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롱드의 난

 

 1643년 루이 13세가 죽자, 프랑스는 다시 혼란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루이 13세는 유언으로 5살짜리 새 국왕이 미성년인 동안 모후 안 도트리슈에게 섭정을 맡겼으나 완전한 권리는 부여하지 않았다. 분노한 모후는 고등법원으로 달려가 유언을 파기하라고 요구했다. 법관들은 자신들의 권한을 과시할 기회라고 생각하고 유언을 파기시켜 주었다. 그들은 곧 모후가 자신들의 힘을 빌리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는 배반당했고, 모후는 리슐리외의 후계자였던 마자랭을 전적으로 신임했다.

 

섭정기가, 또한 외국인의 지배가 항상 그랬듯, 모후과 마자랭 두 외국인의 통치는 많은 어려움에 직면했다. 온갖 불평과 중상모략이 마자랭에게로 집중되었다. 리슐리외 치세 하에서 억눌려 있던 귀족들은 다시금 자신들의 권리를 찾고 싶어했고, 늘어가는 관직매매는 현 관직보유자들의 불안감을 자극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관직의 값이 떨어질까 우려하고 있었다.

 

 1648년 반란의 기미가 파리를 감쌌다. 외국인이 프랑스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 추기경이 재상이 된다는 것, 재정이 악화되고 세금이 과중하다는 것, 정부 공채가 미불 상태에 있다는 것이 파리 시민들을 지긋지긋하게 했고 당시 유럽에 감돌고 있던 혁명의 기운이 그들을 고무시켰다. 나폴리 시민들이 국왕을 제압하는데 성공했고, 영국에서도 국왕을 처형하려 하고 있었다. 대영주들과 귀부인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찾으려는 생각과 동시에 공상적인 혁명에서 낭만을 느꼈다. 그리고 사람들은 마자랭을 리슐리외만큼 무서워하지도 않았다.

 

 1648년 6월, 파리 고등 법원은 '성 루이 재판부의 명령' 이라는 일련의 개혁안을 작성했다. 이것은 군주제에 대한 고등법원의 후견권 행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당시 군대가 전선에 나가 있었기 때문에 모후와 마자랭은 양보하였으나 콩데 공(로크루아의 승리자 앙기엥 공작)이 랑스에서 에스파냐 군에게 승리를 거두자 반격을 시작했다. 8월 26일 존경받는 판사이자 항의의 주동자인 피에르 브루셀이 체포되었다. 폴 드 공디 (미래의 레 추기경)를 중심으로 하여 파리 시민들이 봉기했다. 시내에는 1200개의 바리케이드가 쳐졌고 모후의 관저인 팔레 루아이얄이 포위되었다. 사태가 긴급히 돌아가자 모후와 마자랭은 브루셀을 석방했다. 바리케이드는 걷어졌으나 소요는 가라앉지 않았다. 공디는 시민들을 더 부추겼다. 콩데 공의 군대가 파리에 접근하자 궁정은 생 제르멩 앙 레로 피난을 갔다. 피난 중에 루이 14세는 짚단 위에서 추운 밤을 보내야 했고, 이것은 그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지 않는 일이 되었다.

 

만약 프롱드 난에 참여한 이들이 합심해서 왕권을 제압하고 마자랭을 몰아내고자 했다면 그들은 성공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프롱드의 난에는 너무도 다른 집단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귀족들(사령관 엘뵈프 공작, 콩티 공, 롱그빌 공작부인, 부이용 공작, 보포르 공작, 공디, 슈브뢰즈 공작부인, 그랑 마드무아젤(가스통 도를레앙의 딸), 튀렌 장군, 라 로슈푸코 등)은 그들의 특권 탈환을 위해, 법관들은 군주제에 대한 통제권을 위해 참여했다. 그들에게 선동되긴 했지만 민중들은 그들을 신뢰하진 않았다.

 

궁정과 합세한 콩데 공의 군대가 파리를 포위하자 집단들은 분열하고 대영주들 자신도 분열했다. 튀렌이 에스파냐 군과 협상을 시도하자 애국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이를 반대했다. 공디도 이것이 카톨릭 동맹의 냄새를 풍긴다며 반대했다. 튀렌의 군대는 주인을 버렸고, 고등법원도 그의 매국적인 행동에 충격을 받고 궁정과 협상하기 시작했다. 민중은 마자랭과 협상하려는 사람은 모두 죽이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이미 사태는 모후와 마자랭 쪽으로 기울었고, 1649년 3월 11일 뤼에유에서 협정이 체결되어 궁정은 파리로 복귀했다. 이것이 제 1차 프롱드의 난이자 '고등법원의 프롱드' 라고 불리는 반란의 결말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모든 것이 끝난 게 아니었다. 할 수 없이 굴복하긴 했으되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기에 불만은 가라앉지 않았다. 두 번째 프롱드의 난의 발단은 콩데 공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콩데공은 자신이 프롱드의 난의 진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마자랭을 구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자신을 제대로 대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거만하게 굴면서 재상의 교체를 요구했다. 이 때 롱그빌 공작부인과 슈브뢰즈 공작부인이 음모를 꾸몄다. 슈브뢰즈 부인은 딸을 공디의 정부로 주면서 그와의 결속을 단단히 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일부러 마자랭에게 접근해 콩데 공을 체포하도록 선동했다. 로크루아와 랑스의 개선장군인 콩데 공은 영웅이었고 그를 체포하면 봉기가 일어날 것이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연히 일어나지 않더라도 선동하면 그렇게 될 것이었다. 마자랭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퇴각을 요구하는 콩데를 그냥 둘 수 없었다. 결국 모후와 마자랭은 1650년 1월 18일 콩데공과 그의 동생 콩티공, 그리고 매부인 롱그빌 공작을 체포하게 했다.

 

다시 소요가 일어났다. 롱그빌 공작부인과 콩데 공비가 지방에서 반란을 선동하고 주도했다. (1650년 1월∼12월) 그러나 마자랭이 이끄는 국왕군은 모든 전선을 압도했다.(1650년 10월∼12월) 이것이 왕족들의 프롱드의 난이다.

 

 하지만 마자랭의 승리는 두 프롱드를 연합시켰다.(고등법원의 프롱드와 왕족들의 프롱드, 1650년 12월∼1651년 9월) 공디와 고등법원의 법관들이 다시 소요를 일으켜 왕족들을 옹호했다. 고등법원 인사들은 1651년 2월 3일, 1648년에 기초하였던 강령을 다시 채택하였으며 마자랭의 해임과 콩데 공의 석방을 요구했다. 마자랭은 자신에 대한 적개심으로 모두가 뭉쳐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으므로 분노의 중심인 자신이 떠나면 프롱드의 인사들이 다시 분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2월 6일, 그는 콩데 공을 석방시키고 프랑스를 떠나 콜로뉴 선제후에게로 갔다. 그러나 모후와의 서신 연락을 통해 비밀리에 계속 프랑스의 재상으로 활동했다.

 

그의 예상대로 프롱드 인사들은 곧 서로 다른 목적과 의견 때문에 분열했다. 모후는 공디를 추기경으로 서임함으로써 그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였고, 롱그빌 공작부인에게 매혹되어 프롱드에 가담했던 튀렌도 모후에게 복종하게 되었다. 콩데 공은 고등법원 인사들과 다투었고, 공디를 살해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나서 1651년 9월 기옌으로 떠났다.

 

보르도에 근거를 잡은 콩데 공은 에스파냐와 손을 잡고 민중봉기를 일으켰다. 그것의 진압을 위해 마자랭은 12월 말 프랑스로 귀환하여 푸아티에에서 국왕과 모후를 알현했다. 그 때 콩데는 보르도를 떠나 파리로 진군하고 있었다. 모후와 튀렌이 이끄는 국왕군이 콩데를 뒤쫓았다. 1652년 4월 콩데는 파리로 입성했으나 7월 2일 파리의 성벽 아래에서 결정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콩데는 패배했지만 그랑 마드무아젤이 성문을 열고 바스티유의 대포들을 국왕군을 향해 쏘아대면서 엄호하여 콩데 군은 파리로 후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고등법원 인사들과 다투었고 가장 과격한 인사들에게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파리 시민들은 곧 그를 지긋지긋해 했다. 또한 에스파냐와 손을 잡고 있다는 것이 일반 시민들의 애국심을 자극했다. 시민들은 콩데 편에 총부리를 들이대기 시작했다. 1652년 7월 4일 학살이 일어나고 시청사가 불타올랐다. 마침내 콩데는 10월 13일 스페인으로 달아났다. 21일, 루이 14세와 모후는 시민들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으며 파리로 입성했다.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마자랭은 잠시 물러났으나 1653년 2월 3일 귀환하였다. 이리하여 콩데의 프롱드는 끝나고 모든 프롱드의 난은 막을 내렸다.

 

반란의 실패 이유는 단일한 원칙과 주장이 결여되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 대혁명과 비슷한 구석이 없지 않았으되 참여한 집단들의 공통된 목적은 마자랭의 실각이었을 뿐 이 이외의 이해관계는 서로 달랐고 원칙이나 이념도 없었다.

 

파리는 마자랭의 귀환 이후의 반동을 쉽게 받아들였다. 프롱드의 난이 귀족들과 고등법원에 통치 능력이 없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프롱드의 난의 결과는 종교전쟁의 결과 못지않게 프랑스를 물심양면으로 피폐하게 했고 국민들에게 절대군주제의 지속을 바라도록 하였다. 자유에 대한 불신으로, 프랑스의 질서는 회복되었다.

 

 프롱드의 난을 겪었지만 마자랭 치세의 프랑스는 유럽의 최대 강국으로 인정받았다. 그것은 리슐리외의 정책의 열매이기도 했고 마자랭의 능란한 외교술 덕택이기도 했다. 비록 백성들은 여전히 가난하고 국가재정은 피폐하였으나 프랑스의 국가위신만큼은 어느 때보다도 상승해 태양왕 지배의 기초를 닦았다. 1643년의 앙기엥 공작(콩데 공)의 로크루아에서의 승리, 1648년 그의 랑스에서의 승리, 튀렌의 1545년 뇌르틀링겐에서의 승리 등 프랑스의 빛나는 승리들은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을 가져왔다. 프랑스는 스트라스부르를 제외한 알자스를 받았고 독일에 개입할 수 있는 재량권을 가지게 되었다. 거기다가 독일은 350개 이상의 연방 국가로 분리되어 더 이상 프랑스에 위협을 가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에스파냐는 그 뒤로도 계속 프랑스와 전쟁을 계속했다. 에스파냐로 건너간 콩데 공은 프랑스의 튀렌과 대결했다. 당대 프랑스의 최고의 명장 두 사람이 서로 적대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전쟁에는 종교가 없다는 리슐리외의 신념을 이어받은 마자랭은 영국의 크롬웰과 동맹을 불사했고(덕분에 프랑스 궁정에 망명해 있던 찰스 1세의 왕비이자 프랑스 공주였던 앙리에트와 그녀의 아들 찰스 2세, 딸 앙리에트가 홀대받긴 했지만) 크롬웰의 지원을 받은 튀렌은 1658년 6월 14일 됭케르크 근처의 뒨에서 콩데를 격파했다. 에스파냐의 펠리페 4세는 협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1659년 6월 4일 피레네 조약이 체결되었다. 프랑스는 루시용, 오뜨 세르다뉴, 아르투아, 티옹빌, 몽메디를 획득했다. 카탈루냐는 에스파냐에 반환되었다. 또한 루이 14세와 에스파냐 왕녀 마리 테레즈의 결혼이 성사되었다. 당시 루이 14세는 마자랭의 질녀인 마리 만치니와 열렬한 사랑을 나누고 있었지만 마자랭의 간곡한 요청으로 루이는 마리 테레즈와 결혼하기로 했다. 마자랭은 마리 만치니를 브루아주로 보냈고, 그녀는 절망하고 분노하여 루이 14세에게 "당신은 국왕이십니다. 당신은 눈물을 흘리시지만 전 떠나갑니다!" 라는 말을 던지고 떠났다.

 

 에스파냐에는 살리카 법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자도 왕위계승권을 가지고 있었다. 따리서 에스파냐는 마리 테레즈에게 지참금 명목으로 50만 에퀴를 주는 대신에 그녀의 왕위 계승권을 없애기로 했다. 그러나 마자랭은 에스파냐가 그 돈을 마련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마리 테레즈의 왕위계승권은 유지되었고 그것은 이후의 에스파냐 왕위계승전쟁의 빌미가 되었다. 1660년 결혼식이 생 장 드 뤼즈에서 거행되었다.

 

 본인의 능력과 유능한 대신들의 도움으로 국정을 돌보고 루이 14세에게 통치술을 가르치던 마자랭은 1661년 3월 9일 사망했다. 궁정은 상을 치렀고, 루이 14세의 친정이 시작되었다. 모후 또한 얼마 지나지 않은 1666년 1월 20일에 유방암으로 숨을 거뒀다.

 

 마자랭이 사망하자 그의 아래에 있던 대신들이 모두 재상이 될 꿈을 꾸기 시작했다. 세기에, 리온, 르 텔리에, 세르비엥, 푸케, 콜베르가 유망한 후보자였다. 그러나 국왕은 재상을 두지 않고 모든 것을 스스로 통치하려 하였다. 그것은 프롱드의 난이 그에게 준 교훈이었다. 그는 고등법원과 귀족들을 믿지 않았다. 그리고 리슐리외와 마자랭 때처럼 강한 재상의 존재가 사람들에게 불만을 준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이 왕에서 시작하여 왕에서 끝나도록 만들려 했다. 장관들은 많았으되 왕족, 대귀족, 고위성직자 중에서 선택하진 않았다. 그는 부르주아 계급을 중용했고, 전국에 지사들을 파견해 관료제를 확립하려 했다. 그 과정에서 재무총감 니콜라 푸케가 해임되어 감금되고, 콜베르가 그의 자리를 대신했다.

 

 루이 14세의 시대는 위대함의 세기였다. 왕은 귀족들을 엄격한 예법을 통해 복종시켰다. 베르사유에서의 화려한 생활을 그들에게 강요하고, 왕으로부터 시작하는 엄격한 예법 절차를 통해 모든 권위가 왕에서부터 나온다는 것을 인식시켰다. 예를 들면 왕이 기침했을 때 가운을 벗기는 것, 셔츠를 들고 서 있는 것, 그 셔츠를 왕에게 건네는 것 등이 모두 예식 절차로 정해져 있었다. 귀족들은 좀 더 중요한 역할을 맡기 위해 왕에게 잘 보이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들은 촛대를 들고 있을 영광을 위해, 왕과 함께 마를리(베르사유의 궁전 중 하나)로 갈 수 있는 영광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폴리냐크 사제는 '마를리는 비에 젖지 앉는다' 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귀족들은 영지를 떠나 왕의 곁에 머물러 있어야 했고 그렇지 못한 귀족들은 연금, 특혜 등 모든 것에서 배제되었다. 「짐이 본 일이 없는 자」라는 말은 유죄선고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사치스런 궁정 생활은 막대한 경비를 소모하게 했다. 1678년 맹트농 부인은 귀족이 중간 수준의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12000 리브르의 연수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재산을 탕진해 버린 귀족들은 생활 유지를 위해 왕이 내려주는 연금을 바라보고 살았다. 종교전쟁, 모후의 반란, 프롱드의 난을 일으켰던 귀족들은 이제 그럴 수 있는 의지조차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루이 14세가 바라던 것이었다.

 그의 위대함에의 추구는 국내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54년의 치세기 동안 37년이 전쟁기였다. 사실 루이 14세가 친정을 시작했을 때 마자랭은 평화롭고 강대한 프랑스를 물려주었다. 독일은 소국으로 분리되었고, 영국은 왕정복고가 이루어져 프랑스에 망명해 있던 찰스 2세가 즉위하여 프랑스와 깊은 우호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나 왕비 마리 테레즈의 지참금 문제가 전쟁의 발단이 되었다.

 

1665년 에스파냐 왕 펠리페 4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카를로스 2세가 즉위했다. 그는 마리 테레즈의 이복동생이었다. 마리 테레즈는 앙리 4세의 딸 엘리자베스와 펠리페 4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인데, 카를로스는 그녀의 이복 동생이었다. 루이 14세는 전처의 소생에게 우선권이 있음을 주장하며 에스파냐 영토의 일부를 요구하며 에스파냐령 플랑드르로 진격했다. 왕제 필립 도를레앙의 부인인 앙리에트가 영국으로 건너가 오빠인 찰스 2세와 회담을 가져 그의 우호적인 중립을 확보했다. 위기에 몰린 네덜란드는 오렌지 공 윌리엄에게 전권을 위임하고 전쟁 체제로 돌입했으며 합스부르크 제국과 동맹을 맺어 프랑스와 전투를 벌였다. 1672년에서 1678년까지 전쟁이 지속되었는데, 1677년 찰스 2세의 질녀이자 후의 제임스 2세의 딸인 메리와 오렌지공 윌리엄의 결혼으로 찰스 2세가 네덜란드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등 여러 나라가 이 전쟁에 말려들었다. 1778년 나이메헨 조약으로 프랑스는 프랑슈 콩테와 발랑시엔, 모뵈주, 생 토메르, 카셀 등을 영유하게 되었고, 네덜란드는 영토를 고스란히 유지했으나 가장 약했던 에스파냐가 많은 손해를 보았다. 이 전쟁으로 명장 튀렌이 사망했다.

 

그러나 루이 14세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조약의 불명확성을 이용해 근처의 영토를 병합했다. 1681년 9월 스트라스부르가 병합되었다. 이러한 루이 14세의 합병정책은 유럽의 국가들을 불안하게 하였다. 1683년과 1684년 프랑스는 에스파냐와 전쟁을 치렀다. 그러나 약화된 에스파냐는 프랑스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프랑스 군은 룩셈부르크를 점령하고 에스파냐의 동맹인 제노바를 포격했다. 전쟁이 전 유럽으로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독일의 제후들이 중재해 1684년 레겐스부르크의 휴전 조약이 맺어졌다. 프랑스의 국력은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그만큼 적은 늘어났고, 프랑스의 확대를 우려한 다른 유럽국가들이 결집하는 계기가 되었다. 1685년 팔츠(팔라틴) 선제후 칼의 사망 후 팔라틴 공국의 계승자가 끊어지자 루이 14세는 칼의 동생이자 왕제 필립 도를레앙의 아내인 팔라틴 공녀를 내세워 그 영토를 요구하였는데 그러한 프랑스의 확장을 막고 나이메헨 조약의 준수를 요구하기 위해 스웨덴, 네덜란드, 독일의 제후들, 신성로마제국 황제, 에스파냐, 바이에른, 작센, 사부아가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을 맺었다. 또한 1688년 오렌지 공 윌리엄이 영국의 왕이 되어 영국도 적대세력으로 돌아섰다. 전 유럽이 프랑스에 대항한 동맹을 맺은 셈이었다.

 1688년 9월에, 1697년까지 이어질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전쟁(팔츠 계승전쟁)이 시작되었다. 루이 14세는 루부아의 강력한 진언으로 알자스를 보호하기 위해 팔라틴을 완전히 파괴했다. 전쟁은 유럽 뿐만 아니라 식민지에서도 전개되었다. 캐나다에서 영국인들과 프랑스 인들 간에 싸움이 벌어졌다. 프랑스 군은 바다를 제외하고는 도처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과거와 같은 전격전의 시대는 갔고, 9년에 걸친 장기간의 전쟁으로 양편 모두 지쳐있었다. 결국 강화를 하기로 하고 루이 14세는 승자로서 라이스바이크 조약을 맺었다. 그는 윌리엄 3세(오렌지 공 윌리엄)를 영국왕으로 승인하고, 네이메헨 이후 획득한 토지는 반환하며, 에스파냐령 플랑드르의 주요 요새의 관리를 네덜란드 군에게 맡기고, 로렌을 로렌 공에게 반환한다는 것에 서명했다. 그러나 스트라스부르는 프랑스에 남았다. 루이가 많은 양보를 한 이유는 에스파냐 왕 카를로스 2세의 건강이 악화되어 곧 왕위 계승이 이루어 질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마리 테레즈의 계승권 문제가 불거질 것이었다.

 아우스크부르크 동맹전쟁은 그동안의 영국과의 우호관계를 깨고 이른바 제 2차 백년전쟁으로 불릴 두 국가의 대결의 서막을 열었다.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전쟁·에스파냐 왕위계승 전쟁·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7년 전쟁·미국독립전쟁 ·프랑스혁명전쟁 ·나폴레옹 전쟁까지, 두 나라의 대립은 계속된다.

루이 14세의 예상대로 1700년 에스파냐의 카를로스 2세가 후사없이 사망했다. 가장 가까운 상속자로는 마리 테레즈의 자손들, 신성로마제국 황제 레오폴트의 둘째 아들인 카를 대공, 그리고 바이에른 선제후가 있었다. 식민지를 포함해 상속지가 워낙 넓었기 때문에 만약 어떤 한 국가가 에스파냐 전체를 상속받게 된다면 그것은 다른 국가들에게 심각한 위협을 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루이 14세는 영국과 협의해 분할안을 제안했으나 마침 다섯 살 난 바이에른 선제후가 죽었고, 황제 레오폴트가 이를 거부했다. 또한 에스파냐의 국민적 여론도 해체에 적대적이었다. 에스파냐의 대신들은 가까이 있는 프랑스의지지가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카를로스 2세에게 루이 14세의 손자인 앙주 공, 또는 베리 공을 후계자로 지명하는 유언서를 얻어냈다.

 

루이 14세는 영국과의 협약 때문에 망설였으나 결국 앙주 공을 에스파냐의 펠리페 5세로 즉위시키기로 결심했다. 신성로마제국 이외의 국가들은 그 자체로는 수긍하는 분위기였지만 앙주 공이 프랑스의 왕위 계승권을 유지한다는 것에 있어서는 동의할 수가 없었다. 루이 14세는 프랑스의 상인들에게 라틴 아메리카에서 네덜란드 상인들이 차지하던 지위를 그대로 차지하게 했다. 에스파냐는 프랑스의 위성국가화 되었고 신대륙 무역에서 에스파냐와 프랑스의 제휴는 영국과 네덜란드에게 위협이 되었다. 따라서 영국과 네덜란드, 신성로마제국은 헤이그에서 대동맹을 결성하였고 다른 나라들도 속속 참여했다.

개전 초에는 프랑스군이 우세하였으나 오스트리아군의 오이겐 공이 이탈리아 전선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한 후 1704년 오이겐 공과 영국의 말버러가 블렌하임 전투에서 프랑스·바이에른연합군을 격파함으로써 전국을 전환시켰다. 이베리아반도에 상륙한 오스트리아의 칼 대공의 군대도 1706년 마드리드에 입성하였다. 더욱 오이겐과 말버러는 이 해에 각각 이탈리아와 네덜란드에서 승리하였고 1708년에는 오드나르드 전투에서 프랑스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한편, 해상에서도 영국·네덜란드 함대는 포르투갈 연해에서 프랑스·에스파냐 함대를 격파하고 지브롤터를 점령하였다. 동맹군의 우세를 보게 된 루이 14세도 강화를 결의하였으나 동맹군은 펠리페 5세를 왕좌에서 축출하라는 등 너무나 무리한 조건을 내걸어 타협을 결렬시키고 오히려 프랑스의 국민적 분발을 일으켰다. 프랑스 인들은 동맹국의 무리한 요구에 자신들의 국왕의 자존심을 지켜주어야겠다는 생각으로 희생을 감수하고 거국적인 단결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후 1709년 9월 빌라르가 모뵈주에서 동맹군에게 큰 손실을 입히고, 방돔 공작이 에스파냐의 빌라비쵸사에서 동맹군을 격파했으며, 바다에서 뒤게 트루앵이 역시 동맹군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프랑스가 수세인 것은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1711년 영국에서 휘그당 내각에 대신하여 토리당 내각이 구성되고, 오스트리아에서는 요제프 1세가 죽고 칼 대공이 칼 6세로 즉위했다. 이렇게 되자 영국은 전쟁을 할 이유가 없어졌다. 칼 6세가 에스파냐의 왕이 되면 합스부르크 가의 거대한 세력을 키워주는 격이 되기 때문이다. 1712년 결정적으로 빌라르가 1712년 에우제니오 공을 드냉에서 격파함으로써 파리를 지켜냈다.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의 체결이 성립되었다. 그 후에도 오스트리아는 전쟁을 계속하였으나 그것도 이듬해 라슈타트 조약으로 끝을 맺었다. 프랑스는 벨기에(에스파냐령 플랑드르)에서 완전히 축출되고 아메리카 식민지의 많은 부분을 상실했다. 또한 식민지 무역상의 많은 특혜도 영국에게 양보해야했다. 하지만 프랑스는 영토의 기본을 지켜냈고, 프랑스의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기는 했지만 펠리페 5세의 에스파냐 왕위도 지켜냈다. 그러나 프랑스의 패권은 막을 내렸고, 이 때부터 영국의 패권시대가 개막되었다.

 

루이 14세 시대의 경제 상황은 뒤로 갈수록 나빠졌다. 초기에는 유능한 재무총감 콜베르의 노력으로(세제 개혁, 상업과 매뉴팩쳐 장려, 해외 진출 등) 재정이 건전화되었으나 루이 14세의 무리한 전쟁과 베르사유 건축에는 막대한 비용이 들었다. 1680년대부터 적자와 공채가 위험스러운 수준으로 늘어났다. 관직 매매는 극에 달했고 조세는 거두기도 전에 탕진되었다. 거기다가 왕은 낭트칙령을 폐지하고 신교도들을 박해하기까지 했다. 1680년부터 용기병들이 신교도들의 집에 거주하면서 폭행·절도·강간 등을 일삼았고 1685년 10월 18일 결국 낭트칙령이 폐지되었다. 국왕은 위그노들이 프랑스를 떠나는 것을 금지했으나 종교의 자유를 잃은 위그노 들은 필사적으로 탈출했고 가장 부유한 17만∼20만 명의 위그노들이 망명에 성공했다. 이것은 프랑스의 경제와 문화에 극심한 타격을 가져왔다.

 

국가의 위기에 상응하듯이, 왕가에도 잇따라 불행이 나타났다. 1711년 루이 14세의 맏아들인 왕세자가 죽었다. 1712년에는 왕세자의 아들인 부르고뉴 공작과 루이 14세가 그토록 아끼고 사랑하던 부르고뉴 공작 부인, 그리고 그들의 아들인 브르타뉴 공작이 죽었다. 1714년에 부르고뉴 공작의 동생인 베리 공작이 죽었다. 수많은 자녀를 둔 루이 14세였지만 후계자는 부르고뉴 공작의 막내아들이며 자신의 증손자인 어린 앙주 공작 하나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충치로 고생하면서도 넘치는 건강을 자랑하며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사냥을 주저하지 않던 루이 14세도 결국 다리에 온 회저병을 이기지 못하고 1715년 9월 1일 숨을 거두었다. 임종에 왕세자를 부른 루이 14세는 그에게 말했다.

「너는 위대한 국왕이 될 것이다. 너는 건물을 세우는 취미, 전쟁을 좋아하는 정신 등 나의 소행을 닮아서는 안 된다.」

생전에 전 프랑스를 짓눌렀던 그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을 환호하게 했고 루이 14세를 비방하는 수많은 팜플렛과 풍자시가 나돌았다. 왕의 추도사를 한 마시용 신부는 그의 말을 이렇게 끝맺었다.

 「형제들이여! 오직 하느님만이 위대하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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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메트리오스 2004-07-09 2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니엘 리비에르가 쓴 <프랑스인의 역사>와 비슷한 내용같아요. 아닌가?

카를 2004-07-09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처입니다.http://myhome.naver.com/loena/frame1.htm
작성한 분의 reference도 올립니다.
1. 콜린 존스,『(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케임브리지 프랑스사』, 2001
2. 앙드레 모로아, 『프랑스사』, 기린원, 1993
3. 장 카르팡티에, 『프랑스 인의 역사』, 소나무, 1991
4. 다니엘 리비에르, 『(그림으로 보는) 프랑스의 역사』, 까치, 1995
5. 서정복 역저, 『부르봉 왕조 시대의 프랑스사』, 서원, 1994
6. 알랭 드코, 『화려함의 역사 베르사유』, 한국방송출판, 2002
7. 크리스토퍼 하버트, 『메디치 가 이야기』, 생각의 나무, 2001
8. 쥘리에트 벤조니, 『왕비의 침실』, 영림 카디널, 2000
9. 안 포레 카를리에 ·자클린 리슈탱슈타인· 장 마리 브뤼종·장 프랑수아 그룰리에, 『세비녜』, 창해,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