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함과 행함

자크 엘룰 지음, 양명수 옮김 / 전망사
상품평점 ★★★★★ 

 

[To Will and To Do: An Ethical Research for Christians]라는 제목으로 1964년  출간된 이 책은, 국내에는 1990년 번역되었다가 절판되었다. 1964년은 기술의 역사 (The technological society)가 영문으로 번역될 무렵으로, 이 책은 현대사회의 기술지배하에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대안이라 할 수 있는  윤리의 올바른 접근에 대해 바르트의 신학적 입장을 적용한 것이다.

엘룰은 먼저 윤리의 기원이 인간의 타락에 있음을 지적한다. 선과 악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이 아닌 자기의 기준을 제시하는 순간 타락은 발생하였다는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제시하는 인간적 이성에 의한 선과 악의 구분은 결국 심판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 이런 윤리의 결과는 자기정당성의 주장과 다른 사람에 대한 정죄이다. 에덴에서 그러했듯이... 더군다나 선과 악을 알기는 하나 스스로 그 기준을 충족시킬 능력은 없다.

선악의 기준인 윤리는 결국 타락의 질서이다. 계시가 아닌 인간규범내의 질서, 그리고 동시에 필연성의 질서이다. 필요한 것이 선이 된다. 선들은 새로 만들어지고 우선순위를 달리한다. 이것은 변화하는 가치에의 충성을 의미한다. 윤리란 항상 변하며 이것은 결국 불변하는 것과는 충돌할 수 밖에 없다. 이 두가지의 가치를 가진 자는 이 충돌을 경험한다. 그리스도인 안에서의 갈등이다. 인간의 윤리(그것이 그리스도교 윤리라 할지라도)와 하나님의 계시 사이의 충돌이다.

도덕은 그것이 특정 윤리이론에 근거를 둔 이론도덕이든(공자, 모세, 스토아, 아퀴나스, 칸트, 니체, 마르크스, 사르트르), 사회의 영향을 받은 체험적 도덕이든(그리스도교 사회, 공산주의 사회,부르조아 사회) 인간을 자기 뜻대로 자유롭거나 해방되게 하기보다 이론 자체나 사회의 틀속에 인간을 소외시킨다. 비도덕은 그렇다고 대안인가? 도덕의 탈피는 다른 도덕으로 인도하고, 결국 인간을 서로 자기정당화로 분리시키고 서로를 은폐시키기는 마찬가지다.  

지금의 현대사회는 부르조와윤리로 시작된 기술윤리가 지배하고 있다. 그 특징은 [행위에만 관심]을 갖는다는 것과(의도나 동기는 중요치 않다), 그 기준이 정상(normal)이냐, 다수에 속하느냐에 있다. 그래서  성공은 선이 되고 실패는 악이다. 이 시대는 [적응이 최대의 미덕]이며 덕은 노동과 훈련, 인내와 극기이다. 기술노동에 필요한 구조적 선이 윤리적 선의 자리를 차지한 셈이다.

엘룰은 따라서 그리스도교 윤리란 불가능하다고 한다. 결정된(defined) 선이란 존재하지 않는 그리스도인과 윤리란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그럼에도 윤리는 필요하다고 한다. 이는 신앙을 상황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이다. 이럴 때 윤리는 권고이어야 한다. 최소한의 요구이다. 또한 판단을 내세우지 않는 선한 행동이다. 이 윤리는 하나님의 뜻과 세상윤리 사이의 대립을 보여주는, 사람들 속에 나타남이다. 아무 자격이 없지만, 그리스도로 이 땅에 남겨진 사람은 사람들 속에 살며 그들을 위해 살아야하고 말해야하고 구부려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 수많은 선과 악의 기준 속에 살고 있다. 좌와 우, 노와 소, 빈과 부, 민족, 출신, 학식, 수입, 예의, 종교, 유대인인가, 흑인인가, 아랍인인가 수많은 철조망들이 바리새인과 같은 엄격한 이론으로 무장한 우리안에 살벌한  경계선을 드리우고 있다. 사랑하게 하려고, 서로 섬기게 하려고, 도와주게 하려고, 대접하게 하려고 십자가에서 나를 대신하시고, 구하여 새사람 삼으셨는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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