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네트시집
셰익스피어 지음, 피천득 옮김 / 샘터사 / 199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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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소네트는 셰익스피어가 서른을 바라보던 1593년부터 96년 사이에 대부분 씌여졌다고 한다. 하지만 154편으로 묶어져 출판된 것은 1609년 토마스 쏘오프에 의한 것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출판당시의 시의 순서의 배열은 이 소네트를 셰익스피어 자신의 자서전적 경험으로 보려는 의도로 담고 있다. 하지만, 이 글들이 그의 습작기에 써진 점과, 그의 개인적 경험과 일치되는 증거를 찾을 수 없는 점을 들어 도리어, 작가로서 틀을 잡던 그가 시도한 여러 형태의 시 모음 자체로 보려는 사람들도 있다.

나도 개인적으로, 이 시들을 [이상한 우정]을 나누는 남자친구와, 작가를 버리고 그 친구에게로 변심한 [얼굴 검은 여인] 사이에서 읍소하는 셰익스피어의 넋두리보다는, 개별적 시로 읽는 것이 훨씬 즐거워 그냥 시 한편 한편으로 즐겨읽었다.

비록 이른바 셰익스피리언 소네트라 하는 abab cdcd efef gg의 음율을 원문으로 즐길 수는 없다해도 피천득 시인의 번역은 매끄럽고, 마지막 두 행의 반전을 살려내는 맛이 있었다.(사실 이 번역본의 시 전체가 마지막 두행이 그림이 놓여있고 뒤로 물러나 앉아있다!) 더욱이 셰익스피어가 장중한 맛의 기존 소네트를 비웃으려는 의도로 쓴 것을 드러내듯 번역자는 해학과 장난기를 담아냈다. [내게 필요없는 하나를 더 달고] 나왔다느니 하는 표현은 압권이다. 그리고 후반부의 [윌과 윌의 경쟁]과 [아이버리고 닭 좇아가는 엄마]같은 시는 요절복통감이다.

시란 무엇일까? 개인적으로 시는 함축된 언어의 뒤를 넌지시 비추는 암시라고 생각된다. 다 까고 말하지 않아서 더 멋들어진 무엇. 그러나, 이런 언어를 직설적이고 도구주의적인 현대인은 반기지 않는다. 최근 [시가 내게로 왔다]가 우리에게 어필하는 이유는, 물론 훌륭한 시들의 묶음인 때문도있겠지만, 이 괄시 받는 언어가 가진 함축성을 산문으로 풀어낸 때문은 아닐까?  

시를 좋아할 수 있는 사람들이 늘어날 수 있는 세상이면 좋겠다. 우리 선조도 옛 서양인들도 그러했건만, 아이에게 시 한수 외어보라던 스승도 어른도 없는 세상이 되었다. 살기가 힘들어진 때문인가, 아니면 좀머씨처럼 누군가 우릴 좇고 있듯 살기 때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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