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키호테의 우수와 자폐

 

1부에서는 주인공의 한 분신인 돈키호테의 내적 갈등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그 대표적인 예가 1  5장에 나온다   뻬드로 알론소가 똘레도 상인의 하인들에게 맞아 쓰러진 돈키호테에게 당신은 발도비노스도 아니고 아빈 다라에스도 아닌 끼하나라고 말하자 돈키호테는  나는 내가 누군지 알고있(Yo se quien soy)라고 대답한다 se의 주어와 soy의 주어가 각각 시골 양반과 돈키호테로 분리된다면 광기는 하나의 속임수와 연극이 되며 이같은 확대 해석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결국 두 주어는 하나의 인식론적 주체로 통합되며 주체의 내면적 갈등은 보이지 않는다   우나무노는 돈키호테의 산초의 삶 에서 이 문장을  나는 내가 무엇이 되고 싶어 하는지 알고 있다 (Yo se quien quiero ser)로 해석하며   의 정체성과 의지를 분리시키고 정체성이 의지에 종속된다고 파악한다      그러나 이보다는 환상을 꿈꾸던 주체가 스스로 환상이 된다는 해석이 더 적절해 보인다      그 실체가 무엇인가에 대한 해석은 여전히 문제로 남지만 정체성과 의지는 종속 관계가 아니라 통합 관계에 있으며 1부에서는 아직 그것들 사이의 분리 징후를 찾을 수 없다   그것의 분리는  2부에서 암묵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며 그것의 완전한 분리가 바로 돈키호테에서 알론소 끼하노로의 각성이다 1부에서 돈키호테가 광기 환상  거짓의 세계에 있고 다른 인물들이 그 반대에 있다면 2부에서는 관계가 역전된다   다시 말하면 1부에서는 돈키호테가 들판 위에 서 있는 물체를 거인으로 보았고 다른 사람들은 풍차로 보았다면   2 부에서는 돈키호테의 눈에 풍차로 보이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거인이라고 그에게 강요한다   산손 까라스꼬는 세 번째 출정을 떠나라고 돈키호테를 꼬드기고   산초는 촌스런 농촌 여자를 둘씨네아라고 속인다  특히 공작의 궁정에서의 사건들은 거의 모든 주변 인물들이 돈키호테를 속이고 있는   그러나 연출자의 의도대로 진행되지 않는 거대한 연극이다   돈키호테의 우수와 자폐는 바로 이 연극성에서 발아한다   자신의 의지에 의해 형성된 세계가 연극화되면서 조금씩 존재 기반이 허물어져 가고   이를 깨달은 주인공은 그 세계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할 수 없다고 인식해 간다   연극화 혹은 연극성에 대한 인식은 갑작스런 깨달음이 아니라  2부 전체 동안 조용히 진행되고 있다   진실이라고 믿어왔던 삶이 연극으로 변하면서 돈키호테의 존재 기반은 모호해지고 연극 밖의 세계와 유리되면서 결국 우수에 빠지고 만다   따라서 마법에 걸린 둘씨네아를 구원할 수 없다는 절망이 우수와 자폐를 낳았다는 해석은 피상적이다   절망이 우수와 자폐를 낳았다면 절망은  273 장에서 마을로 들어오면서 만난 징조를 통해 가시화된다   그런데 바로 전날 밤 산초의 매질이 끝나 둘씨네아가 마법에서 풀려났을 것이라 알고 있고 마을로 돌아오기까지 길에서 마법이 풀린 그녀를 만나게 되길 기대했던 돈키호테는 일상적인 사건을 절망의 징조로 받아들일만한 이유가 없다   일상적인 사건이 절망의 징조가 된 것은 돈키호테의 각성만큼이나 급작스런 사건이며 각성과 죽음의 출발점이다   다시 말하지만 텍스트에는 절망의 이유도 없고 절망의 단초를 엿볼만한 부분도 없다   이를 위해 1 1 장으로 돌아가 보자   투구의 얼굴 가리개를 골판지로 만든 돈키호테가 얼마나 강한지 알아보기 위해 칼로 내리치자 그것은 완전히 부서진다   그러자 그는 쇠를 안에 덧대어 다시 만든 뒤 이번에는 시험하지 않고 그것을 세상에서 가장 강한 투구로 믿어버린다   의지를 통해 현실을 변형시킨 것이고 이때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낸 돈키호테의 모습에는 의지와 정체성이 하나로 합쳐져서 나타난다   1  1장의 돈키호테가 이러했다면 2  73 장의 돈키호테는 이와는 거의 다른 인물이다   산초의 매질이 끝났고 돈키호테는 둘씨네아의 마법이 풀렸다고 믿고 있다   또 불길한 징조에도 불구하고 산초는 귀뚜라미를 사고 산토끼를 주인에게 건네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키호테는 아무런 이유 없이 절망에 빠진다   이제는 그의 의지가 현실 세계를 변형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하얀 달의 기사 에게 패배했기 때문이 아니라 주인공의 정체성과 돈키호테라는 의지가 이제는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주인공이 돈키호테이고 싶은 의지가 사라진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정체성을 구현할 새로운 의지와 표상이 필요하다 

 

 

주인공의 정체성과 돈키호테의 의지 사이의 분리   돈키호테를 우수와 자폐로 이끈 절망의 징후는 공작 궁정에서의 사건 전후로 나타난다   그 촉발은 몬떼시노스 동굴의 모험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돈키호테가 그 안에서 보았다고 말한 내용의 진위가 아니라 그로테스크한 부조화다   미친 돈키호테가 자신의 의지로 세계를 만들고 있다면 동굴에서 일어난 사건은 당연히 기사 소설에 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그곳에는 두란다르떼의 심장이 부패하지 않도록 소금을 뿌린다거나   마법에 걸린 둘씨네아의 하녀가 치마를 담보로 6 레알을 빌리려고 하는데 그 돈이 없어서 4 레알 밖에 주지 못하는 지극히 비기사도적 현실적 인 요소가 개입되어 있다   1 부에서 돈키호테가 본 것이 거인이라면 몬떼시노스 동굴에서 본 것은 풍차처럼 보이는 거인이다   그런데 풍차처럼 보이는 거인은 실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1부의 세계가 기사도적 이상과 현실이 의지에 의해 통합되어 있다면 동굴에서 본 그로테스크한 현실은 이 두 요소의 결합이 결국 깨어질 운명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바로 여기서 마법으로 해결할 수 없는 주인공의 인식론적 혼란이 표면화된다   그리고 마법의 배 모험에서 이 혼란은 존재에 대한 회의로 이어진다   돈키호테와 산초는 호의적인 마법사가 마련해 놓은 배를 타고 악한

자에게 포로로 잡혀있는 사람들을 구하려 한다   그러나 악한 마법사의 농간으로 배가 물레방아로 돌진해 부서질 찰라 흰 가루를 뒤집어쓴 인부들이 나와 구해준다   이것이 모두 착각이기는 하지만 돈키호테는  부와는 달리 이렇게 말하면서 모험을 포기한다

 

 

나는 이제 더 이상 할 수가 없어  그리고 물레방아를 둘러보며 이렇게 소리 높여 말했다    이 감옥에 갇혀있는 그대들이여   그대들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날 용세하시게   나와 그대들의 행운이 짧아 나는 그대들을 이 고통에서 구해줄 수가 없소   이 모험은 다른 기사를 위해 예비되고 맡겨진 모양이오

 

 

까살두에로는 이 장면을 돈키호테의 운명에 있어서  첫 번째 본질적인 결말이라고 규정한다   세상의 불의를 바로잡기 위해 출정을 감행했던 편력기사가  나는 더 이상 할 수가 없다고 고백한다는 것 자체가 기사라는 표상에 대한 회의이면서 동시에 표상과 본질 사이의 균열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는 배 값으로   50 레알을 물어준다  2 26장에서 뻬드로의 인형극을 부수고 돈으로 보상할 때와는 분위기가 다르다   이전에는 멜리센드라를 구원했으나 이제는 아무도 구원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모습만 발견한다   이처럼 주인공의 자의식은 비록 섬광처럼 매우 짧게 발현되지만 완전히 감춰져 있지는 않다

 

 

마법의 배 모험 다음에 공작의 궁정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이 이어진다 공작 궁정에 머무는 동안 돈키호테의 내면적 문제는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다  자신이 노리개라는 사실을 감지했는지 아니면 속임을 당하고만 있었는지 전혀 알 길이 없다   그런데 공작의 궁정을 나오자마자 돈키호테는 쓰디쓴 내면적 각성의 일부를 드러낸다   축제를 위해 성인이 된 기사들의 성상을 가져가는 어느 마을 사람들을 만난 그는 성상들을 보면서 편력 기사로서 자신의 존재에 대한 회의를 또 다시 드러낸다

 

형제들이여   나는 방금 본 것을 길조로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성인 기사 분들은 내가 몸 바쳐 하고 있는 일에 매진하셨기 때문인데   그 일이란 바로 무기를 들고 싸우는 것이지요   오로지 그들과 나 사이에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은 성인으로서 신성한 가치를 위해 싸웠다면   죄인된 나는 인간적인 가치를 위해 싸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하늘나라가 폭력으로 고통 받고 있었기에 그들 자신의 무공으로 하늘나라를 정복했지만   나는 이렇게 고난을 겪으면서도 내 힘으로 정복한 곳이 없습니다 

               

주인공이 편력기사라는 표상을 통해 삶의 의미를 구현하겠다는 의지가 내면적인 벽에 부딪힌 것이다   공작의 궁정을 떠난 이후 마을로 돌아오기까지 돈키호테의 모습은 사건의 주인공이라기 보다는 증인에 더 가깝다   이제 풍차를 향해 돌진하던 행복한 환상은 사라지고 무기력한 모습만 남는다   산적 로께와의 만남에서 로께가 현재화된 편력기사의 모습을 보여줄 때 돈키호테는 그 옆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그저 그의 행위를 보고 있을 뿐이다   더 중요한 사실은 바르셀로나 해변에서 흰 달의 기사로 변장한 산손 까라스꼬에게 결정적으로 패하기 이전에 돈키호테가 이미 편력기사로서의 모습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이는 알제리 해적과의 싸움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21장에서 돈키호테는 터키의 위협에 대해 편력기사 한 명이 20 만 명은 상대할 수 있기 때문에 스페인을 편력하는 여섯 명의 편력기사만 있으면 어떤 대군이라도 물리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 선언한다

 

터키 왕이 언제   얼마나 되는 병력을 이끌고 오든지 간에 나는 편력 기사로 죽어야 한다   되풀이 하지만 오로지 하나님만이 나를 아신다   

 

            

그런데 이제 자신이 말했던 상황이 실제로 벌어졌다   그는 이제 현실과 맞서 싸워야하고 편력기사다운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하지만 전투 장면에는 그의 존재 자체에 대한 언급이 없다   편력기사를 향한 그의 의지는  거의   사라졌다   마법에 걸린 둘씨네아를 구할 방법도 자신에게 달린 문제가 아니다   이제 돈키호테의 존재 이유는 거의 사라져 가고 있고 따라서 흰 달의 기사와의 결투는 그 시작 이전부터 패배가 예정되어 있었다

 

주인공의 본질적인 자아는 돈키호테라는 표상을 통해 자신의 존재 이유를 구현하려 했다   따라서 표상이 추구하는 바가 현실 세계에서 실현이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되었다할 지라도 주인공은 자신의 존재 이유를 포기하지 않는다   이 점은 결투에서 항복을 요구받았을 때 항복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했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또보소의 둘씨네아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임이고 나는 이 땅에서 가장 불행한 기사로다   나의 연약함으로 인해 이 진실이 뒤집어지는 것은 옳지 못하다      기사여   그대가 이미 내게서 명예를 빼앗아 갔으니   이제 창을 쥐고 내 목숨을 끊어나오  

               

그러나 흰 달의 기사는 그를 죽이지 않고 일년간 마을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명령한다   출정을 하지 못하면 더 이상 편력기사가 아니므로 이 명령은 돈키호테라는 이름의 편력기사에 대한 죽음의 선고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위 인용문에서  진실 이란 문자 그대로 둘씨네아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고 자신은 가장 불행한 기사라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이 돈키호테의 모습을 통해 추구했던 가치이며 자신이 이 세계에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로 해석할 수도 있다   비록 돈키호테의 연약함이 그 가치를 드러내지 못한다 할지라도   또 편력기사라는 표상을 포기한다 할지라도 진실 그 자체는 위협받지 않는다   그리고 다음 장에서 바르셀로나를 떠날 때 결투 장소를 돌아보며 이렇게 한탄한다

 

여기가 트로이였다   나의 유약함이 아니라 나의 불행이 바로 여기서 지금까지 거둔 모든 영광을 앗아가 버렸다   여기서 운명은 내게 등을 돌리고 굴러갔고 나의 무훈들은 빛을 잃었다   결국 여기서 나의 행운은 무너졌고 결코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강조된 마지막 문장에는 주인공이 앞으로 돈키호테라는 표상을 포기할 것이라는 암시가 들어있다   즉 돈키호테라는 편력기사는 이곳에서 죽었고 마을로 들어서면서 죽음을 스스로 확인한다   주인공이 자신을 편력기사의 모습으로 세상에 드러내고자 했다면 일년 동안 마을에 머물러 있다가 다시 출정하면 된다   죽음의 확인은 일년 뒤에 재출정의 가능성을 스스로 부정한 것이다   73 장의 징조와 죽음의 확인 이후에 주인공은 더 이상 돈키호테가 아니므로 돈키호테다운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일련의 각성 과정이 이제 끝이 났고 그것을 선언할 일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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