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아벨리, 스피노자, 홉스와 루소- 유물론적 전통
- 마키아벨리 fortuna와 virtu
16세기 이탈리아는 열정적인 인민, 소국들의 분열, 외국의 점령과 약탈, 무질서한 반항으로 분열된 상태였지만 통일의 목적을 위해 그것들이 사이에 연결이 없는 원자화된 상태였다. 마키아벨리의 기획은 이탈리아의 어딘가에 자리잡기에 충분한 운(fortuna)과 능력(virtu)을 지니고 이 원자적인 한 점에서 시작하여 민족국가라는 통합을 이루어내는 것이다.
이 기획은 정치적으로 통합자의 이름과 통합이 이루어지기 시작할 지역의 이름을 공백으로 놓아두는 완전히 우발적인 추론이다. 이는 주사위들이 비워 있는 도박테이블에 던져지는 상황이다. 마키아벨리는 로마냐 지방에서 공국을 이루었고 로마로 진격하던 중 병사한 체자레에게 운과 능력이 마주치는 상황을 기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운을 맞이했을 때 군주는 그것을 유혹하거나 폭력을 가하기위해 그 운을 여자처럼 다루는 능력, 요컨대 자신의 운명을 실현하기 위해 그것을 이용하는 능력을 가져야한다고 했다.
우리는 이 점에서 마키아벨리에게 운과 능력의 마주침에 대한, 여우와 사자와의 마주침이라는 정치이론을 배운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를 높게 평가하는 것은 그 정치이론뿐아니라 예정된 어떤 것도 가정하지 않는 철학이다. 민족통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도 이 정치적 공백 속이다. 완성된 사실의 필연성에서 입각해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해야할 사실에 입각해서 사고하는 것이 공백의 철학, 마주침의 유물론의 흐름이다. 알투세는 마키아벨리가 왕정주의자였는지 공화주의자였는지는 훌륭한 계몽철학이 빠져드는 어리석음의 함정이라고 말한다.
-스피노자는 "어떤 사람들은 세계에서 시작하고 다른 사람들은 인간정신에서 시작하지만 나는 신에서 시작한다"고 말한다.
신에서 시작한다는 것은 "전체에서 시작하는 것, 나는 그 어느 것에서도 시작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그에게 신은 자연일뿐이다. 그것은 무한한 수의 무한한 속성들을 갖추고 있는, 절대적 실체라고 할 수 있다. 이 속성들이 수적으로 무한하고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 않다는 사실이 이 속성들의 실존에, 그리고 이 속성들의 우발적인 형상들에 문을 활짝 열어 놓는다. 이 속성들이 평행하며 이 속성들에서는 모든 것이 평행의 효과라는 사실이 에피쿠로스의 비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신체와 정신의(외연과 사유) 의 마주침이 없는, 결합이 없는 이 평행이 인간이다. 이 평행의 철학적 효과들은 신은 자연일뿐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자연은 이 무한한 수의 평행하는 속성들의 무한한 총합이라는 사실이다. 철학은 더 이상 신에 대해 말할 일이 없도록 만들 뿐이다.
이 철학의 효과는 '인식주체'와 '인식되는 대상'의 문제에 대해서도 더 이상 말할 일이 없도록 만든다. 사고는 사고라는 속성의 양태들의 잇달음(suite)일 뿐이며, 사고는 하나의 주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 저 평행 속에서, 연장이라는 속성들의 양태들의 잇달음을 가리킨다. 신과 인식이론이 일단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환원된 후에 철학에 남는 것은 목적이나 기원이 없는 철학 그 자체인 공백이다.
-계약론과 우발적 유물론
홉스는 자연상태는 만인과 만인의 투쟁이며 모든 사회는 이 두려움 위에서 세워져 있다고 가정한다. 자연상태에 대한 이론을 제시하기 위해 이 자연상태를 그 구성요소들로 분해하기 위해 "사회의 원자들"에 까지 도달한다. 코나투스(conatus, 힘쓰다의 명사형,에너지)를 타고난, 자신의 존재를 집요하게 유지하려는 권력과 의지, 그리고 자신들의 자유의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자기 앞을 비워두려는 권력 및 의지를 타고난 개인들이 이 사회의 원자들이다. 원자화한 개인들, 그들의 운동의 조건으로서의 공백은 개인을 존재하게하는 힘을 이루는 자유가, 자신의 정복적 힘앞의 "장애의 공백", "장애의 부재" 속에 들어있다고 주장한다.
이 개인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에 자신을 맡기지 않으며, 곧바로 행진하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장애를 피하려는 의지에 의해서만 그렇게 한다(원자들의 자유롭고 평행하는 낙하를 연상시킨다). 비어있는 세계안에 마주치지 않는다면 행복할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세계는 꽉 차 있다는 것이다. 동일한 목표를 추구하는 사람들, 자신의 코나투스에 자리를 만들어 주기 위해 서로 맞서고, 서로 죽음을 주는 것 밖에 다른 수단을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들로 꽉 차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계산에 의해 어떤 반대급부도 없이 그들의 모든 권리(자연권)를 위양하게 될 자, 즉 리바이어던의 전능한 권력에 저항하지 않을 것을(원자론적 개인들로서) 서로 약속한다.
알투세는 홉스의 리바이어던 구상이 비난받아 마땅한 괴물이 아니며, 그의 야망은 당시의 있는 그대로의 세계, 그의 세계의 생존능력의 조건들과 발전의 조건들에 잘 복무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한다. 홉스의 사고 속에서 원자화된 개인들에 대한 파악은 엄격성을 지니고 있지 않지만 세계의 우발적 구성이라는 결과에 도달한 것은 분명하다는 것이다.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루소의 자연상태는 모든 거의 근본적 기원이 "순수 자연의 상태"와, 순수상태들에 각인된 수정들(modification)에 이어 나오는 "자연상태"로 구분된다. 마주침이 없는 순수자연은 텅빈 무한한 삼림속으로 자기 길을 가는 것으로 에피쿠로스의 허공과 대등한 것이다. 이로써 루소는 모든 사회의 가능성의 조건에 앞서는 '사회의 무'를 형상화 하는 데 성공한다. 그
다음 순서는 순수자연상황에 마주침의 상태가 부과되어야 하는 것이다. 공간의 세분화한 축소와 자연재앙들이 실제로 지속되는 마주침과 연합에 들도록 강제하고, 인간들사이에는 사회적 관계인 강제적 관계들이 발전한다. 시간이 누적됨에 따라 강제된 접촉들이 인간들사이에 언어, 감정, 애정관계 또는 투쟁을 산출하고 끝내 전쟁을 산출할 때까지 장기에 걸친 완만한 변증법이 개입된다. 사회가 탄생하고 전쟁 역시 탄생한다. 사회화한 인간본성을 산출하는 축적 및 변화의 과정이 전개된다.
우리는 인간들을 서로 접근시키는 자신의 법칙을 부여하지 않는다면, 이 마주침은 전혀 지속되지 않을 것임에 주목해야한다. 루소의 이 글에서는 부당한 계약에 대한 이론, 즉 가장 교활하고 힘센 자들의 거만에 의해 약한 자들의 복종과 함께 묵인되는 힘의 계약이론으로 끝맺는 -그리고 자신의 진정한 의미를 사회계약에 고정시키는 - 이 모든 배치들의 효과들이 충분하게 성찰되지는 못했다. 다만 저 자연상태로 재추락하는 파멸의 위협아래에서만 체결되고 존속된다는 주장이다. 이 사회상태는 요컨대 형태를 취한 마주침, 필연적이게 된, 그러나 마주침 없음의 우발성과 마주침 없음의 형태들의 우발성의 토대-여기서는 계약이 한 순간에 재추락할 수 있다.-위에서 필연적이게 된 형태를 취한 마주침이다.
따라서 사회계약은 유토피아가 아니라 정당한 사회이든 부당한 형태의 사회이든 모든 사회의 내재적 법칙으로 존재하게 되며, 문제는 어떻게 부당한 형태를 정당한 형태로 교정하느냐에 있다는 것이다. 정당한 형태는 결국 실존하지 않는 것이다. 현존하는 구체적인 형태들, 스피노자가 말하는 "개별적 본질들"이란 모든 조건의 선험적 조건, 다시 말해 모든 역사의 선험적 조건으로서 상정해야하는 개인들, 정세들, 현실의 국가들 또는 그 인민들이어야한다. 여기서 필연성의 우연성을 우연성의 필연성으로 사고하는 루소의 역사이론의 관점이 드러난다.
필연성의 우연성과 우연성의 필연성은 당혹스러운 대쌍(couple)이다. 이 대쌍의 직관은 18세기 프랑스 대혁명의 거역할 수 없는 충격에 이끌려 그것에 대해 문을 활짝 연 그 목적론들을 거부한다. "역사의 목적"이라는 질문이 제기될 때, 동일한 진영 안에서 에피쿠로스와 스피노자, 루소가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동일한 '마주침의 유물론'이라는 토대 또는 '정세의 사고'라는 토대에 자리잡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마르크스도 이러한 면이 있지만, 그러나 마르크스는 '마주침의 우발성'과 '혁명의 필연성'으로 분열된 지평안에서 사고하도록 강제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