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 론

신학, 철학, 역사, 정치 사상과 같은 면에 어거스틴이 끼친 영향은 지속적으로 이어져오고 있으며 그가 차지하는 위치는 매우 넓은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레오.C.데일리가 서구문명사에서 "어느 누구도 어거스틴 만큼 희랍 철학과 유대교적 전통 그리고 기독교 신앙을 잘 종합한 사람이 없다." 라고 말한 것에서 잘 알 수 있다.

그의 영향력과 업적은 무엇보다도 그가 남긴 다수의 저술들에 기초하고 있는데 120권에 이르는 저술과 269편의 서신들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고백론>과 <신국론>이라 하겠다. 이 중에서도 <고백론>은 어거스틴 자신의 생애와 사상의 변천, 회심에 따른 고뇌들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에 대한 이해와 그 사상의 뿌리들을 탐색하는데 가장 직접적인 문헌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외에도 이 저술에는 어거스틴에 대한 개인적인 사실들을 통해 희랍, 라틴 사상과 기독교의 조우가 어떤 형태로 이루어져가고 있는가를 보여 주고 있으며 어거스틴 자신이 골몰해 오던 문제들 즉, 선과 악의 문제, 원죄론, 시간론, 창조론, 의지론 등에 관한 그의 생각을 직접적이고 핵심적으로 개진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어거스틴 사상의 틀을 이루는 관건적인 요인들로써 실상 기타 그의 다른 서술들은 이러한 기본 사상 체계를 확대하거나 각도를 달리해 적용한 것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그점에서 <신국론>도 사실은 <고백론>적 인식을 국가와 사회, 역사에 적용한 것에 불과하다는 J.O'meara의 말은 타당한 것이다.


2.<고백록>에 대한 평가

어거스틴의 <고백록>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우선 그것은 기독교 역사상 자신의 신앙적 체험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최초의 고백서라고 인정되어야 하는데 물론, 그 이전에도 이러한 저술들이 있었지만 그 심도는 <고백록>에 미치지 못 하는 것이었고 이런 점에서 A.F.West 교수는 <고백록> 이전의 그 어떤 이도 이같은 집필을 시도하지 않았으며 이후로도 이와 같은 작품이 탄생하기까지는 천년이라는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Bourk는 웨스트의 주장에서 더 나아가 "어거스틴이 자신의 삶과 사상 그리고 감정을 자성적으로 분석한 업적은 후기 기독교 심리학의 기초를 이루어 놓았다." 고 평가하고 있다.

이와 함께 <고백록>은 단순한 '자기 성찰적 자서전(Introspective Autobiography)'에 머무르지 않고 문학 형식사(The History of Literary Form)상 하나의 신기원을 이루어 놓았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문학 형식면에서도 독특한 경지를 열고 있는데 이것은 로마인들의 창안물인 '자서전적' 형식에 시적인 운율, 간결한 문체, 서정성을 도입하여 독특한 문학 형태를 창안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거스틴은 이와 함께 깊숙한 그의 내면을 분출시키고 하느님 찬양의 장엄한 분위기를 유지시키기 위해 시적 요소와 산문성을 적절히 조화시킨 기도형식의 문체를 구사하였다.

그러나, <고백록>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도 존재하는데 먼저, 그 형식의 단조로움과 주제의 단순성은 독자들에게 '지루한 느낌'을 준다는 평가가 있다. 그래서, 부아지에(M.Boissier)는 이 저술이 단조롭다고 비판하고 있으며 하르나크(Harnak) 또한 이 책은 그 분량이 너무 많고 근대적인 사고에 익숙치 않은 내용이 많으므로 독자들에게는 축약하여 소개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또, 와필드(Warfield)같은 이는 이 책은 라틴어로 읽혀질 때 그 진수를 터득할 수 있으며 다른 언어로 번역되어 전해 질때는 메마른 듯한 내용으로 전해지는 단점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고백록>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비판도 있는데 Joseph McCabe는 어거스틴이 자신의 젊은 날의 잘못들을 오히려 미화시켜 보이려는 그릇된 의도를 가지고 썼다고 통박하고 있고 뿐만 아니라 이것은 한 인간의 과거를 빌려쓴 하나의 신학 논문으로 힙포 주교의 수사적 구사력에 의해 인간의 본성과 은총, 철학과 기독교를 적절히 배합시킨 자기 시현의 책에 불과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3.저술 배경

어거스틴이 <고백록>을 써야 했던 외적 요인과 내적 요인들을 살펴 봄에 있어서 그가 <고백록>을 쓰기 시작한 397년을 전후로 일어난 역사적 변화는 이 책의 집필 배경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의 상황은 기독교가 크게 성장하고 있던 반면, 로마 제국은 곳곳에서 몸살을 앓기 시작하였는데 378년 서고트족의 침입과 동로마 제국 황제 발텐(Valens)의 아드리아노플에서의 패사는 야만인 족으로 기울기 시작한 대세의 신호탄이었고 어거스틴이 로마로 가던 383년에는 '로마의 기근'이라 불리는 혹심한 배고픔이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기독교는 로마와는 반대로 그 위세가 커져 가고 있었는데 어거스틴이 개종한 7년 후인 394년에는 데오도시우스 황제가 공식적으로 모든 형태의 이교 신앙을 금지 시킴에 따라 기독교는 법적으로나 실제면에서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았으므로 이제 문제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체계화 시켜나가야 할 필요가 있었고 그럼에도 로마의 쇠퇴에 대해 기독교는 나름대로 설명을 해야 할 필요가 증가하고 있었다. 즉, 기독교는 이제 내외적으로 보다 더 체계적이고 이론적이며 경험적인 대응의 필요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기독교의 신앙 조건이 안정되어감에 따라 초기 기독교인들의 관심이 순교에 모아졌던 것에 비해 이 시기의 기독교인들은 다른 사람들의 신앙적 고뇌와 회심의 과정 그들의 가르침에 보다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된것도 <고백록> 집필의 외적 요인으로 무시 할 수 없을 것이다.

396년에 어거스틴은 정식 주교로 임명되면서 그 개인의 주변 상황에도 크게 변화가 왔는데 주교가 된 지 일년이 지난 시점에서 <고백록>을 쓰기 시작 했다는 점은 주목 할 만하다. 그가 이 저술을 시작한 것은 그의 나이 43세 였으니 인생의 원숙기인 중년에 접어들면서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를 점검하며 미래에 대한 신앙을 정립 해야할 내적 충동을 깊게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어거스틴 자신과 주변관계면에서도 <고백록>집필의 필요성은 증대되고 있었다. 즉, 교회 내에서의 그의 위치는 급속도로 상승되어 온 반면 다른 사람들의 그의 과거에 대한 의구심은 바뀌기 어려웠다. 그의 급속한 위치의 상승은 그에게도 힘든 변화의 연속이었지만 주변 사람들에게도 칭송과 의구심을 동시에 가지게 했던 것이다. 그가 과거 마니교도에서 개종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그의 글에는 이교적 플라톤주의자들의 사상적 영향이 사라지기 않았다는 사실은 주위의 의구심을 사기에 충분했으며 교회내의 위치상승과 마니교도들과의 논쟁과 문필력은 그에게 명성을 안겨줌과 함께 그에 대한 반대자도 낳았다.

그리고, 어거스틴 자신도 주교가 되는 것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과 거리가 멀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자신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유혹들과 싸우고 있다는 사실들을 전해주고 싶었고 아프리카 지역이 다른 지역에 비해 고립 되고 후진 지역이었으므로 다른 성직자들과의 접촉이 쉽지 않아서 그만큼 자료나 신앙서들이 필요하였다는 사실도 성직자로서의 그의 책무와 관련되어 고려되어져야 할 것이다. 더구나, 그의 아프리카인적인 기질은 우정을 중시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자신의 내면의 세계와 변화를 나누어 가지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의 극적인 회심의 경험과 같은 이러한 내적 비밀을 개인적인 편지로 전하는 것보다는 하나의 책으로 집필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라 판단한 것같다. 그래서, <고백록>은 교육적인 의미와 자기정리의 필요, 하느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시가 그의 타고난 문장력과 감동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 하겠다.


4.저술목적

어거스틴이 <고백록>을 서술한 근본 목적에 대해서는 <고백록>에서의 그의 서술, 후일 <재고록>에서 다시 회상하여 밝힌 내용, 그리고 '고백'이라는 말의 의미를 성서적 관계에서 검토하여 봄으로써 얻어질 것이다.

어거스틴이 사용한 '고백(Confession)'이란 "하느님이여, 주의 백성으로 하여금 당신께 고백하게 하시고, 모든 백성으로 하여금 주님을 찬양하게 하소서"(시 66:6)에 가까운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즉, 여기서의 '고백'이란 인간의 죄에 대한 고백일 뿐만아니라 신의 능력에 대한 고백이라는 의미이고, 범죄와 불의에 대한 고백은 신의 은총에 의존하기 위한 것이며 죄의 고백은 신의 영광에 대한 찬양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백'은 본질적으로 두 개의 의미를 가지는데 하나는 죄에 대한 것이며 또 하나는 신에 대한 찬양으로 이해 된다. 이러한 점은 어거스틴이 로마 관리인 다리우스에게 보낸 편지나 그의 다른 저술인 <재고록>등에서 죄의 고백과 하느님에 재한 찬양을 거듭하여 강조하고 있는 데서 잘 나타나고 있으며 이에 따라 <고백록>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즉, 1-9권까지는 '죄에 대한 고백(Confessio Pecati)'이며 11-13권은 '믿음에 대한 고백(Confessio Fiedi)'으로 이루어 지게 되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또한 <고백록>을 통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그들의 마음과 사랑을 신에게 돌리는 도구로 삼고자 했다. 그래서, 어거스틴 자신의 참회에 대한 것만 고백한 것이 아니라 동시에 알리피우스, 빅토리누스 등 다른 사람들의 참회와 생활을 기록한 것도 이러한 의도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어거스틴은 창세기를 쓴 모세나 시편을 쓴 다윗과 같은 소명감을 가지고 <고백록]을 저술하였다. 즉, 기독교 이론은 체계화 되지 않앗고 회심의 과정에 대해서나, 죄의 문제, 죄인이 구원받는 과정 등에 대한 기준적 설명이 요구되는 당대의 신앙적 상황이 모세가 살았던 출애급의 시대처럼 구시대에서 신시대로 넘어가는 시대로 보고 자신의 체험이 신앙의 길잡이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성서의 '시편'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시편에서 다윗이 서술한 하느님에 대한 감사와 찬양, 죄의 고백등이 자신의 신앙적 도정과 유사하다고 보고 자신의 체험을 시편의 형식을 빌려 쓰고자 했던 것이다. 이것은 어거스틴의 저술에서 나타나는 문체와 내용, 그리고 그 감동에서 그러한 냄새가 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래서, <고백록>은 단순히 개인의 죄에 대한 고백으로 끝날 수 없으며 신에 대한 장엄한 찬양과 자기의 죄에 대한 아픈 고백 그리고, 기독교리 체계의 기조를 놓는 논리적 신학서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요컨데 A.Pincherle가 <고백록>의 주된 의미를 세 가지 기본 요소 즉, '찬양의 고백','죄의 고백','믿음의 고백'이라고 했는데 바로 이 세 요소가 어거스틴이 <고백록>을 통해 전달하고자 한 핵심적인 내용인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단순한 자전적 저술이 아니라 자전적 형식을 빌린 치밀한 신학 이론서이며 사상서인 것이다.


5.<고백록>의 구성

<고백록]은 전부 13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내용과 문체의 특이성에 따라 크게 3부분으로 나누는 것이 일반화 되어 있다. 제 1부분은 1권에서 9권까지로 묶이며 이것은 다시 1-4와 5-9의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전자는 성장의 과정이며 후자는 기독교로의 회심 과정이라 하겠다. 제 2부는 10권 단권으로 여기에서는 회심후의 영적 현재 상태, 철학 및 신학적인 부분을 다루고 있으며 제 3부분은 11-13까지로 이는 창세기주해의 성격을 띠고 있다. 이러한 3부분은 그의 시간관과도 관계가 되는데 제 1부분은 과거의 사항이며 제 2부분은 현재 상태, 제 3부분은 미래 지향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문체에 있어서도 제 1부분은 개인적 서술의 형식을 띠어 솔직한 표현과 개인적인 고백에 즉각적인 흥미를 느끼게 하는 반면, 제 2부분은 친숙한 개인적 명상과 회고에 몰입함으로써 사상서적이며 이론적인 서술의 느낌을 갖게 한다. 제 3부분은 장대한 사상과 통찰에 감명을 받게 하며 창세기의 서술방식을 택하고 있다.

1권은 그가 15세가 되는 369년까지의 일로서 마다우라에서 수사학을 배우고 나서 공부에 대한 열정은 있으나 집안 형편이 어려워 더 이상 공부를 계속하지 못 하고 고향인 타카스테에 돌아와 있을 때의 일들을 서술했는데 그가 주로 다룬 문제는 원죄설의 근거와 자신의 가정 형편, 싫어했던 희랍어와 좋아했던 라틴어,연기된 세례 등에 대한 것들이고 성적인 금욕주의와 엄격한 교육과 훈련등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제 2권은 성장기(369-370)로 그의 나이 16세에 해당하는 시기이다. 이 시기는 그의 좌절기로 악한 행동을 하는 원인은 재미있었기 때문이라는 심리적인 기술을 하고있다.

제 3권은 카르타고에서의 생활(371-373)을 기록하고 있는데 여인과의 동거,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를 읽음으로써 자극된 지혜에 대한 추구와 철학적인 갈증, 그리고 선악의 문제로 고민하다가 마니교를 수락하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서에 다시 돌아가려다 환멸을 느낀 점인데 이는 유아 시절의 세례연기와 더불어 어거스틴이 이때부터도 가톨릭 지향적 심성에 놓여 있었다고 할 점이다.

제 4권은 19세 생일이 지난 후부터 28세에 이르는 기간(373-382)에 대해 적고 있다. 이때에 그는 미신과 점성술에 탐닉하여 <사물의 아름다움과 적절함에 대하여>(380)라는 처녀작을 썼고 아리스토텔레스의 <10범주론>을 읽었으며 카르타고에서 수사학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제 5권은 마니교도와 결별하는 과정과 로마행, 그리고 밀란에 가서의 암브로시우스와의 만남(382-384)을 쓰고 있다. 여기서 서술된 마니교도와의 결별은 그가 이미 10년간 그 종교에 침잠한 이후의 일이어서 이후 그의 사상형성에 미친 마니교의 영향을 논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되었다.

제 6권은 5권에서 시작된 회심과정의 구체적인 서술로 암브로시우스에게 지대한 영향을 받는 시기(384-386)의 일이다. 이 시기에 그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 회의적이었으며 15년간의 동거녀와의 결별 그리고, 새로운 신부를 기다리는 동안의 성적인 타락과 건강의 악화 등이 그려지고 있다.

제 7권에서 그는 철학을 통해 제문제에 대한 해답을 구하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30세였다. 하느님과 악이 동시에 존재하는 관계에 대한 문제, 그리고 자유의지나 악에 대한 자유 선택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게 되고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플라톤학파의 몇 권의 책'에서 얻게 된다. 그는 신플라톤 철학의 글들을 통해 하느님의 본질이 최고의 靈임을 깨닫게 되고 하느님과 그리스도를 신플라톤적인 방법으로 해석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논자들간에 어거스틴의 핵심은 신플라톤 주의였으며 크리스챤으로서는 아니었다고 이의를 제기하는 계기가 된다.

제 8권은 바로 회심의 장(386)이라 하겠는데 그의 나이 32세때의 일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회심의 결단을 예로써 설명하고 아직도 마음의 소리가 의지에 미치지 못 함을 한탄하던 중 무화과나무 밑에서 '취하여 읽으라'는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되고 세례를 받을 최후의 결심에 이르게 된다. 이때까지는 신플라톤적인 영향과 신비주의적인 영감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듯 하다.

제 9권은 그의 33세(387)에 해당하는 시기로 세례와 친구의 죽음, 수사학교수직의 포기, 어머니의 죽음과 그에 대한 회상으로 채워진다.

제 10권은 9권 내용의 시기보다 12년 후(399)인 현재의 자기를 고백하고 있다. 이 무렵 그는 <선의 본성론>과 >삼위일체론>도 함께 저술하고 있었으며 이때는 자신이 힙포의 감독이 된지도 9년째에 접어든 해이다. 이 내용은 자기가 회심한 이후에 얻은 경이로운 깨달음에 대해 얘기하고 있으며 동시에 빠질지도 모르는 위험한 정욕에 대하여스스로를 타이르며 남에게도 경고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즉, 사건의 기록이 아니라 현재적 상념에 대한 설명적 기술이라 할 수 있으며 그런 점에서 보다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모습을 갖추게 된다. 이 부분은 기억의 신비함과 그 능력을 기술하는데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데 기억은 하느님을 인식할 수 있으나 그것만으로는 하느님을 깨달을 수 없다고 하면서 자신이 겪었던 유혹과 시련의 원인을 설명하고 이것들을 절제를 통하여 극복할 것을 주장하였다.

마지막 부분에 속하는 11,12,13권은 창세기의 주석에 해당하는 글로써 11권에서는 하느님께서 천지를 창조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리고, 창조의 사역이 시간속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문제를 논의한다. 12권에서는 태초의 세계를 이해시키기 위해 물체의 질료, 영원성, 창세의 비화들을 논하고 있고 13권에서는 하느님의 완전하심과 피조물의 불완전한 관계를 설정하여 하느님은 영원하며 사물과 생명의 유일한 근원임을 밝힌다. 그리고, 삼위일체설을 설명하고 하느님의 신비를 체험적으로 말하며 모든 백성이 그에게 돌아가기를 호소하고 그의 은혜와 경이를 찬양하며 글을 마친다.


6.<고백론>의 체제 논쟁

<고백론>의 내용에서 우리는 그것이 서로 다른 내용과 성격을 가진 몇 부분으로 나눌 수 있음을 보았다. 이 점은 이 책에 대해 이 책이 통일성을 지닌 책인가? 아니면 다른 책을 서로 함께 묶어 놓았을 뿐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게 히였다. 어거스틴 자신은 이것을 '단일 저술'로 간주하고 있는 반면 B.Warfield나 Max Zept등은 <고백록>을 1권에서 10권까지와 11권에서 13권까지로 나뉘어진 서로 관계가 없는 두 책으로 보고 있다. 그들은 이 책은 어거스틴의 회심 고백에서 그 절정에 이르렀며 그것으로 이 책의 목적은 이미 달성되었고 나머지의 서술은 앞의 고백적 의도와는 무관한 창세기 주석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 두 입장은 <고백록>안에서 나름대로의 근거를 들고 있어 서로가 타방의 주장을 배제하려하고 있다. 그래서, 통일성을 주장하는 이들은 유추된 가설을 설정하고 이를 통해 전체를 꿰뚫어 보려하면서 그것들이 가지는 상이점을 무시하려는 경향이 있는 반면, 분리론자들은 그 차이점에 집착한 나머지 통일성을 지나치려 하고 있다.

분리론을 주장하는 측은 <고백록>을 어거스틴의 죄의 고백과 자전적 생애를 기준으로 평가하려는 관점과 어거스틴의 신앙이 10권까지에서 완성되었다고 하는 관점에서 나머지의 내용을 전혀 다른 별개의 책으로 보고 있으나, 어거스틴 자신이 밝힌 바와도 같이 <고백록>은 단순한 자서전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궁극적으로 하느님에 대한 감사와 찬양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어거스틴의 신앙이 완성되는 것은 단순히 그가 세례받음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즉, 그는 10권에서 회심한지 12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욕에 몸부림치며 괴로워하는 자신의 모습을 솔직히 서술하여 회심 이후까지 가진 자신의 약점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의 탁월한 신앙적인 정직성을 보여 주는 이 대목에서 <고백록>이 단순한 신앙적 자서전이 아니며 동시에 회심으로 그의 신앙이 완성되었다는 의도로 쓰여지지도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형식과 톤은 다르지만 고백이 10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계속되어야하는 필요성과도 관련이 된다고 하겠다.

J.Copper가 지적한대로 <고백록>은 단순한 삶의 기록이 아닌 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에 접근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경이로움이었고 이러한 사실은 창조와 영원과 같은 문제를 다루지 않고는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따라서, <고백록>이 창세기에 대한 주석으로 끝맺은 것은 저자의 사상적 배려에서 나온 결과라 하겠다. 그리고,그에게 문제가 된것은 피조물의 최초상태 즉, 순수했던 상태를 찾아보려하는 것과 창조자와 피창조물의 관계를 대비시킴으로써 창조자에게 의지하지 않고는 영원한 휴식이 없다는 사실을 창조론의 명시적인 사실을 통해 말하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요컨데 어거스틴은 <고백록>을 '고백'이라는 단어의 이중적 의미에 맞추어 서술하였으며 그런 점에서 앞 부분과 뒷 부분은 서로 상이한 책의 묶음이 아니라 어거스틴의 계획에 의한 것이며 믿음의 본질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그가 그토록 고심하며 추구했던 하느님의 본질, 선과 악, 시간 문제 등에 필수적인 답이 되는 창조론을 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7.희랍 사상의 영향 문제

어거스틴의 사상에서 어느 부분까지가 플라톤적이며 어디까지가 크리스챤적인가 하는 문제는 <고백록>에서 추적하고자 하는 중요한 잇슈가 되어 왔다. 그는 <고백록> 제 7권에서 플로티누스의 사상에서 큰 영향을 받고 그것을 통해 체계적인 해답에 도달하고 있음을 숨기려하지 않았다. 플로티누스의 <Enneads>에서 영혼 문제를 논의됨으로써 어거스틴은 물질적인 한계를 극복하게 된다. 그래서, 창조자와 피조물과의 관계는 '유출설'에 의하여 해독이 가능했고 악과 선의 관계도 이 유출의 관정에서 생기는 선의 부족상태라는 방법으로 악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같은 7권에서 그는 플라톤의 [로고스]와 말씀과의 관계를 비교하여 그 유사성을 터득하면서 그같은 깨달음에 이르게 한 것을 하느님의 도움으로 돌리고 있다. 그래서, O'meara는 어거스틴의 플로티누스적 회귀를 신약에서 말하는 탕자의 돌아옴에까지 비유하고 있고 어거스틴이 플로타니우스의 책을 읽음으로써 전혀 다른 새 세계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실, 어거스틴의 젊은 시절의 철학적인 각성도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나 아리스토텔레스의 <10범주론> 등을 통해 이루어졌고 그가 회심한 후에도 플라토, 플로티누스 등을 칭찬하는데 이색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고전 사상이나 교육의 중요성을 부인한적이 없으며 신앙과 이성의 중요성을 논하고 있는 경우에도 이것들을 대립적으로 파악하지는 않았다.

이상과 같은 신플라톤주의와의 관계 때문에 어거스틴의 회심이 성서적인 완전한 회심이 아니고 다만, 신플라톤주의로써의 사상적 전환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대두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이러한 주장의 핵심은 어거스틴의 사고는 본질적으로 신플라톤주의라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의 회심은 신플라톤주의적 유심론의로의 회심이며 무화과 나무 아래의 신비적인 경험도 신플라톤주의적 신비주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비록, 어거스틴이 뒤에 기독교에 포용되기는 했지만 그는 여전히 일생을 통하여 본질적으로 신플라톤주의자로 남았으며 적어도 신플라톤주의적 사고기조가 아직도 동화되지 않은 상태의 기독교와 더불어 마음속에 공존하고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러한 주장들이 나름대로의 근거는 가지고 있지만 그 주장들이 지나친 일반화나 과장의 위험도 가지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먼저, 어거스틴의 회심을 지나치게 플라톤사유에로의 변천에 초점을 맞추어 파악하려는 근시안적인 태도를 경계해야 할 것이다. 물론, 어거스틴의 사상적 변천 과정에서 신플라톤주의가 가지는 역할을 무시 할 수는 없지만 플라톤의 서적을 읽기 이전인 어린 시절부터 어거스틴은 기독교적인 분위기의 가정에서 자랐으며 동시에 이교도였던 그의 아버지도 죽기 수년전 즉, 어거스틴이 13-15세에 해당하는 시기에 개종하여 사실상 전가정이 기독교화된 상태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가정적 배경 때문에 어거스틴은 그의 사상적 방황에도 불구하고 정신의 저변에 기독교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가정을 할 수 있다. 또, 한발 더 나아가 그가 <호르텐시우스>를 읽은 감동에 이어 다시 <성경>을 읽어 보려한 것, 그때부터 선과 악의 문제로 고민하다가 급기야 마니교도가 되었다는 것도 사실은 기독교적 가르침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 즉, 진리 탐구의 과정에서 그곳에 빠져 들어갔다고 역설적으로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그후에도 그가 아리스토텔레스를 읽고 회의주의에 빠지며 플로티누스의 책을 읽고 암브로시우스의 설교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보다 바른 종교를 찾기 위한 사상적 추구과정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리고, 어거스틴이 극적인 회심의 체험을 겪은 후 카시키아쿰에서 세례를 준비하고 있을 때의 대화나 저술의 내용이 아직까지도 철학적인 질문에 가득차 있으나 이 같은 질문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즉, 그는 <아카데미파 반박>의 제 3권에서 그러한 질문의 목적은 "이성을 권위에 통합시키고 그의 믿음을 그리스도의 권위에 통합시키는데 있다."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플로타니우스에게서 찾으려 한것도 신앙을 체계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도구를 찾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성과 신앙의 문제에 대해서도 회심할 당시에는 독립적인 것으로 파악했으나 뒤에 이성이 신앙에 도움을 준다고 이를 수정한 것도 사실이나, 카시키아쿰 대화의 주류를 이루는 것은 플라톤적 사상기조 위에서 기독교를 이해하려고 했던 것이지 결코, 플라톤 이해로 자족 상태에 있었다고 볼 수 없다. 그래서, 적어도 두 요소가 공존 상태에 있었으며 그 후 점진적으로 성서적 크리스챤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요컨데 그는 기독교를 플라톤적 사유 방법으로 이해 수용하였고 이 수용의 전기를 통하여 성서적 이해에 삼투되어 들어갔으며 궁극적으로 이를 극복하여 기독교적으로 소화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같은 결과로 '믿기 위해 아는 것이 아니라 알기 위해 믿는 것이다'라는 명제에 도달하게 되었으며 <고백록>을 쓸 수 있었던 것도 신플라톤적 사유체계를 서술하려는 것보다도 자신의 구원에 대한 감사와 찬양의 고백이었다는 점은 어거스틴의 신앙변천의 궁극적인 성격을 대변한다고 보겠다.


8.<고백록>에 나타난 어거스틴의 역사인식

어거스틴의 역사 인식을 논할 때 제일 먼저 이해해야할 요소는 그의 '기억론'이다. 그는 인간이 가진 기능 중에서 가장 경이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기억이라고 보고 사물에 대한 인식도 기억의 매체를 통해 가능하며 神을 인식할 수 있는 것도 기억을 더듬어 찾아 가는데서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사람의 '사유'는 기억이 있을 때에만 가능하며 또, 그것이 인간의 행위로 표현이 가능하다고 하고 기억이 없으면 사유가 있을 수 없으며 사유가 없는 행위란 상상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았다.

사실, 의지의 선택도 사유 없이는 불가능하며 의지의 선택이 없는 정상적인 행위 또한 존재하기 힘든 것이라 하겠다. 기억의 문제를 역사 인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의지'와 '시간'과의 관계에서 생각할 때 그것이 역사 인식과 역사 행위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더욱 부각된다. 객관적인 역사로서는 엄연히 일어난 사건들은 기록의 유무에 관계 없이 일어난 사실임에는 틀림없으나 실체에 있어 그것이 기억되거나 기록되지 않으면 그 역사는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어거스틴은 일찍이 역사의 주관성을 예언했다 하겠다. '기억'된 과거는 또한 단순히 기억으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가치 선택, 행위에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인간의 과거 역사란 현재적 행위에 밀접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고 다른 의미에서 현재의 행위와 의지는 과거기억의 축적 결과라 하겠다. 이 점에서 어거스틴은 매우 현대적 감각의 역사 인식 방법을 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기억과 시간의 문제도 밀접히 관계되어 있다. 시간이란 단순한 외적인 변화가 아니라 그것들은 기억속에서만 존재한다. 지나가버린 과거와 오지 않은 미래 사이에서 존재하는 시간은 오직 현재뿐인데도 우리가 과거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기억속에 남아 있기 때문이며 미래가 올 것을 예언하는 것도 우리의 의식이 그렇게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기억이 없는 시간이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모든 역사는 현재적 관점에서 조명 할 수 밖에 없는 역사의 현재성을 일찍이 간파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의 기억속에 없는 역사는 존재하지 않으며 기억속에 없는 과거의 역사는 현재의 의지선택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래서, 어거스틴에게 기억을 배제한 역사인식은 있을 수 없으며 기억은 곧 역사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리고, 기억은 현재적이며 그래서, 현재적 관점에서만 역사의 조명은 가능하다. 이 점에서 크로체가 역사를'현재적 역사'라고 한것이나, Carr가 역사를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했던 것은 어거스틴에 그 연원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9.결 론

<고백록>은 어거스틴 사상의 핵심이 모아진 것이며 이에 대한 이해없이 어거스틴 사상의 이해란 불가능하다. 그리고, <고백록>은 단순한 신앙 고백의 차원을 넘어서는 조직적인 신학서이며 사상서이고 신의 본질, 선과 악의 문제, 시간관, 창조론등 그 속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들은 그 자체로 매우 획기적인 주장이지만, 그것들은 또한 고대 헬라적 신관이나 역사,우주관과 맥을 달리하는 또다른 사상의 진원이 되었다.

경험 없는 개념 정립이란 불가능하다고 본다면 <고백록>은 어거스틴의 고뇌어린 삶과 신앙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농축된 사상이라 할 수 있고 <고백록>은 이전 사상편력에 대한 정리이며 이후 저술들의 원칙이 된다 할 수 있다. 그리고, <고백록>에서 제시되고 있는 창조론, 시간론, 의지론등은 이미 기독교적 역사 인식의 틀이며 그가 제시한 이러한 개념들은 바로 중세 사학이나 근대 사학사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 문헌>

李 石佑. [어거스틴의 <고백록>에 대한 일고찰]. <경희 사학> 15. 1988

 

내용출처 : [인터넷] http://rose0.kyungpook.ac.kr/~z971554/archiv/hisgene/histg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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