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렌초 데 메디치(Lorenzo de' Medici)

별칭은 로렌초 일 마니피코(Lorenzo il Magnifico)로서 이는 '위대한 로렌초'라는 뜻이다.

피렌체의 통치자로서 로마 시대 이래 유일하게 '국부'라는 존칭을 들은 코시모 데 메디치의 손자이기도 하다. 1449년 1월 1일 피렌체에서 출생한 그는 1469년 아버지 피에로 데 메디치가 죽자 20세의 젊은 나이에 피렌체의 통치자가 되었다.
마키아벨리는 로렌초에 대해 "그는 운명으로부터, 그리고 신으로부터 최대한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다."라고 평했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는 로렌초가 물려받은 것 자체가 다른 사람과 달랐다는 것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1. 증조부, 조부, 부친 3대에 걸쳐서 구축되고 증강된 메디치 집안의 강대한 경제력.
2. 조부와 부친 2대에 걸쳐서 구축되고 증강된 메디치에 대한 피렌체 시민의 좋은 감정.
3. 조부와 부친 2대에 걸쳐서 구축되고 증강된 메디치에 대한 다른 나라 지도자들의 경의에 입각한 신뢰감.
4. 조부와 부친의, 특히 조부 코시모의 주도면밀한 배려로 받게 된 당시 최고의 교육.
5. 어릴 때부터 완벽한 제왕 교육을 받았다.

로렌초의 조부나 부친 모두 공식적으로는 피렌체의 한 시민일 뿐이었지만 대외 관계에 있어서 메디치의 명성과 경제력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때문에 타국의 왕후들이 방문하게 되면 으레 메디치의 저택에서 유숙하였고 연회 또한 메디치 궁에서 열렸다.
대외적으로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의 실질적인 통치자로서 군림하고 있었다.

로렌초가 권좌에 오르고 난 후 로렌초는 피렌체 사람들이 즐길 수 있도록 사육제, 무도회, 마상창 시합 등 화려한 축제를 여러번 개최함으로서 자신의 독재 정치의 분위기를 완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이후 1478년까지 대체적으로 평화로운 분위기가 유지되는데 바로 1478년에 이 평화로운 분위기를 깨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이것이 파치 가문의 음모이다.
파치 가는 메디치 가문과 같은 피렌체의 은행가 가문으로서 이전까지 메디치 가문이 가지고 있던 교황청과의 사업 거래권을 잠식해 들어가고 있었다.
파치가의 음모가 발생하게 된 원인으로는

1. 파치가의 일원이 주장한 유산 상속권을 로렌초 데 메디치가 특별법을 만들어서 기각해버렸기 때문이다.
2. 피렌체 공화국에 사실상 군주로서 군림하는 메디치의 전제에 파치가 반발했기 때문이다.
3. 메디치가 오랫동안 차지해온 교황청의 재무 담당권을 파치가 가로챘기 때문이다.
4. 반메디치파로 알려진 프란체스코 살비아티를 교황 식스투스 4세가 하필이면 피렌체공화국이 병합을 노리는 피사의 대주교에 임명했기 때문이다.
5. 동생 줄리아노를 추기경에 임명해 달라는 로렌초의 부탁을 교황이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표면적으로 드러난 원인이었다.

하지만 교황과 로렌초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틀어지게 된 계기는 이탈리아 통치에 있어서 양자의 견해가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었다.
로렌초는 군사적으로 약체인 피렌체 공화국을 지키기 위해서는 이탈리아 반도의 독립과 자유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서 이탈리아 내 각국의 분쟁은 제거되어야 했다.
로렌초는 현상유지를 위해서 당시 이탈리아 각지에 존재하던 소국들을 지원해 세력의 균형을 유지하는 정책을 썼다.
그러나 당시의 교황 식스투스 4세는 못 가진 자로서 태어나 교황의 자리에 오른 사람이었다.
또한 가톨릭의 총본산인 교황청이 소재하는 이탈리아와 이해가 상반될 때에는 서슴치 않고 이탈리아를 버릴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식스투스 4세는 빈곤속에서 입신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주위에 수입을 보장해 주어야 하는 친족들이 많이 있었다.
친족들을 추기경에 임명하는 방식으로는 무리가 있었기에 그밖의 사람에게는 땅이라도 마련해 주어야 했다.
하지만 교황의 그 계획은 로렌초에 의해 번번히 실패로 돌아갔다.
이에 분노한 교황은 조카 지롤라모 리아리오와 파치 가문과 함께 로렌초를 제거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파치가문의 대표격인 인물은 반메디치의 선봉이기도 한 프란체스코 파치였다.
여기에 교황청의 용병대장인 몬테세코와 피사의 대주교인 살비아티가 참여했다.
4월 26일 부활절 미사에서 로렌초와 그의 동생인 줄리아노를 암살하고 그 사이에 살비아티 대주교가 시뇨리아(정부회의)를 장악하기로 했다.
이윽고 계획이 실행되어 줄리아노는 살해당했지만 로렌초는 무사히 살아날 수 있었다.
또한 시뇨리아를 장악하려던 계획도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암살의 공모자들은 분노한 시민들에게 사로잡혀 참살 당하거나 사로잡혀서 고문을 받고 결국 처형되었다.
줄리아노가 살해되고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던 줄리아노가 애인에게서 난 자식이 있다는 것을 안 로렌초는 그 아들을 정식으로 메디치 가문 사람으로 인정한다.
그가 훗날의 클레멘스 7세 이다.

로렌초에 대한 암살이 실패로 돌아가고 주모자들이 참살당하자 교황은 고위성직자인 살비아티 대주교가 죽은 것을 빌미 삼아 로렌초의 추방을 요구했다.
그러나 각국은 이에 대해 로렌초를 지지하는 입장을 표명했다.
당시 각국의 열강들은 로렌초의 세력균형 정책을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베네치아 공화국, 밀라노 공국, 페라라 공국, 만토바 후국 그리고 프랑스 왕 루이11세까지 줄리아노의 죽음을 애도하고 로렌초의 생존을 기뻐하며 피렌체 공화국과의 종래의 동맹관계를 재확인했다.

하지만 나폴리 왕 페란테만은 그렇지 않았는데 그것은 피렌체에 대해 전쟁을 일으킬 결심을 한 교황이 자기에게는 강력한 군사력이 없으므로 나폴리 왕의 힘을 업으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피렌체가 교황의 요구를 거부하자 교황은 자신을 지지하는 나폴리 왕 페란테와 함께 피렌체를 침공한다.
전쟁은 한참을 끌었고 피렌체는 점점 불리해져 갔다.
이윽고 로렌초는 도박을 하기로 결심하고 나폴리왕 페란테를 만나기 위해 나폴리로 향한다.
결국 이 도박은 성공해서 페란테는 로렌초와 평화 조약을 맺고 군대를 철수시키기로 결정한다.
이 때 나폴리군을 이끌고 있던 페란테 왕의 장남 칼라브리아 공 알폰소는 철수를 주저했으나 이때 로렌초에게는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
오스만 투르크 군이 이탈리아 반도 남쪽의 오틀란토에 상륙해 주민을 살육하고 이탈리아 공략을 위한 교두보를 건설하게 된다.
이에 칼라브리아 공은 황급히 군을 이끌고 남하하게 된다.
교황도 피렌체에 대한 적대 행위를 계속 할 때가 아니었다.
이후 투르크 술탄 메메트 2세의 죽음으로 투르크 군의 재침은 없게 되었지만 이 일은 이탈리아 각국에 경각심을 일깨워주게 된다.
결국 피렌체 공화국은 교황에게 한 무례한 행위를 사죄하고 사면을 받게 된다.

이로 인해 로렌초는 그의 위신을 널리 떨치게 되었다.
피렌체를 완전히 장악하게 된 로렌초는 70인 위원회를 만들었다.
위원회의 대부분은 메디치 지지 세력들로 채워졌다.
로렌초는 피렌체의 실질적인 군주와 마찬가지였지만 표면적으로는 일반 시민의 모습을 보였다.
메디치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한 지식인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확실히 그는 전제 군주였다. 그러나 쾌적한 전제 군주였다."

1484년 교황 식스투스 4세가 죽고 인노켄티우스 8세가 새로 교황의 자리에 올랐다.
로렌초는 새 교황의 조카인 프란체스케토 치보를 사위로 삼고 교황청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한다.
이로서 교황청에 대한 메디치의 영향력도 지대해지게 된다.

모든 면에서 로렌초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없는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았다.
메디치 재벌의 경제 상태와 더불어 그 자신의 건강 상태가 눈에 띄게 악화되고 있었다.
로렌초의 은행 경영 능력은 결여 되어 있었으나 그 자신은 엄청난 금액을 여기저기에 쓰거나 투자했다.
결국 로렌초 사후 메디치 가문은 7천500피오리노에 이르는 채무를 지게 되고 로렌초가 죽은지 2년 뒤인 1494년 파산하게 된다.
그의 건강 상태 역시 그리 좋지 않았다.
위가 좋지 않았던 로렌초는 죽기 전 몇 해 동안 병에 시달렸다.
결국 그는 1492년 4월 8일 43의 나이로 죽게 된다.

로렌초의 소비는 문화에 있어서 피렌체에 많은 이익을 가져다 주었다.
피렌체는 르네상스의 발상지가 되었으며 조금이라도 지적 관심을 가진 유럽인들이라면 다른 어느 곳보다도 동경하는 도시였다.
그는 미켈란젤로가 젊을 때부터 자신의 집에서 성장을 도와줬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게는 소개장을 써서 밀라노 공작에게 보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예술 작품을 주문하는데 있어서 가교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거기에다 사재를 털어서 마련해서 누구나 드나들 수 있게 했던 고대 조각을 모은 정원이나, 고대 서적과 문서를 일반에 공개한 도서관 등이 있었다.
그리고 로렌초 스스로도 이탈리아 문학사에 있어서 그 이름을 올리고 있다.
오늘날 그의 전집이 시문, 산문, 평론을 합쳐 세권이나 된다.

로렌초 사후 사보나롤라에 의해 피렌체에는 신정이 성립되고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에서 추방당하게 된다.
훗날 로렌초의 둘째 아들인 조반니가 레오 10세로서 교황의 자리에 오르면서 메디치 가문은 다시 피렌체에 복귀하게 된다.
이후 메디치 가문은 토스카나 공작 가문으로서 피렌체를 수도로 하고 토스카나 지방을 영유하는 전제 군주로서 변모하게 된다.

from  http://blog.naver.com/ellul/20002134416

[image of Lorenzo de' Medici]

워싱턴 D.C national gallery of art에 있는

Andrea del Verrocchio가 만든

Lorenzo de' Medici 의 흉상

 

: 르네상스의 수호가문인 메디치 가(家).

  그 중점에 우뚝 서 있는 인물, 로렌초 데 메디치.

  아이러니하게도 가문의 명성을 최고조로 끌어올림과 동시에,

  가문이 쇠락하는 데에 결정적인 빌미를 제공했다.

  역시 경영자로서의 자격이 부족했던 것일까.

  정치가로서의 로렌초는 초일류급이라 들었건만.

  어쩐히 씁씁한 기분을 안겨주는 인물이다. 

 

    [image of Giuliano de' Medici]

 

Andrea del Verrocchio가 만든Giuliano de' Medici 의 흉상

Lorenzo de' Medici 흉상과 같이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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