序論

이미 희랍-로마 시대로부터 헤로도토스는 그의 역사적 저술로 인하여 지대한 관심의 대상으로 비평과 찬사를 받아왔다. 오늘날 "역사서술의 창시자"로 알려진 그가 그의 뒤를 이은 고대의 사가들에 의해 혹독한 비판을 받은 것은 아이러니하다.

투키디데스는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대한 접근 방법이 불안한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는 진지한 역사를 쓰기 위해서는 과거의 사실이 아니라 현재의 사실을 동시대인의 관점에서 기술해야 하며, 멀리 떨어진 나라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살고 있는 지방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을 기록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헤로도토스의 선구자적인 서술을 미숙한 것으로 보이게 하였다. 또한 그의 역사서술은 고대 역사가들의 모범이 되었으며, 헤로도토스는 고대 역사학의 주류와 단절되었다.

이러한 그에 대한 평가는 민속학 및 지리학적 발견과 더불어 상당히 호전되었으며 특별히 종교적인 관점에서 강력한 호응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16세기 중에 다시금 "歷史의 父"라는 명성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종교적 입장과는 달리 여전히 일반 사가들은 그에 대한 부정적 태도를 버리지 않고 있었는데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사회 과학적 방법이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고 동시에 초기 희랍사상에 대한 이해의 증대는 헤로도토스의 기본적 사상을 새롭게 평가하는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 결과 이제는 헤로도토스가 처했던 시대적 사조와 사회적 배경에서 이해하고자 하는 경향이 나타나게 되었다.


Ⅰ. 헤로도토스의 思想的 背景

1. 이오니아 思想의 影響과 偏頗的 感情의 表出

희랍세계에 있어 가장 초기의 역사적 성격을 띤 작품을 산출한 대부분의 저술가들이 소아시아 해안과 에게해의 섬들 출신이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이러한 사실은 희랍의 역사서술의 기원이 동방과의 접촉에서, 특히 페르시아 지배하의 영향에서 온 것이라는 암시를 던져준다.

헤로도토스의 출생지인 할리카르나수스는 그 이웃인 이오니아 도시들로부터 언어적으로 그리고 문화 전반에 걸쳐 강하게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희랍사상과 문화 발전의 중심지였던 밀레토스를 바로 이웃한 할리카르나수스에 새로운 진보적 사상과 논리적 탐구경향이 미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러한 영향을 수용한 인물이 헤로도토스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역사서술을 시작함에 있어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인물이 헤카타이오스였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희랍철학과 과학의 근원인 이오니아 정신의 특색은 현세적이며 합리적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이오니아로부터 막대한 혜택과 영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저술 도처에서 反이오니아적인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것을 통해 이오니아에 대한 그의 자료들의 중요한 출처는 그가 상당 기간동안 머물렀던 사모스라고 생각되며 이오니아의 일원인 사모스는 헤로도토스가 이오니아를 이해하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오니아 반란시에 불투명한 태도를 취했던 사모스는 이오니아인들, 특히 밀레토스와 소원한 관계에 있었으며 사모스인들은 그 반란의 실패를 이오니아인들의 잘못으로 돌리려 하였다. 그러므로 사모스에서의 영향이 反이오니아적인 요소를 서술하게 하였다. 그리고, 한가지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가 탐구여행을 사모스를 중심으로 시작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의 이오니아 선구자인 헤카타이오스와는 확실히 다른 저작을 산출해내는 결과를 가져왔다.


2. 아테네와 투리이에서의 思想的 交流

그의 생애의 후반기에 있어 중심적인 두 거류지는 아테네와 투리이였으며 이 두 지역은 그의 {歷史}를 저술하는 데 중요한 관계를 가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헤로도토스의 사상과 그의 저술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아테네는 그 당시 이미 희랍 세계에 있어 다른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지적인 면에서도 탁월한 위치를 확립하였으며, 모든 지역으모부터 수많은 사상가들이 모여들었다.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가 역사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것은 바로 이러한 분위기에서 이루어진 5세기의 지적 혁명에 그 뿌리를 둔 것이다. 헤로도토스는 여기서 비극 작가들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는데, 우리는 그의 글에서 비극 작가 소포클레스의 도덕, 종교, 정치적인 감정을 느낄수 있다. 그러나 그가 {歷史}를 저술하는데 직접적인 자극을 준 것은 비극의 선구자인 아이스퀼로스의 희곡 「페르시아인들」이다. 여기서 자극받아 그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보다 합리적인 탐구를 통해 {歷史}를 썼다.

헤로도토스가 아테네를 떠나 투리이 식민지로 가게된 이유로는 아테네 이민정책 때문이라 하겠다. 그는 여기서 피타고라스 학파의 뛰어난 인물 중 하나인 엠페도클레스를 만나 상당한 영향을 받게된다. 그럼 다음 장에서 저술 내용에서 그가 받은 사상적 영향들을 알아보자.

 

Ⅱ.헤로도토스의 思想에 나타나는 兩面性

1. 傳統과 革新의 葛藤

헤로도토스의 {歷史}를 읽으면 그의 사상이 일관성이 없이 매우 복잡하고 여기저기에서 모순성을 드러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헤로도토스의 저작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신과 인간의 관계를 해석하고 설명한 종교사상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저술을 전반적으로 볼 때 그의 종교관은 전혀 일관성이 없으며 서로 모순되는 몇 가지 사상들이 공존하고 있어서 헤로도토스 자신도 여러 사상에서 방황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여러 사상의 흡수와 함께 이오니아에서는 새로운 역사적 문학활동이 발생했는데, 그것은 소위 산문작가로 알려진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대표적 인물로 헤카타이오스가 있는데 헤로도토스는 그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게 된다. 그는 영웅시대와 역사 시대를 구분하는 획기적인 기여를 하였는데 헤로도토스가 신화시대의 역사를 배제한 것은 헤카타이오스의 직접적인 영향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글에서 여전히 수많은 신화적 요소들이 남아 있는데 이것은 그가 전통적인 종교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저작 후반부에 나타나는 중요한 변화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때부터 차츰 범신론적 내지는 일신론적 신성으로 들어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러한 경향은 새로운 종교사상의 발전으로 이탈리아 학파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2. 神話的 要素의 限界

헤로도토스의 저작 내용 중 인간의 활동에 대한 신의 개입을 가장 극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솔론(solon)과 크로이소스(croesos), 폴리크라테스와 되찾은 반지, 크세르크세스의 참모회의와 꿈의 지시에 관한 서술들을 들 수 있는데 그는 이러한 이야기들을 호머와 동일한 관점에서 인간의 번영과 오만에 대한 신의 질투로써 설명하고 있고 이러한 사실은 그가 여전히 신화적인 전통에서 벗어나지 모사하였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 외에도 역사적 사건과 신화적 요소를 결합시킨 것이 도처에 나타나고 있다. 헤로도토스가 그의 저작 가운데 그렇게 많은 신화적 요소들을 포함시킨 이유는 몇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그가 그의 독자 혹은 청중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는 독자들의 흥미와 관심을 획득하기 위해 그들의 관점에서 기술했다고 할 수 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그가 사용할 수 있었던 자료들의 대부분은 구전에 의한 것으로 신화적 색채를 띤 것이 대부분이었다. 또 특별히 그에게 다량의 자료를 제공한 공급원인 델피 신전에는 수많은 신화들이 보존되어 있었으며, 헤로도토스는 그것들 중 상당수를 그의 자료로 사용하고 있다. 물론 헤로도토스는 신화적 요소로 가득찬 그 자료들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한 합리화시키고 역사적 기숭의 틀에 맞추었던 것이다. 그러나 본래의 신화적 성격을 완전히 배제시킬 수는 없었다.

3. 科學的 精神의 適用과 그 限界

헤로도토스의 저작에는 순수한 과학적 요소는 아니지만 이전의 저술가들에 비해 고도의 비판정신이 있었음을 보게 된다. 헤로도토스에게 영향을 미친 이오니아의 과학정신은 어떤 노모스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연 앞에서 사상과 행동에 있어 자유를 향유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정신으로부터 이오니아인들은 신화에 대한 회의주의와 탐구적인 방법을 발전시켰다. 신화에 대한 회의주의는 이오니아들로 하여금 우주의 원리를 탐구케 하고 역사서술이 아니라 형이상학으로 향하게 했다. 반면에 헤로도토스는 그러한 정신을 역사적인 서술을 창안하는데 도입하므로 그의 저작은 인간적이고 세속적이며 정치적인 요소들을 중요한 내용으로 갖추게 되었다.

반면에 기원전 6~5세기에 종교와 신화로부터 끊임 없이 이탈해가는 이러한 사조와는 대조적으로 생생한 종교적 신앙에 의해 계속하여 고취되는 신비적 전통이 있었는데 이오니아의 과학적 사상의 영향을 보여주는 헤로도토스에게서 우리는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종교적 경향이 뚜렷하게 드러남을 보게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기원전 5세기 중엽의 급변하는 희랍의 사상적 환경 가운에 그가 어떠한 위치에 서 있었는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는 과거의 전통적인 입장을 그대로 고수하는 보수주의자가 아니었던 반면에, 철저한 혁신의 첨단에 서는 급진적 진보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는 호머적인 신화적 전통으로부터 지적 혁명의 새로운 시대로 전환하는 중간에 처한 과도기적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에게서 전통적 요소와 혁신적 요소가 존재하는 양면성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가 과도기적 위치에만 머무를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역사서술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기 위해 나름대로의 사상적 변화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그의 독립성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Ⅲ. 歷史에 대한 헤로도토스의 理解

1.宗敎에 대한 새로운 解釋- 神의 攝理요 人間의 自由精神

헤로도토스의 글을 읽으면 적어도 그는 두 가지 수준에서 종교를 다루고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즉 그는 자신의 사상에 입각해 신을 半추상적인 "신적 존재"로 합리화시킨다. 그러면서도 그는 개체적 신들의 작용과 관습들을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종교는 하나의 통일되고 추상화된 신적 세력과 제한되기는 하였지만 전통적인 관념이 복합된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양상을 띠고 나타난다. 이러한 그의 종교적 사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시대를 지배했던 희랍 종교사상의 흐름을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 과학적 정신이 이오니아인에 의해 시작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그것이 호머적인 신앙을 형성한 바로 그 민족 가운데서 이루어진 것은 주목할 일이다. 이오니아 철학자들은 초기에 세계의 활동을 설명할 수 있는 본질적인 것을 구하였는데 실제에 있어서 그들은 종교적인 언어를 피하고 그들 시대의 神人同形論的인 관념을 완전히 버렸던 반면에 여전히 그들은 근원적 본질에 "神" 혹은 "神的"이라는 이름을 적용시켰다.

또한 이오니아 철학은 종교로부터 신과 영혼이라는 개념들 외에 자연의 질서라는 지배적인 개념을 물려 받았는데 그것은 운명 혹은 법의 통치라는 개념으로 해석되었다. 헤로도토스에게서 필연성으로서의 운명 또는 법이라는 개념이 발견됨은 바로 이러한 전통의 영향아래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또 그에게 더욱 강력한 영향을 미친 또 다른 사상의 주류가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올림피아 諸神에 대한 신앙의 바탕에서 이오니아의 과학정신이 발전되었다면, 고대 희랍 사상 가운데 그와는 상이한 또 다른 중요한 요소가 있었는데 그것은 피타고라스로부터 연유된 신비주의 사상인 것이다. 올림피아 신학과 그 전통 가운데서 형성된 이오니아 철학에서는 모이라, 즉 필연성이 지배적 요소라면, 신비주의에서는 시간의 개념과 수가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正義가 모이라를 대신한다. 이러한 신비적 철학은 디오니시우스 종교에서 온 것이다. 이 신비 종교는 일신론적이거나 범신론적 경향을 띠게 된다.

그런데, 헤로도토스의 서술을 읽을 때 그가 때때로 다신적 개념을 묘사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종교적 내용을 다루는 부분에서는 대체로 일신론적 경향을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상은 분명코 피타고라스 계통의 신비주의 사상에서 주장하는 일신론적 경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같이 헤로도토스의 서술은 단순한 구조가 아니라 적어도 두 가지 평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즉 역사적 사건들에 있어 때때로 신적 요인들이 작용하는데, 징조나 신화 혹은 꿈이 개인들로 하여금 행위를 하도록 충동하거나 혹은 하지 못하도록 억제한다. 반면에 실제적인 차원에서는 전략과 정치적 고려에 의해 결정되는데, 그러한 것은 인간의 탐욕과 질투, 복수심과 야망, 정욕 혹은 매우 훌륭한 덕성에 의해 작용한다. 물론, 헤로도토스의 저작 전체를 통해 볼 때 종교적 요소가 보다 강하게 나타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나타내고자 하는 인간은 신의 의지와 목적에 무조건 굴복하는 숙명적 존재가 아니라 신에 의해 제한된 한계내에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매우 광범위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때로는 신의 개입에 대등한 입장에서 자신의 활동을 추구하고 더 나가서는 신적 존재에 의해 주어진 운명을 극복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2.「歷史」의 중심 모티브- 自由

헤카타이오스의 모방자인 동시에 경쟁자로 시작한 헤로도토스는 헤카타이오스가 고대의 설화들을 합리화한데 反하여 그의 저작의 통일된 주제를 바로 전 世代의 획기적 사건인 페르시아 전쟁에서 발견하였다. 그의 기본적인 관심은 페르시아에 대한 희랍의 승리에 있었으며 그 중에서도 민주정하에 있던 아테네가 획득한 마라톤과 살라미스승전에 그 촛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그 저변에는 보다 깊은 의의가 담겨져 있는데 거기에는 이질적인 두가지 형태의 문화 즉 헬레네와 동방 민족의 대조와 그 제도 사이의 충돌 및 신정정치(전제)와 입헌정치(민주)와의 대결, 더 나가서는 이민족의 노예화에 대한 희랍의 자유를 위한 도전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 두 세력 사이의 투쟁관게를 핵심적으로 나타내는 개념은 동방의 전제적 침략에 대한 서방의 자유의 수호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헤로도토스는 단순히 페르시아의 패배와 아테네의 승리를 기술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역사에 있어 어떤 법칙에 의해 전제적 세력이 망할수 밖에 없으며 또한 자유를 위한 희랍의 투쟁이 세계역사에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를 보여 주려한다고 할 수 있다.


結論

헤로도토스는 희랍 세계의 정신적 활동에 있어 역사의 서술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나 그가 결코 Historia의 최초의 저작자는 아니었다. 그는 그 이전의 저술가들의 영향 아래 전통적인 요소들을 계승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그것들을 종합하고 극복하여 새로운 역사서술의 기원을 이루었다. 호머와 헤시오드의 전통을 이어받은 그는 역사 가운데서 신적 개입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었으나 이오니아의 과학정신에 입각해 사물을 탐구하는 자세를 익혔다. 그는 사상사에 있어 가장 격동적인 시기로 수많은 사상들이 나온 과도기적 시기에 있었다.

매우 흥미있는 일은 헤로도토스 한 사람 안에서 그 시대의 다양한 사상들이 혼합되고 정리되어 그의 저작에 드러난다는 점이다. 그는 필요한 지식을 수용함으로 도덕과 신학, 자연과학적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지만, 세게와 인간에 대한 이해를 그가 속한 시대의 획기적 사건인 페르시아와 희랍의 투쟁에서 발견하고 그것을 그의 {歷史}로써 서술한 것이다.

일찌기 방랑생활을 한 그는 일반적으로 희랍인들이 사로 잡혀 있던 지방적 애국정신에서 탈피할 수 있었으며 따라서 그는 그 전쟁을 민족적인 정신을 넘어서 전제세력에 대한 자유의 투쟁으로 서술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헤로도토스가 단순히 역사서술을 창시하였다는 의미에서뿐 아니라 "자유를 위한 인간의 투쟁"이라는 개념을 제시한 점에서 "歷史의 父"라는 그의 위치를 새롭게 평가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용출처 : [인터넷] http://rose0.kyungpook.ac.kr/~z971554/archiv/hisgene/histg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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