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을 위한 변명 한마당 글집 1
장 폴 사르트르 지음, 조영훈 옮김 / 한마당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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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는 선과 악의 구분에 있어 자본의 소유 유무에 그 기준을 둔다. 자본의 소유는 악이며 타도의 대상이고 그 이면이 까발려져야 할 허위와 착취의 근원이다. 지식 노동자들의 본래 역할이란 기껏 이런 자본의 소유를 두둔하는데 있다. 그래서 사르트르가 말하는 지식인이 회개하는 길은 계급적 전향에 있다. 자본 소유자의 계층에서 태어난 지식인은 무산자의 편에 서야만 선을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보편성의 정의는 [계급의 해체]다. 여기서의 계급이란 다만 통칭적 사회계층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자산의 소유의 양에 따른 [실존적 상황으로서의 계급의식]의 반영이다. 그래서 자기 계급을 뛰어넘어 무산자를 향하는 속죄의 길은 훨씬 험난하다. 이것은 진정한 보편성을 추구하는 자산자 출신의 지식인의 운명이다. 끝없는 자신 안의 긴장과 계급의식의 잔재를 송두리째 뽑아내고자 투쟁하는 삶이다.  

과연 무자산은 선일까? 진정한 균형은 소유는 마음대로 하게 두고 가난한 자를 돌보아주는 것인가 아니면 소유 자체를 가능치 않게 하는 모어의 유토피아인가? 이런저런 갈피잡지 못함을 사이에 가난한 사람들은 여전히 고통당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라 해도 자산을 소유한 자기계급의 정당성을 옹호하고 동료인간의 실제적 어려움을 못 본체하는 자는 선하지 못하다. 무산자라고 선한 것은 아니라는 논리로 두둔하는 것도 낯부끄럽다. 그렇다고 무산자의 편에 서고 계급이 없어지는 그날까지, 지식인의 자기정체가 붕괴되는 그날까지 자기자신을 불사른다면 비로소 선하다 할 수 있는가? 지난 한세기를 지식인은 우왕좌왕한다. 그래서 아무 일도 하지는 않았다.

지식인 역할의 한몫이 진정 자본에 대한 반작용에만 있다면 우리는 더 실제적이어야 한다. 피라미드의 상층부의 삶과 자본의 이익은 달콤하고 안락하며 요람에서 무덤까지 평안하다. 진정한 적은 중류층 지식인 내부에 있는 상층부에 대한 동경이다. 이 오르지 못할 나무를 앞에 두고 불쌍한 우리 인생은 그 아래를 어슬렁거린다. 허접한 중류 지식인이라도 나누어줄 힘이 있다면 자기가 조금 더 가진 것을 나누는 것으로 비로소 이 일은 시작된다. 남의 것으로 가져다 줄 생각을 말고 자기 것을 나눌 수 없다면 나는 또 다른 덫에 걸린셈이다. 알고도 행하지 않는 것은 모르는 것만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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