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모의 조카
드니 디드로 지음, 황현산 옮김 / 고려대학교출판부 / 200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혁명까지는 아직 1-20년의 세월이 남았다. 혁명의 기운조차 보이지 않는 이 때에 권력자들은 프랑스가 이루어낸 온갖 부귀를 그들만의 것으로 호사하고 있다. 끼워달라는 것이 아니다. 그건 아니지 않느냐는 것이다. 인간다운 삶이란 서로를 멸시치 않고 사는 삶이 아니던가?  힘이 없다면 굴복밖에는 없나? 혹은 깐죽거리는 저항법도 있다. 깐죽거리는 것도 하나의 권력으로 만들어가는 슬픈 천재도 있지만. 볼테르...힘이 없다고 뭉개려드는 사람들과 사는 일도 힘들고, 힘있는 자와 맞서는걸 목적으로하지 바꾸려는 세상이 없는 사람들도 역겹다. 

원래의 인간다움이란 분명 전제군주하의 인간과 다르다. [예측이 가능한 인간]이 되어야만한다는 것은 인간이 아닌 형태로 살라는 것이다.그래서 라모의 조카는 [마지 못해 그리 삽니다. 서로 모른 척 합시다.]라고 한다. 이것이 전제군주하의 구겨져 맞추어진 인간이다. 라모의 조카의 입을 통해, 철학자라는 부류는 비렁뱅이 세속인과 다른 존재인가라는 물음을 던진다. 비렁뱅이 세속인인 그들은 자기를 억압하는 세상에서의 삶을 영위하려한다. 그것이 잘못인가? 결국 문화의 향유자라는 귀족과 그 반대자인 지식인의 틈새에서, 재능을 갖고 태어났으나 실현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가진 존재.  실패한 디드로 또는 다른 디드로가 바로 라모다.

이런 세상이 바뀔거라 진짜 믿는다면, 그 세상은 이 사람들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죄인도 위한 천국이어야한다. 볼테르 너는 믿지 않잖아. 새 세상을.  우리는 새 세상을 믿는가? 진짜 올 세상을 굴복도 반대로서의 권력도 아닌 죄인이 행복한 세상을. 반대를 위한 반대만 하는 자들 너희도 결국 공범이다. 너희가 새 세상을 믿지 않는 이상..  만들어진 사회 속에서 신이 없이 살아간다는 것을 인생이라고 생각한 유물론적 이해는 결국 그 권력자들에 대한 비난이었으나, 동시에 자신에 대한 근거상실이기도 하다.그들은 새 세상을 자신의 비판 속에 잃었다. 디드로는 루소와도 달리 불평등의 세상에서 기원의 추구가 아닌 지금 살림살이의 복잡다단함에 대한 동정과 끌어안음. 편가르기가 아닌 그들을 포함한 희생자를 위한 세상을 꿈꾸는 것이다. 

그 꿈이 이루기까지 어찌 살아갈까? 그렇다고 비벼대지도 못하고, 이런 것이 옳음이라고 지키면 이기는걸까? 그것이 과연 인민을 아우르는 정직한 고난의 행군인가? 결국 잘난 인간이란 없다. 하지만 고통을 준 이들에 대한 기억은 남겨두어야 한다. 힘, 조작, 떨거지, 예술을 한다는 것의 의미를 모르는 예술가들. 그들과 대비된 모습이 부정적으로 우리의 살아야하는 삶을 알게 해 주는지도 모르므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