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로마 철학자이자, 최초의 스콜라 신학자"인 아니키우스 만리우스 세베리누스 보에티우스(Ancius Manlius Severinus Boethius : 약 475-524)는 로마의 정치가이자 철학자였고, 유명한 원로원 가문의 후예였다. 그는 플라톤의 아카데미에서 철학, 수학, 시를 연구하였고, 아테네에서 행한 자신의 연구를 통하여 얻은 지식을 가지고 나중에 그리스의 철학 저술들을 라틴어로 번역할 수 있었다. 그는 500년 직후에 이탈리아를 통치했던 고트족의 왕인 테오도릭(455-526)의 궁정에서 일하였다. 보에티우스는 510년에 콘술이자 "Master of Offices"로 임명받았다. 그는 콘술로서 그의 동료 관리들의 공격적인 행동을 제지하고자 시도하였다. 보에티우스는 522년에, 그리고 종교적인 논쟁을 벌이는 동안에 패배 당한 편을 선택하였다. 그는 체포되어 유죄판결을 받았고, 유형을 받아 처형을 기다렸다. 그렇지만 보에티우스는 소크라테스처럼 원칙을 중시하는 사람이었고, 보다 강한 세력에 굴복하기보다는 자신의 입장을 확고히 고수하고자 하였다.

  이 존경받을 만한 학자는 처형을 기다리면서 『철학의 위안』이라 불리는 간단한 책을 저술하였다. 보에티우스는 이 책에서 여성으로 등장하는 "철학"과 대화를 나누었다. 달리 말해 그는 신이나 그리스도나 그의 신앙을 향하여 몸을 돌린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일찍이 받았던 철학 훈련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는 소크라테스와 스토아주의자들의 전통에 서서 "만약 당신이 당신 자신의 주인이 된다면, 당신은 당신이 결코 잃기를 원하지 않는 것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운명의 여신도 결코 당신을 넘어뜨릴 수 없을 것이다."라고 확신을 가지고 말하였다. 이것은 고전적인 인문주의에 대한 정의였다.

  『철학의 위안』은 훌륭한 저술로서 소크라테스와 스토아주의자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 이 학자가 죽음을 기다리면서 투옥된 상황을 상상해 보라. 그에게 용기와 위안을 준 것은 스토아주의였다. 아주 이상하게도 그리스도나 기독교가 한 말은 그의 저술에서 등장하지 않는다. 보에티우스는 서양의 지적 생활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12세기까지 유럽인들이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 안 모든 지식은 사실상 보에티우스를 통해서였다. 그는 심지어 유클라데스의 기하학을 중세에 확산시키는 데도 도움을 주었다. 그는 신앙과 이성을 결합하기를 원하였다. 그리고 이 둘이 갈등관계에 있지 않고, 서로를 보완해준다는 점을 보여주기를 원하였다. 그의 영향은 폭넓게 미쳤다. 1600년처럼 늦은 시기에도 잉글랜드의 여왕인 엘리자베스는 『철학의 위안』을 궁정에서 읽도록 하였고, 심지어 영어로 번역하도록 하였다. 단테, 보카치오, 세르반테스, 초서는 모두 보에티우스의 『철학의 위안』을 잘 알고 있던 이 책의 학생들이었다.

  그러나 보에티우스는 고트족 관리에 의하여 곧 끔찍한 운명을 맞이하였다. 테오도릭은 524년에 그의 처형을 추인하였고, 보에티우스는 잔인한 고문을 받은 다음에 몽둥이로 맞아 죽었다. 그는 소크라테스, 토마스 모어 경, 브루노, 갈릴레오와 마찬가지로 강력하고 잔인한 권력의 희생물이 되었다. 그는 원칙을 지킨 지성인이었고, 고전 학문이 보존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카시오도루스(약 485-약 580)과 투르의 그레고리(538-약 594), 세빌리아의 이시도르(약 560-636)도 그러하였다. 그리고 성 아우구스티누스도 자신의 독창적인 방식으로 고전 학문의 보존에 도움을 주었다.

  이러한 그리스-로마적 전통 속에는 보존되어야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12세기와 13세기에 이 모든 것들로 인하여 어떤 일이 생기는지 곧 보게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 성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가 이교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와 기독교를 결합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이다. 이성과 신앙은 상반된 것이 아니라 진리에 이르는 두 가지 필요한 길로 생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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