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론

마키아벨리에 관한 연구는 그의 정치 사상에 집중되어 왔으며 그의 역사 사상에 대한 연구도 그의 정치 사상의 맥락에서 취급됨에 따라 일관성 없는 견해의 난립을 초래하고 있다. 본고에서는 먼저, 역사 서술의 측면에서 마키아벨리와 휴머니스트적 전통과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보고 다음으로 그의 중요 저술들을 통해 그의 역사 의식의 발전 과정을 검토할 것이다.

Ⅰ.마키아벨리의 역사 서술과 휴머니스트적 전통

A. 휴머니스트 역사 서술의 특징

역사서술은 16세기가 시작 되기 전에 이미 휴머니스트들에 의해 명확한 형태를 갖추고 있었고 그들의 역사서술 일반 원칙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첫 번째 원칙은 역사의 유용성에 관한 것으로 이것은 역사의 목적이 독자들에게 도덕적 교훈을 일깨우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두 번째 원칙은 이러한 목적을 위해 역사가는 우아한 수사적 표현을 사용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들은 이미 고전 사가들에 의해서 언급되었던 것으로써 휴머니스트 사가들은 리비우스의 예를 따라 각 역사서술을 권별로 나누었고 그 각권은 개관적 내용으로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구성은 연도별로 서술하는 연대기 형식을 취하였는데 그들의 주관심사는 정치였으며 그 중에서도 대외정책이 그들의 중요한 주제가 되었고 전쟁과 군사 행동이 특히 주목되었다. 그 외에 휴머니스트 사가들이 고전 사가들에게서 배운 또 하나의 기법은 연설의 삽입이었는데 이는 사건의 진행 뒤에 숨어 있는 심리적 동기를 해석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결론적으로 휴머니스트 사가들은 고전 사가들과 같이 역사를 거대한 교훈적 과정이라고 파악하고 이러한 교훈들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하여 고전 작가들을 모방한 여러 가지 수사적 표현 양식들을 사용하여 역사를 서술하였던 것이다.


B. {피렌체史} : 전통의 계승과 비판

마키아벨리는 그의 {피렌체사}에서 '이익과 즐거움'이라는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이 두 가지는 고전 사가들이나 휴머니스트 사가들에 있어서 역사가 지녀야 할 양면성이라 할 수 있는데 마키아벨리가 이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그가 휴머니스트 역사 서술의 2대 명제인 '교훈적 역사서술'과 '수사적 역사서술'의 전통을 따르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 서술에 있어서 마키아벨리가 그의 선임자라 할 수 있는 Bruni와 Poggio를 모방하려한 것은 사실이라 할 수있다. 하지만, 그는 양자의 서술이 피렌체의 내부적 정치갈등의 논의에 등한한 점을 비판한 것으로 보아 내용보다는 서술 양식의 면을 배운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표현 기법상의 문제에 대한 준비과정으로 그는 {카스트루치오 카스트라카니의 생애}를 서술하였으며 이 속에서 리비우스의 표현 양식을 모방한 휴머니스트적 표현 양식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그의 작품이 라틴어가 아닌 이탈리아어로 쓰였다는 사실도 휴머니스트적 규범의 패턴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이러한 휴머니스트적 규범을 단순히 그 시대의 문학적 범례로서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휴머니스트적 서술 규범은 마키아벨리에 와서는 임의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전시해 놓은 뼈대의 구실을 하였으며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전달되는 교훈의 성격을 바꾸어 놓았다. 즉, 휴머니스트 사가들은 조상들의 훌륭한 업적을 기록함으로써 후대인들이 그것을 본받게 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었으나 마키아벨리는 그러한 목적이 오히려 현실의 해악을 회피하고 제거하도록 이끈다고 비판하고 자신은 과거인들의 기만, 술책, 계략들을 기록함으로써 자유정신을 모방으로 불타게 하려는 목적을 가졌다.

따라서, 마키아벨리는 '역사는 실례를 통하여 가르친다.'는 휴머니스트적 규범을 고수했으나 그가 제시한 실례들은 정치적 제법칙의 존재와 기능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으며 그가 열거한 사건들은 이러한 법칙들을 명시화하기 위해서 정형화 되었던 것이다.


Ⅱ. 마키아벨리의 역사 의식의 발전

A. 로마史로의 종속 : {군주론}과 {리비우스 論考}

1512년 메디치가의 재집권이 이루어지면서 고초를 겪은 마키아벨리는 Sant'Andera에 은거하면서 일생 중 처음으로 사건의 참여자가 아닌 관찰자와 분석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정치 경험과 그로부터 배운 역사적 교훈 그리고, 정치의 법칙들을 체계적으로 생각해볼 여유를 갖게 되었다. 그래서, 이것을 바탕으로 {군주론}을 저술하였으며 공화주의적 성격이 농후한 모임인 'Rucellai 정원회'에 참여하면서 리비우스의 {로마사}에 대한 논고 형식으로 {리비우스 논고}를 저술하였다.

이 두 저술은 모두 정치 법칙의 도출이라는 실제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주제 사이에 긴밀한 관련성이 존재하고 있다. 즉, 양자는 모두 '영광과 위대성'을 획득하게 하는 방법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군주론}에서 발견되는 정치 법칙들은 주로 마키아벨리 자신의 정치경험에 근거한 것인 반면 {리비우스 논고}는 로마사속에서 위대함을 획득하는데 필요한 방법을 찾으려 하고 있는 차이점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로마적 고대와 자신의 경험에 근거하여 정치 법칙을 찾으려는 시도는 마키아벨리에게 자신의 경험 이전의 피렌체사에 대해서는 관심이 결여되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 점은 이 시기 그의 역사 의식의 한 특징이라 할 수 있는데 다시 말하자면 마키아벨리에게는 두 개의 역사적 시대가 있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마키아벨리에게 있어서 역사는 로마사로 대별되는 '고대(Cose antique)'와 자신의 동시대적 경험으로 대별되는 '현대(Cose moderne)'의 대립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또한 그러므로 피렌체의 과거는 무시되었고 고대와 현대를 이어줄 역사적 전망은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다.


B. 피렌체사의 자각 : {1520년 논고}와 {피렌체사}

1520년경 마키아벨리는 교황 레오 10세의 요청으로 {로렌조 사후의 피렌체 제반사에 대한 논고}를 저술한다. 이 저술에서 마키아벨리는 최초로 다가오는 피렌체 정부조직의 개편에 채택될 제도의 정확한 구조를 약술하는 문제에 처하게 되어 초기 피렌체 정권들의 강약점을 분석함으로써 자신의 의견을 펴고 있다. 즉, 그는 메디치家 이전의 피렌체에 대해 체계적인 평가를 시도하고 있으며 이러한 내용으로 미루어 그가 이 시대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저술에서 그는 정부를 집단적 세력과 구조들의 갈등이라는 좀 더 복잡한 시각으로 보려하고 있는데 이것은 주로 개인의 능력이 강조된 {군주론}이나 {리비우스 논고}에 비하여 피렌체사를 연구함으로써 얻게 된 역사적 전망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저술에서는 그 이전의 저술에서 피력하였던 인간과 세계의 동일성에 근거한 정치법칙의 발견과 적용에 관한 그의 태도가 유연하게 변하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물론, 과거의 사고를 버리지는 않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시대착오적이고 획일적인 법칙의 추출과 적용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각 시대간의 차이점을 비교 분석하고 그에 근거하여 현재의 상황에 적절한 방안을 강구하고 있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마키아벨리는 피렌체의 역사를 연구함으로써 역사의 다양성에 눈뜨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그에게 역사는 본질적인 동일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라는 점에 주의하여야 한다. 따라서 이제 그는 일견 모순적인 두 요소인 역사의 다양성과 동일성을 종합하여야 될 시점에 서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는 Giulio de'Medici의 요청에 따라 저술된 {피렌체사}에서 해결책이 나타나게 된다. 역사의식의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 저술의 중요성은 역사적 고찰의 범위가 확장되었다는 것 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한 총체적인 역사적 전망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찾아질 수 있다. 그 총체적인 역사적 전망이란 바로 역사의 순환성에 대한 인식이었다. 그리고, 이 인식으로 이전의 저술들에서 제시되었던 역사의 동일성과 다양성이 하나의 매커니즘안에 포용될 수 있게 되었고 초기 저술의 특징인 고대와 현대간의 대립을 극복하고 양자간의 역사적 연속성을 부여할 수 있게 되었다.


Ⅲ. 마키아벨리의 역사인식

A. 시대인식 : 부패와 쇠퇴의 개념

{군주론}에서 {피렌체사}에 이르는 마키아벨리의 저술에서 공통적으로 다르고 있는 주제중의 하나는 부패와 쇠퇴에 대한 개념이다. 마키아벨리가 부패와 쇠퇴의 현상에 대한 관심을 지속한 것은 그가 피렌체의 과거와 현재를 바로 부패와 쇠퇴의 시대로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에게 피렌체의 역사는 이러한 부패와 쇠퇴의 법칙에 대한 풍부한 예를 제공하는 것으로 생각되어 {피렌체사} 전편에 걸쳐 부패라는 사악한 세력이 어떻게 피렌체를 장악해서 자유를 질식사 시키고 결국에는 폭정과 치욕을 안겨주게 되었는지를 묘사하였다.

그는 자신의 저술들을 통해 부패의 원인으로 종교의 타락, 도시민들의 사치스럽고 방탕한 생활 태도 등을 들고 있으며 특히, 강조한 것은 부와 권력이 소수의 손에 집중됨으로써 야기되는 타락성과 정파간의 투쟁이었다. 물론, 그가 건설적인 대립까지도 회피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피렌체에서 발생해온 적대감은 언제나 정파간에 일어나는 것으로 보고 피렌체의 역사는 '방종의 촉진자'인 인민들과 '굴종의 촉진자'인 귀족들에 의해 '폭정'에서 '방종'사이를 방황하는 과정으로 보고 그러한 과정에서 도시와 그 자유는 산산히 부서진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정파간의 투쟁은 부에 의해서 권력이 매수될 가능성과 연관이 되어 있는데 그의 {피렌체사}에서는 이러한 분석에 대한 역사적 실례들이 가득차 있다.


B. 미래의 비젼 : 순환론적 역사관

마키아벨리가 피렌체와 이탈리아의 미래에 대해 제시한 비젼은 '역사적 순환론'이라는 가정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의 순환성은 역사의 운동성을 규정해 주는 것으로서 르네상스 시대에는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진 것이나 마키아벨리가 가진 의식은 당대인들과는 상이한 것이었다. 그는 당대인들에 비해 자신의 시대가 부패와 쇠퇴속에 있음을 더 뚜렷이 인식하였다. 이러한 의식은 도덕적 비난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지만 동시에 찬양과 비난을 넘어서서 불가피성의 요소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었다. 즉, 역사에서 고정불변의 상태는 존재하지 않고 그것은 언제나 쇠퇴하고 흥기하는 것을 반복하기 때문에 현재의 부패와 쇠퇴가 불가피한 것으로 파악된다면 미래의 새로운 부흥과 상승 역시 이러한 불가피성에 의해 예견 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부패와 쇠퇴라는 비극적 역사인식은 동시에 희망적 미래상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었다.

마키아벨리는 인간본성의 불변성이라는 신념 위에서 역사의 다양성조차도 일정한 패턴을 따른다는 순환적 역사관을 발전 시키고 있으며 이것은 그의 저술들 속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순환론의 제시가 아니라 이러한 순환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길도 제시하고 있는데 정치 체제의 면에서 본다면 그것은 로마 공화정에서 구현된 '混合政體'를 확립함으로써 그 순환을 극복할 수 있다고 하였다. 즉, 로마사의 예에서 피렌체의 쇠퇴를 극복할 예를 찾고 있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순환론적 사고를 통해 우리는 그의 세계관이 결정론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 결정론적 매커니즘은 그에게 미래에 대한 비젼을 제시해 준다. 즉, 자신의 시기를 부패의 시기로 규정한 이상, 역사의 매커니즘이 보다 결정적일수록 부흥과 상승의 비젼은 확실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결정론적인 역사 순환론 속에 인간이 예속되어 있다고 할 지라도 모든 인간적 노력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즉, 르네상스기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인 인간성에 대한 자각은 역사에 있어서도 세속화의 경향이 나타났으며 이것은 중세와 구별 짓는 중요한 특성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마키아벨리는 '세속화에 대한 과감한 실험'을 수행하였다 할 수 있는데 마키아벨리는 시민적 생활이란 초시간적 존재의 개입 없이 우연성의 차원속에서 발전된다고 생각하고 구원과 재생은 역사의 순환성이라는 거대한 매커니즘 속에서 시민 각자가 내적 자각을 가지고 그들의 시민적 virtu를 발휘할 때 비로소 도래한다고 보았다.


Ⅳ. 결 론

마키아벨리가 받아들인 휴머니스트적 역사서술 규범, 즉, 수사학적 표현을 통한 교훈의 전달이라는 측면들은 현대의 실증적인 역사학의 기준에서 볼 때 많은 결점을 안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마키아벨리 개인에 대한 비판이라기 보다는 휴머니스트 史家 전체에 대한 비판이라 할 수 있고 휴머니스트들의 역사 서술 목적이 무엇이었나 하는 관점에서 볼때에는 이 비판 자체도 문제점을 안고 있다. 즉, 그들은 역사에 있어서 정확성의 추구라는 측면을 무시했던 것이 아니라 그것보다 교훈의 전달이라는 측면을 더 중시했던 것이다. 그리고, 수사학적 표현이라는 문제에 대해서도 '修辭'라는 것이 사실적 정확성과 양립하는 궤변이나 미사여구의 나열이 아니라 '지혜와 표현양식의 조화로운 종합'이고 그 목적은 인간을 미덕과 가치 있는 목표로 인도하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르네상스기의 사가들이 이것을 중시한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닐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피렌체사}를 서술함에 있어서 브루니와 포지오가 국내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음을 비판하였는데 이것은 휴머니즘 이후의 사가들에게 휴머니즘 사학을 비판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출처http://rose0.knu.ac.kr/~z971554/archiv/hisgene/histgra/mach.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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