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13세기는 황제파(기벨린 당)과 교황파(겔프당)사이의 오랜 대립의 역사였다. 그들의 대립관계는 잔인하고 치명적이었다. 두 파는 번갈아가며 우선권을 획득했는데 그때마다 상대에게 무서운 형벌을 가했고 유형을 내렸다. 1260년, 얼마동안 지배권을 쥐고 있던 겔프당이 몬타페르티 전투에서 패했으나, 1266년에는 교황과 프랑스 군대의 지원을 받아 베네벤토에서 기벨린당을 물리치고 그들을 영원히 피렌체에서 쫓아버릴 수 있었다. 1265년 태어난 단테는 전후(戰後)의 긍지와 영토 확장주의의 분위기로 가득찬 도시 피렌체에서 성장했다. 당시 피렌체는 정치력 뿐 아니라 지적인 영향력도 가지고 있었다.

 

피렌체의 지적 우월권을 확보하는 데 지도적인 인물은 망명에서 돌아온 브루네토 라티니였다. 라티니는 젊은 세대 가운데 구이도 카발칸티, 포레세 도나티, 단테를 포함한 우수한 인재들에게 새로운 민중 의식을 일깨워주었고, 그들의 지식과 작가로서의 역량을 조국 피렌체를 위해 쓰라고 격려했다. 당대의 역사가 조반니 빌라니는 라티니를 [피렌체인들을 순화시키고 그들에게 좋은 화술(話術)을 가르치고 우리 공화국을 정치 철학, 즉 정치론(la politica)에 따라 지도하는 법을 가르치는 선도자이자 스승]이라고 불렀다. 라티니의 가장 중요한 저서 [보전(寶典) Les Livres du Tresor](1262~66)은 라티니가 망명시절을 프랑스에서 보냈기에 프랑스어로 씌어졌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고전 인용문의 보고였으며, 이 저서 제2권의 첫 부분에는 일찍이 라틴어가 아닌 근대 유럽 속어로 번역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의 일부가 실려 있다. 라티니는 철학·윤리학·정치학 분야의 거의 모든 논제나 주제를 다루는 데 키케로와 세네카의 작품을 자유롭게 인용하였고, 통치 문제를 다룰 때는 자주 구약성서의 잠언을 인용했는데, 라티니의 저서에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성서, 아리스토텔레스, 키케로, 세네카의 글들이 초년의 단테에게 문화적 지주가 되었다. 단테의 교양 가운데 중요한 부분이 된 라티니의 유산에서 또 하나의 로마적 요소는 영광에 대한 사랑, 즉 전력을 다해 남보다 뛰어나려는 노력을 하면서 명성을 추구하는 일이었다. 

  

1289년, 교황파(겔프)와 황제파(기벨린)가 싸울 때 24세의 단테는 기병대의 일원으로 캄파르디노전투에 참가했다. 이윽고 피렌체의 시정에 깊이 관여하게 된다. 1295년 11월에 귀족출신인 단테는 정치활동 필요상 의약업종조합(醫藥業種組合)에 가입하였으며, 포폴로(popolo)선출위원으로 가담, 12월에는 사비(원로)의 한 사람이 되었고 이듬해인 96년에는 시뇨리아 직속의 100인 위원회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그 무렵 피렌체시의 행정은 교황파중에서도 공화국의 자립정책을 내세우는 백당(白黨)과 상업상 이익에서 교황과 강하게 결탁한 흑당(黑黨)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단테는 35세인 1300년에 교황파의 동맹을 위해 사자(使者)로 산지미냐노에 갔으며 그해 여름에는 프리오레(통령)가 되었다. 그러나 흑백 양당의 싸움이 격화하였으므로 교황 보니파티우스 8세가 조정사절을 파견하여 피렌체의 내정에 간섭하려고 했기 때문에 정권을 쥐고 있었던 백당은 이를 저지할 목적으로 1301년 10월, 단테를 포함한 세 사람을 로마에 사자로 보냈다. 그러나 그 사이에 교황의 사절은 피렌체에 들어갔고, 정변이 일어나 흑당의 천하가 되었기 때문에 1302년 1월, 단테는 고국에 돌아갈 수 없는 채 공금횡령죄로 시외추방과 벌금형을 선고받았으며, 다시 3월에는 벌금을 지불하러 출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영구추방의 선고와 함께 체포되면 화형에 처하도록 결정했다. 이때부터 그의 19년의 유랑생활이 시작된다.

 

[신생](1293경)은 단테가 생전에 만든 2권의 시집 가운데 첫번째 것이며, 2번째 작품은 [향연]이다. 둘다 운문과 산문이 혼합된 작품(prosimetrum)인데, 두 작품에서 산문은 약 10년의 기간을 두고 지은 시들을 서로 연결시키기 위한 방책으로 사용되었다. [신생]은 1283년 이전부터 대략 1292~93년에 쓴 시들을 모은 것이고 그보다 더 규모가 크고 야심적인 작품 [향연]에는 1294년 직전부터 [신곡]을 쓸 때까지 쓴 가장 중요한 시들이 실려 있다.

 

초기 망명생활에 단테는 추방된 겔프 백당에 들어가 군사적 탈환을 모색하려는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선 듯하다. 그러나 이 노력은 아무 결실을 맺지 못하였음이 드러났다. 분명 단테는 피렌체의 또다른 추방자인 기벨린당원들에게 점차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고, 저술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고 귀환을 보장받기로 결심했다. 이런 상황에서 나온 것이 [향연](1304~07경)이다.

 

[향연] 제1권은 많은 부분이 감동적이며 체계적으로 속어를 옹호하는 데 씌어졌다. 단테는여기서 당시 지배계층이던 성직자들의 라틴 문화가 황혼기로 접어들고 지방 도시문학의 출현을 예고했다. 단테는 자신이 이 둘 사이에 있으며, 새롭게 참정권을 얻은 민중 독자들을 교육시키는 철학자이자 중개자라고 생각했다. 단테가 공표했던 이탈리아 문학은 곧 주도적인 문학이 되었고 이탈리아어는 유럽의 주도적인 문학어가 되었으며 이러한 위치는 3세기 이상 계속되었다. 이 저서에서 그는 처음으로 제국의 전통, 특히 로마 제국의 전통을 옹호하는 감동적인 글을 썼다. 이 글에서 그는 영혼이 신에게 귀의하게끔 도와주는 인간 고유의 욕구, 즉 '오르메'(horme)라는 중요한 개념을 도입했다. 그러나 그 욕구는 본보기와 교리를 통한 적절한 교육을 필요로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속적인 목적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잘못 인도되어 파괴력으로 사회를 분열시키게 된다. 여기에 단테는 정치 사상과 인간의 욕망에 대해 자신이 이해하는 바를 결부시켰다. 즉, 교황이 세속 권력에 대한 욕망을 가진다면 그때는 인간의 욕망을 신에게 향하도록 하는 적절한 정신적 본보기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황제의 권한이 약해진다면 그때는 사람의 의지에 물리적 제한을 가할 만한 법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단테는 이와 같은 요인이 이탈리아가 빠져들었던 혼돈을 설명해준다고 생각했고, 결국 이런 상황을 치유하려는 바램을 품고 [신곡]이라는 서사적 과업을 실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하나의 정치적 사건이 일어나 처음에는 엄청난 희망을 품게하다 나중에는 더 큰 실망에 빠져들고 말았다. 1308년 11월 룩셈부르크 백작 하인리히 공(公)이 독일 왕으로 뽑혔고, 보니파키우스의 뒤를 이은 교황 클레멘스 5세가 1309년 7월 하인리히를 로마의 왕으로 선포하고 그를 로마로 초대했다. 하인리히는 로마의 성(聖)베드로 대성당에서 신성로마제국의 왕관을 쓰게 될 예정이었다. 다시 한번 황제의 통치를 기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이탈리아를 흥분시켰으며 단테도 황제 지지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황제의 출현으로 평화가 회복되면서도 황제가 정신적으로는 종교적 권위에 예속할 것을 선언케 되리라는, 오랫동안 마음 속에 품고 있던 이상이 곧 실현되리라고 생각했다. 1310년 이탈리아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하인리히 7세의 매력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너무 오랜 시간을 북방에서 허비한 나머지 적들에게 세력을 규합할 기회를 주었던 것이다.

 

결국 클레멘스도 하인리히에게 등을 돌리고 만다. 이런 행동은 단테가 가장 위대한 논쟁서 가운데 하나인 [제정론](1313경)를 쓰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서 그는 [향연]에서 다루었던 정치적 논쟁을 확장시켰다. 클레멘스의 속임수에 격분한 분위기 속에서 단테는 그가 지닌 논쟁의 힘을 교황이 정치적 통치자보다 우월하다는 주장, 다시 말해 황권의 정치적 권위가 교황으로부터 나온다는 주장을 반대하는데 쏟았다. 단테가 지녔던 문제는 그가 비유적인 언어와 역사적 예를 들어 이야기했더라면 더 잘 옮길 수 있었을 미묘한 관계를 이론적 언어로 표현해야만 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하인리히 7세의 임무 실패에 대해 단테가 실망한 이유는 하인리히의 초기 후원자가 외관상 클레멘스 교황으로 보였고 또 그 같은 상황이 두 최고 권력가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재수립하는 데 이상적으로 보였다는 사실에 기인한 것이었다.

 

단테의 망명시절은 그 자신도 거듭 되풀이하여 말하듯이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어렵게 편력하는 시기였다. 그렇지만 단테는 추방기간 동안 시를 씀으로써 자신을 지탱할 수 있었는데, 이 위대한 서사시 [신곡]은 1308년 이전에 쓰기 시작된 듯하며 죽기 바로 전인 1321년에 끝을 맺었다. 아울러 그는 마지막 몇 년간 북부 이탈리아의 많은 귀족 저택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특히 라벤나에서 유명한 프란체스카의 조카 구이도 노벨로 다 폴렌타의 환대는 가장 두드러진 것이었다. 단테가 그곳에서 숨을 거두었을 때 당시 최고의 문필가들이 참석한 가운데 구이도 자신이 추도사를 진행한 훌륭한 장례식이 치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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