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평중(전주대학교 교수)

I. 서 언

유럽 역사에서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시기인 16세기는 다음의 두 측면에서 분열과 대립의 시기였다. 첫째는 국제 정치적 측면에 해당하는 것으로, 16세기는 17∼18세기 절대주의 시대의 기반을 다지는 전 단계로서 유럽 각 국의 군주들은 잃어버린 옛 영토의 회복과 새로운 영토의 확장을 위해서 혹은 패권의 유지와 확보를 위해서 전쟁이라는 수단을 사용하고 있었다. 특히, 신성로마황제 찰스 5세를 하나의 지도자로 하여 네덜란드·스페인·독일·북부 이탈리아 등을 묶어 좀 느슨하지만 하나의 제국(찰스 대제 이후 최대의 판도)을 형성하고 있던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의 존재는 당시 유럽 국제 분쟁의 큰 배경이 되었다. 즉 유럽에서 합스부르크가의 세력에 의해 4방으로 포위되어 있던 프랑스는 그 포위망을 분쇄하는 것을 국가의 최우선 정책으로 삼지 않을 수 없었고, 이 전쟁에 영국 왕 헨리 8세와 교황도 정치적 이해관계를 가지고 참여함으로써 16세기 유럽의 국제정치는 혼돈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1)

설상가상으로 16세기 유럽의 분열과 대립을 몰고 온 또 다른 요인은 루터로부터 시작된 종교개혁이었다. 즉 종교개혁은 크게는 유럽을 구교 진영과 신교 진영으로 분열시켜 놓았을 뿐만 아니라 이 양 진영도 다시 각각 강·온건파로 나뉘어져 있었다. 각 진영의 강·온 파도 다시 각각 여러 미묘한 노선 차이로 일치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더구나 정·교가 아직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는 상황에서 신앙의 문제는 신앙의 문제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었고 각국의 정치·경제적 상황과 연결되어 복잡하게 전개되어 가고 있었다. 예컨대, 독일에서의 종교개혁은 신성로마황제의 영향력을 배제하려는 제후들의 지원을 받아 전개되어 가고 있었고, 네덜란드는 카톨릭 합스부르크가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한 방편으로 신교를 채택하였으며, 프랑스는 카톨릭을 고수하면서도 카톨릭 합스부르크 세력을 분쇄하기 위해 독일에서 반 황제 편에 있는 신교의 제후들과 제휴하고자 하였다. 영국에서 이혼 문제를 계기로 헨리 8세에 의해 촉발된 종교개혁은 궁극적으로 영국을 교황의 패권주의에서 해방시키는데 있었고 또한 수도원 등의 재산을 노리는 신흥 상공업자 시민 계급의 지원도 작용하였다.

이처럼 16세기 유럽은 왕권 중심의 중앙집권적 근대국가에의 지향과 종교개혁이라는 근대적 노력으로 분열과 대립이 심화되어 가고 있었는데, 이러한 시대 환경 속에서 유럽 세계는 평화와 단합 그리고 일치라는 중요한 시대적 가치를 요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점에서 이러한 평화적 가치의 부상은 비교적 통일과 평화가 큰 기저를 이루었던 기존의 중세적 가치의 재부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것은 마치 혼란스럽게 끝난 불란서 혁명 이후 반동체제를 통해 절대왕정기의 안정을 되찾으려한 움직임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역사의 이러한 현상은 역사의 한 항구적인 모습, 즉 통일은 다시 개별화의 가치를 지향하고 실현된 개별화는 혼란을 수반하면서 다시 통일의 가치를 지향하는 대립적인 이중적 가치의 한 자연스런 표현이라고도 볼 수 있다.

바로 에라스무스는 그의 활동의 초창기에는 '유럽의 황금시대'를 예견했으나 곧 이상의 사태 전개로 인한 깊은 좌절감 속에서 개혁과 평화라는 16세기의 이중적 현상과 갈등을 적절하게 표현해준 대표적인 지식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우신 예찬』의 저자요 신약성경을 새롭게 번역하고 주해 작업을 펼쳤던 에라스무스는 분명히 교회의 개혁자였지만, 「평화의 탄원」(Querela pacis)등을 저술하여 전쟁만을 일삼는 유럽의 군주들을 비판하고 평화의 군주가 되기를 호소하면서, 한편으로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야기되어간 신앙적 불화를 극복하고자 최선을 다한 평화의 사도였다. 유럽의 정치적 분열과 더불어 종교개혁과 더불어 시작된 유럽 교회의 분열은 평화주의자 에라스무스에게 더욱 심각한 위기감을 갖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럽을 단순히 정치적 공동체라기보다는 종교적·정신적·영적 공동체로 보아온 그에게 있어서 교회가 분열된다는 것은 보편적 평화를 그 뿌리부터 잠식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그가 얼마나 유럽에서 통일된 하나의 교회가 존속되기를 원했는가하는 사실은 루터의 종교개혁이 점차 강렬하게 부상됨에 따라 그가 보여준 여러 가지 태도에서 증명된다. 그의 삶의 모토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평화와 개혁과 화합>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것을 관철하기 위한 그의 전 삶은 신·구교의 양 진영 중 어느 한 쪽에도 서지 않는 <화합의 중재자>로 표현될 수 있다.

필자는 본고에서 16세기 종교개혁 시대의 교회 분열과 관련하여 교회개혁자요 평화주의자인 에라스무스가 개혁 과정에서 교회간에 파생되는 불화와 분열을 어떻게 극복하고 개혁을 성사시키면서도 유럽의 화합을 달성시키고자 노력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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