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n Yoder의 평화주의 인식론의 탈현대적 함의

                                                                                                                                김기현

1. 서론
언제나 기독교 신학은 계시의 빛 아래서 하나님의 피조 세계에 일어나는 현상을 해석하고 실천하는 것을 과제로 삼는다. 신학은 우리 자신의 현대적 경험을 기독교의 경험,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해석하고 비판적인 변혁을 도모해야 한다. 지평으로서의 세상과 척도인 기독교의 메시지를 비판적으로 관련시키는 것은 신학의 고유한 과제임에 틀림없다. 지난 20세기는 전쟁과 혁명의 세기였으며 결국 폭력에 기초한 질서들의 충돌의 역사였다. 더군다나 우리의 역사 또한 전쟁과 폭력으로 점철된 역사였다는 점이다. 사회학자 김동춘의 지적처럼 아직도 우리는 한국전쟁이 개시된 날짜를 기억하고 기념하며, 그런 까닭에 전쟁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으로 이 땅에 계속 재연되고 있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 한국 교회와 사회의 긴급한 과제 중의 하나는 가깝게는 이 땅에 다시는 분단된 조국에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멀게는 우리 사회 곳곳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폭력의 메커니즘을 제거하고 성서가 말하는 정의가 살아 있고, 모든 피조물이 서로 화해와 평화를 누리게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그런데 전쟁과 폭력의 세계는 전쟁과 폭력을 정당화하는 세계관을 요구하고, 역으로 그 세계관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이 논문의 목적은 근대 철학이 폭력과 억압의 인식론이었음을 설명하고, 다음으로 평화주의는 근대 철학의 문제를 비판하는 또는 극복하는 탈현대적 함의를 지니고 있음을 보이는 것이다. 이를 평화주의의 인식론(pacifist epistemology)라고 명명할 수 있다. 평화는 단지 사회 정치적인 실천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철학적인 성찰과 신학적인 증언의 주제이다. “폭력이 힘에 관한 윤리학일 뿐만 아니라 어떻게 진리 스스로 말하도록 하는 인식론”의 문제이다. 기독교 평화주의는 사회 정치적 윤리 이론으로만 이해될 수 없고, “특정한 사유 스타일 혹은 담론의 양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기독교 평화주의는 독특한 인식론을 함축한다.”

평화주의의 인식론은 기독교 윤리와 신학을 판단하는 잣대가 될 수 있다. 요더는 전쟁은 근대 기독교 윤리를 평가하는 시금석이라고 말한다. 그의 주장을 조금만 확장하면, 전쟁과 평화의 문제는 근대와 기독교의 인식론을 평가하는 시금석이라는 명제 또한 가능하다. 전쟁에 대한 견해는 단지 윤리학의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고 윤리학 전체의 문제이다. 더 나아가 평화주의는 윤리학을 평가하는 시금석일 뿐만 아니라 신학 전체를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따라서 평화주의는 근대와 교회가 전쟁과 폭력에 관해서 모종의 일치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에 대한 반성이자 비판이다. 다시 말해서 평화주의 인식론은 근대의 인식론이 폭력의 인식론이었음을, 교회의 인식론은 전쟁과 폭력을 정당화하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폭로하고 비판한다.

2. 근대에 대한 탈현대적 비판
탈현대 철학의 지향점에 대한 다양성과 입장에 대한 찬반 여부를 떠나서, 그리고 미래의 전망에 관한 불일치가 있지만, 지난 서구의 근대 자체에 대한 비판적 반성이라는 점에서는 거의 합의를 하는 듯 하다. 강영안에 따르면 탈현대적 경향은 한편으로 과학과 이성의 맹목성에 대한 비판으로서의 객관주의 비판, 다른 한편으로 주체의 절대화에 대한 해체로서의 주관주의 비판이라는 양면성을 지닌다.

먼저 근대적 사유의 요체는 과학적 합리성에 있다. 확실한 지식은 주관적 느낌이나 관습을 배제하고 실증적으로 탐구를 통해서 획득된다. 이 탐구가 가능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모든 세계를 객관화하여야 한다. 다시 말해 신을 포함하는 모든 사물과 인간 자신을 계량 가능하고 양적 대상으로 환원되어야 한다. ‘사실’이 이론 구성의 최종적 토대가 되기 위해서는 일체의 선입견이나 편견, 세계관으로부터 따로 분리되어야 한다. 사실의 세계에 놓여 있는 것은 별 문제가 없겠지만, 소위 가치의 세계에 있는 것, 예컨대 신과 인간의 내면, 그리고 도덕의 문제는 사실의 언어로 환원되거나 아니면 헛소리로 폄하되기 일쑤였다. 그 결과 모든 존재와 그 의미는 그 고유성을 박탈당하고 필요에 따라 임의로 변경할 수 있으며 심지어는 조작 가능한 한낱 대상으로 전락된다. 기실 근대 신학은 과학적 합리성의 요구에 맞서서 자신의 존재 의의를 방어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하나님을 측정 가능한 물적 대상과 같은 방식으로 설명할 것인가? 아니면 과학적 검침이 불가능한 초월적 대상으로 설명할 것인가?

이러한 객관주의의 이면에는 주체의 지배 욕구가 자리 잡고 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연구한다는 것, 그것은 주체의 관심이나 의욕과 무관하게 대상은 그저 사물로만 존재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인간이 인식하기 위해서는 주체가 능동적으로 개입할 수 밖에 없다. 나와 무관한 대상은 능동적인 주체의 의지에 의해 재구성된다. 이렇듯 대상을 주체와 맞서는 건너편에 두는 것은 대상에 대한 주체의 지배를 성립시킨다. 대상을 주체와 분리할 때에 대상에 대한 주체의 지배가 성립된다. 주체의 지배는 대상을 주체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서 보듯이, 인식하는 주체의 틀과 기준에 맞추어 대상을 재단하는 것이다. 주체의 인식 틀에 담을 수 없는 것은 잘라서, 그리고 작은 것은 우격다짐으로라도 늘려서 집어넣는다. 인식이란 애초부터 인식할 수 있는 것만을 인식할 수 있는데, 인식할 수 없는 것은 인식할 수 있는 기호와 코드로 변경해야만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주체를 하이데거는 ‘권력 이성의 형이상학적 표현’이라고 하였다. “사유는 곧 사물을 움켜쥐고 고문하며 사물의 본질을 ‘수학적으로’ 파악하는 인간 행위는 결국 ‘자기’, ‘자아’ 위에 기초해 있고 이런 의미에서 ‘자아’ 혹은 ‘자기’는 바로 현대적 의미에서 ‘주체’라는 것이 하이데거의 데카르트 해석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하이데거는 “데카르트에서 출발한 근대 철학은 자기 증대에 사로잡힌 주체의 권력 요구의 역사로 일관되게 해석하고” 있다.

물론 우리는 강영안의 주장처럼 데카르트 이후의 철학으로 규정지을 수 있는 탈현대 철학의 주체의 죽음 선언이 말하는 주체의 의미에 대해 의문 부호를 남길 수 있다. 대상을 완전히 독점하고 지배하면서 호령하는 주체에서 타자와의 연대성 속에서 존재하는 올바른 주체 개념을 확고히 하는 것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어떤 주체의 죽음이라고 말하든 간에, 현재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주체는 무죄를 결코 주장할 수 없는 유죄이고, 사형 선고가 지나치다 하더라도 상당한 형량이 요하는 잘못을 범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보다 분명한 것은 근대 철학은 타자의 억압과 배제의 인식론에 서 있다는 사실이다.

3. 평화주의의 정의
평화주의의 기초는 기독론에 있다. “우리의 목적은 기독교 평화주의 입장이 실용적이거나 심리학적인 것이 아니라 기독론적 고찰에 뿌리를 두고 있고, 그것에 의해 사회 질서에 부적절하다는 것이 참된 사실인지를 분석하는 것이다.” 아마 존 요더의 평화주의를 가장 잘 정리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에서 밝힌 ‘메시아적 공동체의 평화주의’일 것이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평화주의가 그리스도의 주되심(Lordship)에 근거한다고 명백하게 밝힌다.

“이것이 메시아적 공동체의 평화주의라고 말하는 것은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다라는 신앙고백에 의존한다는 것을 확언하는 것이다. 예수가 메시아라고 말하는 것은 그 안에서 오실 분, 곧 하나님의 뜻이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분에 대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소망을 완성하는 분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그리고 그분의 가르침과 수난 안에서 이 평화주의는 그 뿌리를 찾을 수 있으며, 그의 부활 안에서 그 능력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평화주의는 요더의 평화주의는 “만약 예수가 그리스도가 아니라면 혹은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 아니라면 이 메시아적-공동체 입장은 와해되고 만다.” 기독교가 그리스도의 주되심은 단지 교회 내부만이 아니라 사회 역사의 현장에서도 적용하고 실천 가능한 윤리적 담론이다.

요더가 말하는 그리스도는 기독론 중에서도 십자가를 강조한다. 십자가와 그분의 대속적 죽음은 하나님께서 악을 어떻게 다루셨는가를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기독교 평화주의의 단 하나의 정당한 출발점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선으로 악을 이기시는 하나님의 방법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은 전쟁에 참여하는 것과 양립하는가? 우리는 그렇지 않다고 믿는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삶의 주(Lord)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전쟁과 폭력의 문제에 있어서도 그분의 가르침과 행위를 본받는 삶으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4. 실증주의의 거부
기독교 평화주의는 그리스도의 주되심(Lordship)에 기초를 둔다. 이는 평화의 실천은 효율성과 실용성에 근거를 두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성품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안에 신학적 기초를 두고 있는 기독교 평화주의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승리는 효율성이나 확실성이 아니라 부활을 통하여 온다. 실용성을 거부하고 신앙 고백만을 붙잡는 평화주의의 사회 전략은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고리타분하게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가장 대표적인 신학자가 바로 라인홀드 니버이다. 니버가 보기에 평화주의의 약점은 비효율적인 아가페적 사랑에 기초해서 비현실적인 참여를 한다. 그러나 요더의 대답은 십자가의 수용은 완전주의가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려는 길이다.

이러한 효율성과 실용성의 거부는 더 작은 악의 논리의 거부로 나타난다. 예컨대 더 작은 악이란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가해자에게 구타를 하는 것은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 보다는 더 작은 악이고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생각이다. 더 큰 악을 피하기 위해서 더 작은 악을 선택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더라도 불가피한 결정이라고 본다. 하지만 더 작은 악의 논리적 허점은 그 전제를 검토하면 자명해 진다. 더 작은 악의 가정은 결과를 예측할 수 있다는 것과 악을 측정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더 작은 악을 통해서 벌어지는 결과가 더 선한 결과를 낳고, 또한 그 선한 결과는 악보다 계량적으로 더 크다고 믿는다. 하지만 양자 모두 폭력이라는 점, 그리고 양자의 생명 모두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결과를 전혀 예측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선과 악을 수치화하는 것은 실증주의적 사고일 뿐이다. 무엇보다도 더 작은 악은 전쟁을 방지하기 보다는 전쟁을 옹호하는 군사주의로 함몰된 가능성이 많다.

이 논문에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더 작은 악의 논리가 결국 근대의 객관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신원하는 더 작은 악은 낙관론적이고 실증주의적 인식에 기초한다.(67) 더 작은 악의 개념은 “내가 어떤 행동을 하므로 충분히 의도된 결과를 유도할 수 있다라는 인간 중심의 결과론적인 가정과 인간사의 문제를 원인과 결과에 대한 계산에 의해 판단하여 처리해 나갈 수 있다는 낙관론적이고 실증주의적 인식에 기초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런 인식의 태도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대한 산술적인 계산에 의해 인간 사회를 공학적으로 조성해 나갈 수 있다는 다소 안이한 생각과 연결되고 있지는 않은가?” 그런 점에서 실용성에 따른 실천을 거부하는 요더의 평화주의는 탈현대적 함의를 지니고 있다.

5. 평화주의의 다양성
요더에 따르면, 지금까지 도덕적 추론에 관한 학문적 토론은 제1원리를 추구한다. 논의하는 주제의 이면이나 배후에 놓여진 가장 근본적인 첫 번째 원리를 발견하여 문제가 되는 모든 현상을 일거에 설명하려는 것이다. 특히 데카르트 이후 존재하는 모든 사물의 본질은 그 이면에 - 그곳이 개별적 사물 안이거나 밖일 수도 있다, - 존재한다는 생각이 근대인의 사유 구조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생각하는 자아를 통해서 인간의 인식의 의심할 수 없는 확고부동한 토대를 찾으려는 데카르트적 사유에서 기독교 신학 역시 자유롭지 못하다. 예컨대, 기독교 윤리학의 경우, 공리주의, 상황 윤리, 니버의 기독교 현실주의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결정과 행동의 규범을 ‘수’나 ‘상황’ 혹은 ‘중간 공리’에서 찾았다. 그리고 성서 신학에서는 역사적 비평적 방법은 성서 안에서가 아니라, 성서 이면에서 성서의 진실성과 정당성을 찾고자 하였다.

하지만 요더는 단 하나의 동일한 질서 내에 다양한 것을 환원하려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한다. 그 까닭은 첫째, 인간은 비트겐슈타인의 용어를 빌리자면 가족유사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즉 인간의 속성은 일점으로 축소하기에 다양한 내면세계를 품고 있다. 그리고 한 개인 뿐 아니라 사람들 사이 또한 다양하다. 이 다양성을 하나의 개념과 질서로 설명할 수 있다는 확신은 독선이다. 오히려 그 다름을 상호 존중과 대화를 통해서 건강하게 해결하는 것이 필요하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차이를 가진다는 것이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그러한 차이를 갈등 속에서 힘을 요구하는 것으로 증진되는 것이 아니라 화해케 하는 대화로 건전하게 처리하는 것이다.” 차이를 인정하는 것은 자신의 오류 가능성과 함께 자기 자신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말한다. 동시에 타인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인내를 요하는 것이다. 인내는 낮은 목소리, 소수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며, 폭력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대화의 상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다양한 상황에는 다양한 대답이 필요한데 특정한 한 입장이나 체계적인 대답은 오히려 왜곡의 소지가 많다. 차이를 부정하고 단일한 기초의 추구는 대화의 거부이며 타자의 거부이다.

둘째, 타자의 목소리를 억압하기 때문이다. 보다 높거나 보다 깊은 차원의 토대를 구축하려는 것은 우리 안의 서로 다를 세계를 간과한 것이다. 또한 타인에게 동의를 구하지 않고, 획일성을 강요하게 된다. 따라서 “결코 동질적인 도덕 언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다른 목소리들이 들리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보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단 하나의 방법이나 토대에 대한 향수를 포기해야 하며, 더 나아가 타인의 목소리를 존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평화주의는 타자에 대한 인식론적 폭력을 거부한다.

교회가 상대방에 대한 인식론적 폭력을 거부하는 것은 한편으로 원수 또한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내로 경청하고자 하는 타자의 목소리는 원수도 당연히 포함된다. 요더가 말하는 타자는 단지 친구만을 뜻하지 않는다. 원수 역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격체이므로 우리가 평화로 대우해야 한다. “심지어 억압자도 하나님의 형상의 담지자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담지하는 자가 된 것은 공로가 아니며, 성취도 아니며, 파악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이다. 만약 내가 내 이웃, 심지어 내 원수일지라도 동일한 관점으로 바라보는데 실패한다면, 나 스스로 그 은총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진리는 폭력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리는 비폭력적이다. Yoder는 Gandhi의 주장, 곧 비폭력은 사회적 갈등을 중지하는 실천 전략이면서도 보다 중요한 것은 대적자도 내가 진리를 발견하는 과정의 일부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나는 적대자가 내게 말하는 것을 듣기 위하여 비폭력적으로 행동해야 할 필요가 있을 뿐만 아니라, 나 또한 적대자게 말하기 위해서 비폭력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게다가 우리는 진리를 소유한 자가 아니라 진리를 고백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평화주의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이 땅에 평화를 구축하는 것은 어느 특정한 집단만의 일은 아니다. 평화를 이루는 방법상의 차이로 인해 소모적인 논쟁과 비판은 자제하는 것이 마땅하다. 요더는 기독교 평화주의가 단일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입장만을 전일적으로 옳다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가 생각하는 평화주의는 “다양하며 심지어는 서로 모순되는 관점들의 총체이다.” 그의 분류에 의하면, 평화주의는 28가지나 된다. 여기에 실용적 평화주의와 정당한 전쟁론 마저도 평화주의의 한 부분으로 다루고 있다. 이것은 평화주의가 더 상위의 관점이나 범주이기 때문은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의 경구를 빌리자면, “생각하지 말고 보라”는 비트겐슈타인의 경구를 빌리자면, 있는 그대로의 정당한 전쟁론도 평화를 만드는 한 방법론임에 틀림없다. 어느 한 입장만이 평화주의를 대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다른 평화주의를 무시하거나 배제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삼겹줄로 서로 함께 엮여지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고, 더 효과적이며, 더 실행 가능하다.”

6. 주체의 절대화와 평화주의
위에서 보았듯이 근대는 주체의 절대화를 지향하였다. 근대는 끊임없는 자기 증식의 역사이었다. 이것은 타자에 대한 주체의 인식론적 폭력이다. 주체의 절대화에 대한 반동이 해체주의의 반인간주의이다. 근대가 생각한 것처럼, 인간은 순수한 자아가 아니다. 사회 계급적 눈금으로 세계를 인식하며(마르크스), 그리고 세계를 장악하려는 권력 의지지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니체), 성적인 욕구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욕망의 포로(프로이드)에 불과하다. 인간은 세계를 조종하는 신적인 위치에 서 있지 않으며 도리어 언어, 관계 등의 그물망 안의 한 존재에 불과하다.

이러한 탈현대적 요구는 기독교의 신 중심주의와 그리 멀지 않다. 기독교는 언제나 세계와 역사를 인간 자신이 스스로 조종하려는 것을 우상 숭배에 다름 아니라고 늘 비판하였다. 인간은 역사와 세계의 주인이 아니다. 단지 소명을 위임받는 청지기이다. 평화 역시 마찬가지이다. 평화는 인간과 인간적인 수단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 받는 선물이며, 하나님 자신이 평화의 보증자이시다. 단적으로 말해서 하나님 자신이 평화이시다. 따라서 우리가 증언하려는 그리스도의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달리 국가의 권력에 의해 보증되거나 사회의 힘에 의해 최종적으로 조정되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 자신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 평화를 위한 실용적 도구로서 폭력에 호소하는 것은 예수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능력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정당한 전쟁론은 전쟁의 규범과 판단 기준을 성서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국가에게서 찾는다. 정당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합법적인 국가 권력에 의한 최후의 수단으로 벌어지는 전쟁을 정당하다고 교회가 승인하는 것은 전쟁의 문제에 있어서 주권을 하나님이 아니라 국가에게 양도하는 것이다. 이는 평화주의의 정의에서 보았듯이 그리스도의 주되심의 왜곡이자 제한이다. 기독교 평화주의는 역사를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조종할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새로운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예수는 분명 힘에 의한 승리를 거부하셨다. 군사적 무력이 아니라 죽기까지 고난 받고자 하는 사랑의 힘만이 세상을 변혁하는 교회의 유일한 힘이다.

7. 결론
이상에서 Yoder의 평화주의는 사회 윤리적 실천에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 인식론적이며, 탈현대적 함의를 지니고 있음을 보았다. 요더의 평화주의 인식론은 근대 철학이 내포한 문제점에 대한 비판이라는 것, 그리고 교회가 추구해야 할 당연한 사명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 물론 여기서 탈현대가 늘 안고 있는 상대주의의 위험에 대한 요더의 비판을 검토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의 인식론적 배경이 될 탈콘스탄틴주의에 대한 설명이 없었던 것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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