해도 오늘은 유명한 의사가 와 주기로 했으므로 지금 이 의사와 함께 다 함께 모여 병세를 의논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제발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마세요. 이건 저 때문에라도 서두르는 거에요."

 

아내는 비꼬듯이 말했다. 이건 모두 그를 위해서 하는 일이니까 이런 그녀의 순수한 목적을 생각해서라도 남편이 반대할 권리를 갖지 못한다는 것을 암시하려는 것이다.

 

그는 얼굴을 찌푸리고 잠자코 있었다. 그는 자기를 둘러싼 허위가 이젠 결코 구별해낼 수 없으리만큼 뒤범벅이 되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열 한 시 반이 되자 정말 그 유명하다는 의사가 찾아왔다. 또다시 청진을 하고, 환자 앞에서 혹은 옆방에서 신장이니 맹장이니 하는 진지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과거와 똑같이 엄숙한 표정으로 그에게 묻고 대답하는 절차가 진행되었다. 또 한 번 삶과 죽음이라는, 이제는 그의 앞에 놓인 유일한 현실 문제 앞에 맹장과 신장이 꼬리를 물고 나타나는 것이다. 두 사람의 의사가 집중 공격을 가해 그들, 삶과 죽음과 맹장과 신장을 설득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유명한 의사는 근엄한 표정으로, 그러나 별로 절망적이지는 않다는 듯한 얼굴로 작별 인사를 했다. 이반 일리이치가 공포와 희망으로 빛나는 눈을 들어 회복할 가능성이 있느냐고 머뭇거리며 묻자, 그는 확답을 할 수는 없지만 가능성은 있다고 대답했다.

 

이반 일리이치가 간절하게 희망을 담아 의사를 바라보는 눈초리가 너무도 비참해서, 그것을 본 아내는 의사에게 왕진비를 주려고 밖으로 나가면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의사의 방문으로 일시 원기가 회복된 듯했지만 그것도 오래 가진 못했다. 여전히 같은 방, 같은 그림, 같은 커튼, 벽지, 약병, 그리고 같은 고통에 시달리는 자신의 육체. 이윽고 이반 일리이치가 앓는 소리를 내자 주사 바늘을 찔러넣었다. 그는 의식을 잃었다.

 

의식을 회복했을 때는 이미 황혼이 짙어지고 있었다. 식사가 들어왔다. 그는 힘을 들여 고기 수프를 마셨다. 언제나 마찬가지로 또다시 밤이 찾아왔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일곱 시에 아내가 그의 방으로 왔다. 야유회에 나가는 듯한 옷차림으로 탐스러운 가슴을 불룩 내밀고 얼굴에는 짙은 화장을 했다. 그녀는 이미 오전에 극장에 간다는 얘기를 그에게 미리 해놓았다. 사라 베르날 극단이 와 있어서 그녀는 그가 예약해 놓으라던 좌석의 표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반 일리이치는 이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외출 차림은 그에게 극심한 모욕감을 주었다. 그러나 곧 아이들의 교육에도 좋고, 흥미 있는 오락거리이기도 하니 좌석을 예약하라고 말했던 것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생각해냈다. 그는 모욕감을 감추려고 애를 썼다.

 

아내는 흐믓하지만 어딘지 미안해 하는 표정으로 방에 들어왔다. 그녀는 잠시 곁에 앉아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 질문이 형식적인 것으로 느껴졌다. 병세를 안다고 해도 별 수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그렇게 물을 뿐이다.

 

그녀는 미리 준비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기는 가고 싶은 마음이 없지만 좌석을 이미 예약해둔 데다, 헬렌도 가고 딸과 페트리시체프(사위가 될 예심판사)도 가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나는 당신 곁에 있는 것이 더 좋지만, 그러나 자기가 없더라도 당신은 만사를 의사의 지시대로 잘 하시라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정말, 저 후요돌 페트리시체프(사윗감)도 이리 오고 싶어하던데 오라고 할까요? 리쟈도 함께요."

 

"오라고 하구려."

 

화려하게 치장한 딸은 몸의 선이 뚜렷하게 드러나 보였다. 그 육체야말로 그를 가장 괴롭히는 것 중의 하나이다. 힘있고 건강이 넘치는 그녀는 한눈에 보아도 사랑의 즐거움에 취해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행복에 장애가 되는 병이나 거기 따르는 고통, 죽음 따위는 그녀에게 자신의 행복을 방해하는 분노의 대상일 뿐이다.

 

연미복 차림의 후요돌 페트로비치도 눈이 부시게 하얀 칼라로 길고 굳센 목을 감싸고 넓은 가슴을 쫙 펴고 들어왔다. 그는 검은 바지를 입고 탄력이 넘치는, 기운 찬 발걸음으로 한 손에 꼭 맞는 흰 장갑을 끼고 오페라 모자를 손에 들고 있었다.

 

그들의 뒤로 새 중학생 교복을 입은 아들도 들어왔다. 가엾게도 눈 밑에 푸른 멍이 들어 있었다. 이반 일리이치는 그 멍이 생긴 원인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아들이 그는 항상 가여웠다. 그 놀란 듯한, 측은해 하는 눈이 두려운 표정을 담고 있다. 게라심을 제외하고는 이 아들만이 자신을 이해하고 마음 아프게 생각해 주는 것 같았다.

 

일행은 자리에 앉아 또 한 번, 좀 어떠시냐고 물었다. 침묵이 흘렀다. 리자가 제 어머니에게 오페라 안경을 어디다 두었느냐고 물었다. 그것을 누가 어디에 두었느냐를 놓고 어머니와 딸은 말다툼을 벌렸다. 분위기가 불쾌해졌다.

 

후요돌 페트로비치는 느닷없이 이반 일리이치에게 사라 베르날 극단 공연을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이반 일리이치는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라 당황했으나 이내 대답했다.

 

"아니. 자네는 본 적이 있나?"

 

"네. 학생 때 본 일이 있습니다."

 

그러자 아내가 그 여배우는 그 역을 맡을 때가 가장 멋지다고 했다. 딸이 거기 대해 반박했다. 곧 그 유명한 여배우의 연기에 대한, 틀에 박힌 대화가 시작되었다.

 

이야기 도중에 후요돌 페트로비치는 힐끗 이반 일리이치를 쳐다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다른 사람들도 그를 힐끔 보고는 이야기를 뚝 그쳤다. 이반 일리이치가 그들을 노여움에 가득 차 번들거리는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방 안의 분위기는 극도로 무거워졌다. 그러나 아무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이 무거운 침묵을 깨뜨려야 했으나 아무도 선뜻 그렇게 할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모두들 갑자기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겨 그것이 계기가 되어 이 형식적인 평형이 깨져 제각기 마음 속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면 어쩌나 하고...

 

리자가 제일 먼저 결심했다. 그녀는 침묵을 깨뜨렸다. 그녀는 모두가 느끼고 있으면서도 숨기고 있는 것을 마침내 입 밖에 쏟아 놓았다.

 

"이제 극장에 갈 시간이 되었는데요."

 

그녀는 아버지가 선물한, 자기 시계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리고는 남들은 알아 보지도 못할, 자기들만이 아는 어떤 의미가 담긴 미소를 약혼자에게 보냈다. 그녀는 옷 스치는 소리를 내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를 따라 다른 사람들도 일어서서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그들이 밖으로 나가 버리자 이반 일리이치는 갑자기 기분이 개운해지는 것 같았다 - 허위가 사라진 것이다 - 그것은 그들과 함께 사라졌다. 그러나 고통은 남았다. 전과 다름없는 고통, 다름없는 공포가 더 무거워지지도 가벼워지지도 않은 채 그대로 남은 것이다. 다만 더 악화되어 가고 있을 뿐이다.

 

"게라심 보고 들어오라고 그래라." 그는 옆에 서 있는 하인에게 말했다.

 

 

15. 나는 잘못 살아온 것 아닐까

밤이 이슥해서야 아내는 돌아왔다. 살금살금 발 끝으로 걸어 들어왔으나 그는 그녀가 들어온 것을 이미 알아차리고 있었다. 그는 눈을 떴다가 금방 다시 감아 버렸다. 그녀는 게라심을 돌려 보내고 자기가 그의 옆에 앉으려 했다. 그는 눈을 뜨고 말했다.

 

"그만 두고 저 방으로 그냥 가도록 해요."

 

"여보, 더 심해요?"

 

"마찬가지야."

 

"그럼, 아편을 좀 드세요."

 

그는 아내의 말에 따라 아편을 마셨다. 그녀는 옆 방으로 건너갔다.

 

새벽 세 시경까지 그는 야릇한 혼수 상태에 잠겨 있었다. 자신이 통증과 함께 어디론가 아주 좁은 굴 속 같은 곳을 깊고 시커먼 자루 속에 갇혀서 점점 깊게 빠져 들어가고 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곳을 빠져 나갈 수가 없다. 이 무서운 기분은 고통과 더불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는 두려워 하기도 하고 또 가는 데까지 가 보자고 마음 먹기도 하면서 싸우기도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벼랑에서 떨어지듯이 그는 혼수 상태에서 깨어났다.

 

게라심은 침상의 발치에 앉은 채로 조용히 자고 있었다. 그는 긴 스타킹을 신은 야윈 다리를 그의 어깨 위에 올려 놓은 채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갓을 씌운 촛불과 멈출 줄 모르는 이 고통...

 

"이제 그만 가서 자거라, 게라심." 그는 속삭이듯 말했다.

 

"괜찮습니다."

 

"아니야, 이젠 그만 가 보거라."

 

그는 다리를 내려놓고 한 팔을 밑에 고이고 옆으로 드러누웠다. 자신이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게라심이 옆방으로 갈 때까지 간신히 참았다가 어린애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자신의 쇠약함, 무서운 고독, 사람들의 잔혹함, 신의 잔혹함을 생각했다. 신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것을 생각하고 우는 것이었다.

 

'무엇 때문에 당신은 이런 짓을 하십니까? 왜 저를 이리로 보내셨습니까? 무엇 때문에, 정말 무엇을 위해 이런 혹독한 괴로움을 주십니까?'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오로지 아무 대답이 없다는 것, 결코 대답이 있을 리 없다는 것을 생각하고 울었다. 또다시 고통이 엄습해왔으나 그는 몸도 움직이지 않고 누구를 부르지도 않았다.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자, 더 더 때려 주시오! 도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했습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이윽고 그는 조용해졌다. 울음을 그쳤을 뿐 아니라 호흡도 중지하고 전신에 주의를 집중했다. 그것은 마치 목소리로 하는 말이 아니라 영혼의 소리, 그의 내부에서 끓어오르는 생각의 흐름을 듣는 듯한 자세였다.

 

'도대체 너에게는 무엇이 필요한가?' 이것이 그가 인식할 수 있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생각이었다.

 

'무엇이 필요하냐? 무엇을 원하느냐 말이다.' 그는 자신에게 되풀이해서 물었다. '무엇이냐고? 그것은 고통을 없애는 것이다. 살아나는 것이다.' 그는 대답했다.

 

'살아난다? 어떻게 살아난단 말이냐?' 영혼의 소리가 물었다.

 

'예전에 내가 살아온 것처럼 그렇게 사는 것이다. 오붓하고 유쾌하게...'

 

'오호, 그래? 예전에 네가 살아왔듯이 오붓하고 유쾌하게 말이지?' 그 소리는 묻는다.

 

거기서 그는 머리 속에서 자기의 유쾌한 생활 중에서 특히 좋았던 순간을 회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들 모든 유쾌했던 생활들이 이제는 당시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느껴졌다. 유년 시절 최초의 기억을 제외하고는... 그러자 이 유년 시절은 정말 좋았던 그 무엇인 것처럼 여겨져서 만약 그것이 되돌아올 수만 있다면 다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유년 시절의 이 유쾌했던 기억을 갖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가 철이 들었을 때부터의 기억, 당시엔 무척 즐거웠던 것들은 이제 그의 눈 앞에서 흩어져 버리고 무언지 하잘 것 없는, 오히려 누추하기 짝이 없는 것으로 변해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그것은 법률학교 시절부터 시작된다. 거기에 진실로 좋은 것이 무엇 하나라도 있었던가!

 

그곳에 즐거움은 있었다. 우정도 희망도 있었다. 그러나 상급생이 되어 가면서 이 좋았던 것들도 차차 희미해졌다. 다음으로 주지사 밑에서 처음으로 근무했던 시절의 좋았던 순간이 나타났다. 그것은 여성에 대한 사랑의 기억이었다. 그러나 이것들도 이내 모두 뒤범벅이 되어 버렸다. 그 다음부터는 좋았던 것이 차차 드물어져서 시간이 흐를수록 거의 없어져 갔다.

 

예상하지 못했던 결혼... 그 환멸, 아내의 입 냄새, 육욕, 허위! 그리고 이 죽음과 다름없는 근무 생활, 돈에 쪼들렸던 생활, 이렇게 흘러간 일 년, 이 년, 십 년, 이십 년... 어디까지 간다 해도 결국 마찬가지다. 앞으로 나가면 나갈수록 더욱 활기가 사라질 뿐이다. 그리고 이제는 준비가 다 되었다. 죽음이 있을 뿐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건 도대체 뭐란 말이냐? 무엇 때문이란 말이냐? 이럴 리가 없다. 인생이 왜 이리도 무의미하고 추악해야 한다는 말이냐? 가령 사실이 그렇다고 해도 왜 죽어야 하나, 왜 고통을 겪으면서 이렇게 죽어야 하는 것인가? 도무지 이치에 맞지 않는 것 아니냐?

 

'어쩌면 나는 잘못 살아온 것 아닐까? 하지만 나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해온 것 뿐인데... 도대체 왜 이렇게 잘못되었단 말이냐?'

 

그는 자신에게 이렇게 타일렀다. 삶과 죽음의 수수께끼에 대한 단 하나의 결론을 마치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얘기인 것처럼 완전히 부인하고, 제풀에 멀리해 버렸다.

 

도대체 너는 지금 무엇을 원하고 있느냐. 삶이냐? 어떻게 사는 것이냐? 그는 자신에게 되풀이해 물었다. 그렇지, 이게 바로 법정이란 말이다. 하지만 나에겐 결코 죄가 없다! 그는 분노에 차서 소리를 질렀다. 그러다 그는 울음을 그치고 이마를 벽에 돌려대고 단 한 가지 것에 대해서만 생각해 보기로 했다.

 

'무엇 때문이냐, 이 공포는 무엇 때문이냐?'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 답을 찾아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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