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ethius의 섭리와 자유의지문제

 「철학의 위안(Consolatio philosophiae)」제 5 장

 박상욱 (서양철학 석사과정)

  우리가 말하는 우연이라는 단어의 정의(definition)는 그 지위가 애매모호하다. 우연의 정의는 일상어에서 여러가지 뜻으로 쓰여지고 있으므로, 그 뜻이 부정될 수도 있고 긍정될 수도 있다. 우리가 신의 섭리를 인정한다면 우연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우연은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신은 모든 것을 섭리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던 것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 따라서 우연이 있다는 것은 신의 섭리와 모순되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에 대해 보에티우스는 해답을 찾을려고 노력한다. 

 만약 어떤 것이 아무런 원인 없이 생겨난다면, 그것은 무(無)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무(無)에서는 아무것도 생겨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연에 대한 정확한 정의가 필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식의 설명을 따르면 우연이라는 것은 어떤 일을 어떤 일정한 목적을 위하여 행할 때, 여러 가지 원인 때문에 목적하였던 것과는 다른 결과가 나오게 되는 것을 우연이라고 한다. 우연이란 어떤 목적을 가지고 행동하고 있는 사물들에 있어서 여러 원인들이 합치되는 데서 생겨나는 뜻하지 않았던 결과를 말하는 것이다. 즉, 어떠한 원인들에 대해서 불가피한 결합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질서인 것이다. 보에티우스는 우연의 올바른 정의를 통해서, 신의 섭리의 세계에서 우연이라는 것이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려고 한다.  

  세계는 인과계열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왜냐하면 세계는 신의 섭리에 따라서 만들어 졌고 움직여지기 때문이다. 그러면 과연? 이러한 '인과계열 속에서 우리의 자유의지가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대해서 보에티우스는 답해야만 한다. 

  어거스틴에게서 보이는 것처럼 보에티우스 또한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자유의지가 없는 이성적 본성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성적 존재1)는 사물을 인식할 수 있고 판단능력을 통하여 행동 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성이 있는 존재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행할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는 자유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자유를 참되게 누리기 위해서는 신의 섭리를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  

 

  앞의 Ⅰ·Ⅱ에서 신의 섭리와 자유라는 두 가지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한 보에티우스는 이제 새로운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그 문제는 바로 '섭리와 자유가 어떻게 양립할 수 있는가?'가이다. 섭리와 자유는 조화되기 어렵다. 왜냐하면 섭리의 입장에서 볼 때, 섭리는 불확실할 수 없고 또, 자유의 입장에서 볼 때 자유는 선택의 문제이기 때문에 필연성이 없다는 것이다. 제 5 장의 Ⅲ에서 언급될 문제는 앞의 Agustinus의 "자유의지론" 제 3권에서 어거스틴이 답할려고 했던 문제, "신의예지와 자유의지의 양립가능성"이라는 문제와 일치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제 보에티우스는 자유와 섭리의 양립가능성에 대해 답해야만 한다.    

 신이 모든 것을 미리 아시는데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은 매우 상반되는 것처럼 보인다. "신은 모든 것을 미리 보시며, 또한 신은 절대로 틀릴 수가 없다면, 신의 섭리는 필연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이 인간의 행동뿐만 아니라 생각과 원인을 다 알고 계시니 결코 인간에게 자유의지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의견들에 대해서 앞선 이론가들이 말한 것은 "신의 섭리가 미리 있기 때문에 어떤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그것이 이루어질 것이었기 때문에 신의 섭리가 그것을 안다는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이것은 '필연성은 신의 섭리의 반대편에 있다.'는 것이다. 즉 예견되는 것이 필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이루어 질 것이 필연적으로 예견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보에티우스에게 이러한 이론들은 "예지가 장차 이루어질 사물들의 필연성의 원인인지, 혹은 장차 이루어질 사물들의 필연성이 섭리의 원인인지를 설명해주지 못한다."라고 말한다. 미래에 이루어질 것이기에 예견되는 것이고 예견되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것은 역시 미래에 있을 것으로서 신에 의하여 필연적으로 예견되거나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러한 생각은 신의 섭리와 자유의지를 양립가능하게 하는 논거로써 타당하지 않다. 

따라서 앞선 이론가들의 생각은 완전한 지식이라 할 수 없는 오류를 지니고 있다.

 신의 예견은 인간의 인식처럼 불완전한 것이 아니다. 신이 장차 이루어질 것으로 미리 확고하게 알고 있는 그 사물의 생성은 확실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경우 사람의 생각이나 행동에는 아무런 자유가 없는 것이다. 만약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가 없다고 가정하면, 악(惡)2)의 원인이 신에게로 그 책임이 돌아가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의 자유의지가 아닌 신의 섭리에 따라 질서정연한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존재에 지나지 않으며, 우리가 행한 악은 신이 이미 정해놓은 질서에 의해 발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인간의 모든 과오는 완전한 선(善)인 신이 책임을 져야 하는것이 되고만다.  

  보에티우스는 앞에서 발생한 두 가지의 난점들을 해결해야만 한다. 첫 번째는 앞선 이론가들의 이론상의 결점을 보완해야 하며, 두 번째로는 악(惡)의 책임이 신에게로 전가되지 않도록 인간의 자유의지를 옹호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즉 이 두 문제는 바로 "신의 섭리와 자유의지를 어떻게 양립가능한가?"라는 끊임없이 되풀이 된 물음이였다.   

 

 신의 예지는 인간의 사유능력을 초월하여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신의 섭리를 다 알수가 없다. 이런 이유 때문에 '신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 사이의 조화'는 보에티우스뿐만 아니라 모든 유신론자들도 대답해야하는 중요한 의무가 된 것이다. 이에 보에티우스는 인간의 추리작용이 신의 예지의 능력에 도달할 수 없다라는 것을 전제로부 논의를 시작해 나간다.

 보에티우스에게 "예견된 것들에는 필연성이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또 만일 필연성이 없으면 절대로 미리 알 수 없다"라는 질문을 한번 던져보자. 이런 질문에 대하여 보에티우스는 '당신의 견해는 잘 못되었오.'라고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보에티우스는 "인식되는 모든 것은, 사물 자체의 능력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오히려 인식 주체들의 정신적 기능을 따라 인식되는 것"라고 정의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식의 단계에서, "더 높은 단계의 인식능력은 아래 단계의 인식능력을 내포하는 것이지만, 아래 단계의 것은 윗 단계의 인식능력에 동등하게 자기를 높일 수 없다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따라서 인식의 사유 능력면에서 본능을 소유한 동물보다는 이성을 가진 인간이, 이성을 사유한 인간보다는 직관인식능력을 가지고 있는 신이, 좀더 완전한 인식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도식상에서도 감각보다는 표상, 표상보다는 추리, 추리보다는 이성, 이성보다는 직관이라는 보에티우스의 인식론적 구도가 그려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보에티우스가 예지와 필연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시한 대안은 바로 인간의 인식능력의 한계성이다. 사물을 인식함에 있어서 인식되는 사물 자체의 기능에 의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인식 주체가 자기 인식기능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신의 예지와 필연성에 대해서 올바른 정답을 찾아 낼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필연성의 문제는 인간의 인식능력 한계안에서 정의내려지기 때문에 신의 섭리를 유한한 인간은 알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보에티우스는 '어떻게 인간이 신의 섭리를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 답해야만 한다. 우리는 인식을 할 때 사물에 대해서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을 사용한다. 우선 감각을 이용할 수 있다. 감각은 인간보다 하등에 있는 동물들도 가지고 있는 인식의 도구이다. 다음으로 표상을 들 수 있다. 표상은 동물들에서도 좀더 높은 단계의 종(種)들만이 가지고 있다. 이성은 오직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다. 동물들에게는 감각과 표상의 능력은 있지만 결코 이성은 없다. 인식의 최고단계인 직관인식능력은 오직 신에게만 있다. 인식의 단계가 올라갈수록 하등의 것보다 인식능력은 더 우월하게 된다. 이러한 인식론적 도식을 통하여 만약 인간이 신의 최고 인식의 높이인 직관인식능력까지 도달 할 수 있다면, Ⅳ에서 우리가 답할려고 했던 문제들에 대해서 해답을 찾게 될 것이다.

 

 "영원한 신의 인식은 그 전체가 동시적인 것이라고 결론한다. 그래서 현존하는 사물들의 인식과 마찬가지로 자유로운 미래 사정들에 대한 신의 예지도 인간의 자유를 손상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설명한다." 이제 보에티우스는 신의 예지가 인간의 자유의지를 손상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본격적으로 설명해 내야만 한다. 앞의 Ⅴ에서 알 수 있듯이 "인식되는 사물은 그 본질에서가 아니라 인식하는 주체의 본질을 따라 인식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물의 정확한 인식에 도달하기 위해서, 신의 지식을 먼저 파악하는 작업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신의 영원성을 알기 위한 시도가 신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는 시작이기 때문이다. 

 보에티우스에게 '신이 영원하다.'라는 명제는 의심할 수 없는 것이다. 영원성을 시간적인 사물과 비교해보자3). 시간안에 살고 있는 현재적 존재는 과거에서 미래로 직선적인 방향으로 나아간다. 현재적 존재에게 과거는 이미 잃어버린 것이고, 미래는 아직 알 수 없는 것이다. 또한 현재의 오늘도 시간의 연속성에서는 지나가는 한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시간이라는 제약을 받는 인간은 영원성을 인식하지 못한다. "영원은 무한한 생명의 전(全)충만성을 동시에 내포하고 소유하며 미래에 이루어질 것은 아무것도 없고, 과거로 흘러 사라지는 것 또한 아무것도 없는 것을 가리켜 말한다." 이런 영원이란 필연적으로 자주적이며 또한 필연적으로 항상 자기에게 대하여 현존으로 존재하며, 또 필연적으로 그것에는 지나가는 시간의 무한성도 현재인 것이다.

 "모든 판단은 정신의 본성을 따라 그에게 주어진 사물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런데 신은 항상 영원하고 현존재 상태이며, 그의 지식도 모든 시간적 운동을 초월하고 현재 자기의 단순성 안에 머무르며, 미래와 과거의 무한한 영역을 동시에 내포하며 모든 것이 마치 현재에 이루어지고 있는 것처럼 자기의 단순한 인식 안에서 고찰하는 것이다."

 인간은 시간적 한계성 안에서 사물을 바라보지만, 신은 영원한 현재 안에서 모든 것을 인식하고 있다. 신은 사물의 본성이나 고유성을 변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이루어질 사건들을 자기의 현재 안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이러한 신의 인식은 직관이라고 볼 수 있다. "신은 만물을 보기는 하나 절대로 사물의 성질을 혼란시키지는 않는다. 그리고 신에게 있어서는 그 사물들은 현재의 것들이지만 시간적 조건하에서는 미래의 것들이다."

  "신의 직관은 어떠한 미래 사정보다는 선행하는 것이며 모든 것을 자기 고유한 인식의 현재에다 환기시키는 것이다. 신의 직관은 예지를 어떤 때는 이렇게 또 어떤 때는 저렇게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는 변화없이 머무르면서 네 변화를 선행하여 일별함으로써 그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이다.", "신은 모든 것을 동시에 파악하고 또 관조하는 현재성을 미래 사물들의 실현에서 얻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고유한 단순성에서 가지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손상되지 않는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필연성에서 해방된 인간의 자유의지 결과물에 대해 상과 벌을 제시하는 것이 정당화 될 것이다. 

 

  제 5 장에서 '신의 섭리와 자유의지의 양립가능성'에 대한 보에티우스의 생각을 집약하여 말한다면, 신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해 선택된 행위들을 미리 보신다. 하지만 신이 인간의 행위들을 미리 예견했다는 사실이 인간의 행위들을 필연적인 것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신은 영원하시며, 영원성은 끝없는 생활에 대한 완전한 소유, 즉 완전하고 동시적인 소유다. 그러므로 인간의 시간적 제약 속에서 볼 때 사건에는 과거와 미래가 있지만, 신은 사건에 대하여 가지는 총체적인 시각(視覺) 안에서는 이전 상태와 이후 상태가 없는 것이다. 신은 세계내의 창조된 모든 사물들에 대해서 섭리하신다. 그러므로 신께서는 필연적인 것을 필연적인 것으로, 자유로운 것을 자유로운 것으로 영원히 보신다. 내가 태양이 떠오르고 있는 것을 볼 때에, 내가 태양을 본다는 사실은 태양이 떠오는 것의 원인이 아니다. 내가 사람이 걷고 있는 것을 볼 때, 그 사실이 그 사람으로 걷게 하는 것은 아니다. 이와같은 방식으로 신은 우리의 자발적인 행위에 대하여 가지시는 부동(不動)의 영원한 시각은 인간 행위의 자유를 결코 손상시키지 않는다.  

  '신의 예지와 인간의 자유가 어떻게 양립되는가?'에 대한 문제는 유신론자들이 꼭 풀어내야만 할 숙제인 것 같다. 왜냐하면 전자와 후자중에서 어떠한 것도 포기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신이 전지전능하기 때문에 신의 예지능력은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사유할 수 있는 이성의 능력이 분명히 있고, 사유할 수 있는 이성은 선택의 자유가 있기 때문에 예지와 자유는 동시에 성립하기가 어렵다. 우리가 위의 질문이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해서 답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처럼 보인다. 위의 질문은 필연성이라는 논리적인 문제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어쩌면 '예지와 자유'라는 논리학의 문제를 어거스틴, 보에티우스를 비롯한 이론가들이 형이상학적 문제로 접근함으로써 추상적이고 더욱더 애매한 상황으로 빠져든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1)  이성적 존재, 즉 인간의 영혼을 계층을 이루고 있다. 영혼의 계층에 의해 자유를 누릴수 있는 권한 또한 차등적으로 적용된다. 최고의 영혼은 신을 인식(혹은 직관)할 수 있으무로 가장 자유스럽다.

2)  유신론자들도 세상에서 악(惡)이 없다고는 주장할 수 없다. 왜냐하면 현실에서 인간은 악한 행위들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살인, 강간, 도둑질, 거짓말등은 분명히 인간이 저지른 결과물이다.

3)  영원성을 신의 속성으로 시간성을 가진 현재적 존재를 인간으로 이해하면 앞으로의 논의가 쉬어질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