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바르트가 읽은 주의 기도, 사도 신조   

다산글방, 2000.칼 바르트 저, 최영 옮김

류장현 Dr.the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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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 바르트(1886-1968)는 개신교와 카톨릭 교회가 다같이 인정하는 종교개혁 이후 가장 탁월한 복음주의 신학자이며 "말씀의 목회자"이다. 그는 자펜빌 시절에 블룸하르트(Chr. Blumhardt), 쿠터(H. Kutter), 라가츠(L. Ragaz)를 통하여 복음의 현실성을 깊이 깨달았을 뿐만 아니라 종교 사회주의자로서 인간의 삶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후 바르트의 신학적 사상은 위기의 신학과 변증법적 신학의 발전 과정을 거쳐서 말씀의 신학으로 집대성된다. 그의 신학적 공헌은 정통주의와 자유주의 신학, 또는 '종교적 개인주의'와 '역사적 상대주의'를 통하여 상실된 살아계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성서에서 재발견하여 복음의 토대를 다시 세웠다는데 있다. 따라서 바르트의 신학은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신학이 아니라 맘몬과 죽임의 문화의 급류 속에서 표류하는 현대 기독교에게 아직도 풍성한 신학적 영감을 준다.

   바르트의 신학은 5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한국에 소개되기 시작하였지만 그의 신학이 제대로 소개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최근에 바르트 좌파의 이론이 소개되어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기는 했지만 그의 방대한 신학 체제를 한 눈에 이해할 수 있는 저서는 아직도 없는 형편이다. 또한 평범한 사람들이 바르트의 신학에 접근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힘든 일이다. 그의 신학이 방대하고 깊기 때문이다. 그의 신학을 집대성한 "교회 교의학"만 해도 너무 크고 심오하여 전문가가 아니고는 접근하기가 매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바르트의 신학을 연구했고, 그의 저작들을 번역해 온 최영 박사에 의해서『칼 바르트가 읽은 주의 기도, 사도 신조』가 번역되어 출간된 것은 바르트의 신학을 연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또 하나의 큰 기쁨이다.

   이 책은 바르트의 두 편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작품은 '주의 기도'에 대한 해설이고, 두 번째 작품은 '사도 신조'에 대한 해설이다. 두 작품 모두 칼빈의 신앙 문답서에 따르는 주의 기도와 사도 신조에 대한 해설로서 스위스 뉘샤텔에서 목회자를 대상으로 열었던 세미나의 강의 내용을 정리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바르트는 이 책에서 옮긴이의 말처럼 종교 개혁자들의 신학적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주의 기도와 사도 신조 그리고 사도 신조에 따른 신앙 문답에 대한 개혁자들의 한계를 비판하면서 자신의 신학적 성찰을 새롭게 제시하고 있다. 그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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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의 기도'는 종교개혁의 신앙 문답서에 따르는 바르트의 기도에 대한 해설이다. 바르트는 여기서 기도에 대한 정의, 기도의 방법,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는 종교 개혁자들의 기도에 대한 신학적 해석을 받아들이면서도(P.13-15) 그 한계를 날카롭게 지적한다. 바르트에 의하면 그들은 "개인적인 기도"와 "공적인 기도," "명백한 기도"와 "암시적인 기도"의 차이를 구별하지 않았으며, 기도의 방법을 말하지 않았다(P.15.17). 따라서 바르트는 "일반적인 기도의 문제," "하나님의 은사로서의 기도," "인간의 행위로서의 기도"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기도에 관하여 새롭게 고찰한다.

   기도는 우리의 내적인 생명의 문제와 이 세상 안에 있는 우리의 외적인 생명의 문제, 즉 "삶의 절박한 요구들"(P.23)과 관련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간절한 요청이다. 기도는 "그 분께 우리에게 부족한 것-힘, 능력, 용기, 평안, 신중함-을 주시라고 요청하고, 우리가 율법을 복종하고 그의 계명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라고 요청하는 것을 의미한다"(P.21). 기도는 또한 이 요청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으로서 하나님의 "은총"이고, 하나님의 "선물"이다(P.23). 기도는 우리가 요청한 것을 얻는다는 이 확신에 근거한다(P.24). 그것의 토대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가 가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신다(P.30).

   바르트는 인간의 행위로서의 기도는 그 안에 감정이 개입되는 어떤 행위라고 정의한다. 기도는 의미 없는 잡담이나 의례적인 빈말, 입술로만 하는 중언부언이 아니다(P.31). 기도는 신앙과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도는 우리를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게 한다(P.33).

   기도의 방법과 관련해서 바르트는 '주의 기도'를 기도의 모범으로 제시한다. 예수께서 기도하는 올바른 법을 가르쳐 주기 위하여 주의 기도에서 우리에게 기도의 모범을 보여 주셨다(P.28). 주의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기도이다. 바르트는 주의 기도 앞에 세 가지 기원과 뒤에 세 가지 기원을 구별한다(P.39). 앞에 세 가지 기원은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되어 있으며, 주의 기도의 출발점으로서(P.39) 나머지 세 가지 기원의 "자유, 기쁨, 활발, 그리고 확실성"의 확고한 근거이다(P.40). 마지막 세 가지 기원은 직접적으로 '우리'와 관계가 있다. 그 기원은 "우리에게 주시고"라는 청원과 함께 시작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아버지에게 일용할 양식, 곧 "하나님의 영원한 은총에 대한 지상적인 표상"인 영적인 양식과 일상 생활에 필요한 모든 육적인 양식을 요청하며(P.66), 채무의 탕감과 악, 곧 "종말론적 유혹"으로부터의 구원을 간구한다(P.80-81).

    마지막으로 바르트는 기도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우리는 "기도할 이유가 있다!"(P.79. 86).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에게 우리의 일에 관여해 달라고 루터가 말한 것처럼 대담하게, 뻔뻔스럽게, 성가시게 기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기 때문이다(P.62).

   3

   '교회의 신앙고백'은 칼빈의 신앙요리문답서에 따르는 바르트의 사도 신조에 대한 해설이다. 바르트는 사도 신조를 크게 세 조항, 곧 아버지이신 하나님, 아들이신 그리스도, 성령과 교회로 나눈다. 그러나 그것은 삼위일체론적 구분은 아니다(P.110). 바르트는 사도 신조 전체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관련시킨다.

   첫 번째 조항은 하나님의 아버지되심, 하나님의 전능과 세상의 창조, 창조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의 개념 그리고 악이 지배하는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주권과 그것의 관계를 설명하며, 두 번째 조항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칭호의 신학적 의미, 하나님의 독생자와 우리의 주님이신 그리스도, 화육, 비하, 고양(성육신, 십자가, 부활과 승천)의 교리를 설명하며, 세 번째 조항은 성령과 교회, 죄의 용서, 몸의 부활 그리고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 설명한다. 간단히 말해서, 첫 번째 조항이 하나님 자신과 그의 창조적 활동에 대하여 말한다면, 세 번째 조항은 하나님이 성령을 통하여 인간과 함께, 인간 안에서, 인간과 관계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P.122). 두 번째 조항은 우리에게 "하나님 그 자신이 인간이다"를 말하며 첫 번째와 세 번째 조항에서 명시된 이 하나님-인간 관계의 중심점을 형성한다. 그것은 사도 신조 전체의 내용이다. 그것으로부터 첫 번째와 세 번째 조항이 해석되어야 한다. "첫 번째 조항은 단지 이 두 번째 조항의 전제일 뿐이고 세 번째 조항은 그것의 결과이다"(P.122). 이러한 해석은 바르트의 그리스도 중심론적 신학을 반영하고 있다.

   바르트는 특히 두 번째 조항에서 그리스도의 존재(또는 인격)와 사역의 동일성을 강조한다. "사도 신경에 의하면 그리스도가 누구인가 하는 것은 그의 행위를 통하여 드러난다...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삶, 죽음, 부활에 관하여 말해지는 모든 것은 단순히 그는 왕, 제사장, 성령의 예언자이심을 반복하고 설명할 뿐이다"(P.139). 예수의 존재는 그의 사역을 통해서 해석되어야 하며, 그것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르트는 어떤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독생자인가? 어떻게 그는 그리스도인가? 라는 기독론의 핵심 내용을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사건, 즉 하나님의 아들의 화육, 비하와 고양, 다시 말해서 그의 성육신,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을 통하여 설명한다. 그리고 그와 관련해서 바르트는 예수 탄생의 기적, 십자가, 부활, 승천, 다시 오심과 심판에 대하여 자세히 말한다(P.148이하). 이러한 바르트의 이해는 칼빈의 견해를 충실히 수용한 것이다(P.125-126). 우리는 바르트의 "밑으로부터의" 기독론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우리는 세 번째 조항인 성령과 교회에서 바르트의 교회주의와 성직주의에 대한 강한 비판의 소리를 듣는다. 바르트에 의하면 교회는 하나님의 승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지만 아직 영광스럽게 표명되지 않은 중간 시대에 그 존재 이유를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P.211-212). 그러므로 교회는 장차 올 하나님 나라와 그리스도의 현재적인 통치에 의해서 상대화된다(P.214). 바르트는 또한 목사는 "타오르는 검을 지닌 하나님의 천사라고 생각하지 말라!" 목사는 단지 복된 소식을 전파하도록 허락 받은 단순한 목사일 뿐이다. 목사 이외에 "다른 천사들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라!"(P.215)고 경고한다. 교회의 주도권은 사도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사도로 부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 따라서 교회의 정체는 "인간의 주도권"과 "외적인 형식"이 아니라 "주님께 순종하는 행위"와 "성서에 복종"하는데 있다(P.217-218). 그러나 바르트는 교회의 과업을 "복음의 통치"에 제한시킨다. "인간 사회를 개량하고 이런 목적을 위해 계획하거나 시도하는 것은 교회의 방침이 아니다." 교회의 과업은 "사람들을 부르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현재하심과 통치를 상기시켜 주고, 사람은 그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간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는 것이다"(P.218). 그것이 바로 바르트와 라가츠의 교회에 대한 이해의 차이이다. 우리는 여기서 쿠터의 목소리를 다시 듣는다.

   끝으로 바르트는 죄의 용서, 몸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 등 개인적(또는 인격적) 종말론의 중요한 주제들을 철저하게 기독론적으로 해석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와 관계하고 있는 인간의 삶의 모습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무관하게 죄의 용서, 몸의 부활,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말할 수 없다." 따라서 죄의 용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빛에 비추어 고찰한 인간의 생명"을, 몸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빛에 비추어 고찰한 인간의 생명"을, 그리고 영원한 생명은 "그리스도의 고양, 하나님 우편에서의 그의 통치의 빛에서 고찰한 인간의 생명"을 의미한다(P.222). 그것은 서로 구별되지만 분리되지 않는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동일한 사건의 서로 다른 표현일 뿐이다. "죄의 용서에 의해 의롭게 되고, 몸의 부활에 의해 거룩하게 된, 인간의 생명은 영원한 생명에 의해서 영화롭게 된다"(P.243). 몰트만은 이러한 바르트의 견해를 성령론적 관점에서 더욱 발전시킨다(생명의 영, P.169-243).

   4.

   위에서 언급된 바르트의 주의 기도와 사도 신조에 대한 해설은 니케아 회의(325년)에서 칼케돈 회의(451년)를 지나서 종교 개혁자들에게로 이어지는 전통적인 신학에 깊이 뿌리 박고 있으며, 또한 그 한계를 넘어선 그 자신의 독자적인 해석이다. 그러나 바르트가 이 해설서에서 적극적으로 설명하지 못한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바르트는 주의 기도의 핵심이 두 번째 기원인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지 않았으며, 또한 사도 신조에 예수의 선포와 행위의 중심 내용인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신앙 고백이 빠져 있는 이유를 지적하지 않았다. 그것은 주의 기도와 사도 신조에 대한 바르트의 '기독론적 해석'의 필연적 귀결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의 목적과 목표, 최후의 심판과 죽은 사람의 부활은 이미 성취되었다(P.51). "그것은 단지 기다려야만 하는 사건이 아니라 이미 우리 뒤에 있는 사건이다"(P.52). 또한 인간이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약속을 믿고 기도하는 일이다. 그 나라의 도래는 우리에게 기도의 대상이다"(P.50). 이러한 바르트의 신학적 입장은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Erf llung)되었지만 아직 '완성'(Vollendung)된 것이 아니라는 종말론적 성격이 문제시 된다. 그러나 성서에 의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그 나라는 이제 새로운 약속으로 완성을 향하여 하나님의 방식에 따라서 발전하고 성장한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상속자'와 '동역자'로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하여 일해야 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제자들과 공동체에게 주신 명령과 위임이다(마10:5-15. 16:18-19. 벧후3:8-13). 하나님은 그의 나라의 완성을 위하여 '인간'을 필요로 하신다.

   바르트는 또한 성령의 은사(방언, 치유 등등)의 가능성을 인정하지만, 그것이 성령의 소유를 인정하는 조건이 아님을 지적한다. 그리고 복음의 실체는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그는 복음의 실체와 성령의 은사 사이에 상호 관계를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성령의 은사가 결국 십자가와 부활에 종속된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십자가와 부활은 "빵"이고, 성령의 은사는 단지 후식으로만 먹는 "과자"일 뿐이다(P.204-205). 또한 성령의 통치는 부활과 다시 오심 사이에 있는 그리스도의 통치로 대치되며(P.203), 죄의 용서, 몸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또는 칭의, 중생)은 철저하게 십자가와 부활의 관점에서만 해석된다. 그러나 성서에 의하면 성령은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역사적 사건에 깊이 개입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우리를 위한"(f r uns) 그리고 "우리와 함께"(mit uns)하는 구속의 사건이 되게 한다. 성령은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현실화하고, 그리스도의 사역(선포와 행위)을 가능하게 하는 '대리자와 인도자'(Paraklet)이다. 그리고 성령의 은사는 십자가와 부활이 역사 속에서 빵이 되게 하는 '누룩'과 같다.

   바르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부활의 주체"와 "승리자"로 나타냈다. 그리고 그의 승리가 "우리 신앙의 토대"이다(P.177).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끄시고, 승리자로 만드신 분은 살아계신 하나님이고 우리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승리자로 만드신 바로 이 살아계신 하나님에 근거하는 것(요5:24. 8:54, 행2:32-33. 36, 롬4:24, 고후13:4, 엡1:20-21, 골2:12, 딤전4:10)이라는 증언과의 관계는 무엇인가? 이 문제는 E. 융엘이 말한 것처럼 서구 신학이 극복해야 할 과제이며, 또한 바르트의 신학이 넘어야 할 큰 장애물이다.

   5

   바르트가 이 해설서에서 적극적으로 설명하지 못한 이 문제들은 그의 다른 저작들을 통하여 해명되어야 할 과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트의 주의 기도와 사도 신조에 대한 해설은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올바른 신앙 고백이란 무엇인가? 라는 목회 현장과 신앙 생활에서 생기는 근본 문제에 명쾌하게 대답한다. 독자들은 또 이 책에서 방대한 바르트의 신학의 핵심들을 매우 쉽고, 평이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책을 깔끔하게 번역하여 소개한 최영 박사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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