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에라스무스의 루터와의 결별:  교회 화합 이념의 반증

영적 측면을 강조하고 성경의 중요성을 강조한 에라스무스의 종교개혁 사상은 루터의 종교개혁의 선구적 역할을 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처음 루터의 출현은 에라스무스가 주도하는 움직임의 연장으로 보여졌다. 그래서 에라스무스는 루터의 종교개혁에 동감하며 그 운동을 옹호했는데, 그는 처음에 루터가 그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물론 에라스무스는 루터의 운동이 초기부터 자제력을 결여하고 있다는 느낌은 가지고 있었다. 에라스무스가 볼 때 루터는 한꺼번에 모든 것을 공격하고 있었다. 그래서 에라스무스는 운동을 새롭게 전환시키려고 노력하기도 하였다. 1518년 그는 『그리스도교도 전사 교본』(Enchiridion militis christiani)(1503)을 쉴레트쉬타트(Schlettstadt)의 수도원 원장인 파울 볼츠(Paul Volz)에게 보내는 편지의 형식으로 만든 중요한 서문을 달아 다시 출판하게 된다.2) 여기서 그는 루터의 이름을 언급하지는 않지만, 그의 투쟁을 이해하면서도 동시에 그의 자제를 촉구하고 있다.

구교를 옹호하는 보수적인 자들에게는 종교개혁은 아주 단순한 문제였다. 즉 루터가 현존하는 교회의 교리를 반대하자, 그의 이단적 운동은 탄압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에라스무스는 이들과는 전혀 다른 판단의 기준을 가졌던 것이다. 구체적으로 최초 몇 년 동안 루터가 스콜라 학문과 구교의 많은 의식에 관해 비판한 것에 대해 에라스무스는 전적으로 공감하였다. 무엇보다도 그는 루터가 선한 삶을 살아 왔다는 점에 큰 비중을 두었다. 그가 볼 때 루터는 분명히 기독교인이었다.

루터에 대한 이러한 태도 때문에 그는 큰 곤경에 처한다. 에라스무스가 체류했던 1517년에서 1521년의 루벵(Leuven)에서 지난 몇 년간 계속되고 있던 그에 대한 반대는 더욱 거칠어졌다. 주로 스콜라 신학자들은 에라스무스가 루터와 한 통속의 인물이며 심지어 루터의 활동은 에라스무스의 도움을 받고 있다고 간주하였다. 루벵 대학 총장이었던 니콜라우스(Nicholas Egmond)는 강단에서조차 에라스무스를 루터교도라고 비방하곤 했다. 그러자 후텐(Ulrich von Hutten)은 에라스무스에게 이렇게 피신한 것을 요청했다.

당신은 루터의 책이 소각된 다음에도 여전히 안전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지요? 혹 루터에 대한 유죄판결이 당신에 대한 유죄판결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라거나 루터의 이단 심사를 맡은 재판관이 당신을 보호해줄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는지요. 피신하세요. 그래요. 피신해서 당신 자신을 지키고. 우리에게 […] 이미 그자들은 공공연히 불만을 터뜨립니다. 당신이 이 모든 사건들의 원흉이라고.3)

그럼에도 이 일이 있었던 1520년 에라스무스는 자신이 후텐에 대해 거리를 유지하는 것과 루터와 종교개혁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거의 무관하다는 점을 멜랑히톤(Philip Melanchthon)에게 이렇게 알려주었다.

루터에 관한 일은 다소간 보고를 받았네. 가능한 한 나는 그를 보호하고 있거니와, 나와 그 사람의 일은 여러 면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기도 하지 […]. 루터의 일로 심사숙고하는 사람들이라면―그에게 유리할 것이라고 생각되는 방도는 거의 모두 검토되었지만―오로지 그가 좀 정중하고 적당하게 글을 썼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야 할 것이네. 하지만 이러한 충고도 지금으로서는 이미 때늦은 거지. 나는 사태가 폭동으로 번지고 있음을 알고 있고, 이 모든 일이 오직 그리스도에게 명예로운 일이 되기만을 기도하고 있네. 사람들이 틀림없이 분개할 것이지만, 내가 그 분노를 유발하는 장본인이 되고 싶지는 않다네 […]. 루터 박사와 자네의 벗들 모두에게 인사 전해주기를 부탁하네.4)

에라스무스는 이렇게 루터 종교개혁의 과격화를 염려하면서도 아직 루터를 지지하고 있는 동시에 점차 급진적인 방향으로 선회해가는 루터와 거리를 두는 차원에서 카톨릭 교회의 일원임을 선명히 하고 있다.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인한 갈등이 격렬해지기 시작한 해인 1519년에 출판한『신학에 대한 추론』(Ratio verae theologiae)의 두 번째 판에서 에라스무스는 루터에게 그의 저술의 음조를 완화시켜줄 것을 충고하면서, 자신이 루터 진영에 속하지 않고 있음을 지적하고 교황과 로마 교회에 대한 그의 충성을 공언한다. 1520년 9월 그는 교황 레오에게 자신은 "그리스도의 최고 대리자에게 대담하게 대적할 만큼 미친 것은 아니다"5)라고 주장한다. 그는 계속하여 1520년 12월 6일에는 추기경 캄페기(Lorenzo Campeggi)에게, 1522년에는 Palencia의 주교 모타(Pedro Ruiz de la Mota)에게, 자기는 카톨릭 교회를 떠나지 않았으며 로마 교회를 존중한다는 내용의 선언을 한다. 그는 1523년 후텐과 루터의 나머지 추종자들에게도 로마 교회가 악을 지니고 있음에도 정통이라고 선언한다.6)

엄격히 말하면 카톨릭 측에 있으면서 루터를 동정하는 에라스무스의 그러한 태도는 아직 중립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루터에 대한 모든 경고가 아무런 효과도 발휘하지 못함에 따라 에라스무스는 루터에 대한 새로운 태도와 결심을 보이지 않으면 안되어 갔다. 그의 경고를 무시하고 점차 과격성을 더해 가는 루터가 성공을 거둔다는 것은 바로 교회의 통일이 깨어지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는 에라스무스가 볼 때, 결코 있어서는 안될 일이었다. 그는 1521년 루터에 대적하는 싸움에 휘말려들지 않으려고 루벵에서 바젤(Bazel)로 이사했으나 더 이상의 중립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였다. 타협하고자 하는 에라스무스의 모든 시도는 실패로 끝나게 된다. 이런 시도 중 최후의 노력은 1524년 자유의지를 다룬 『자유 의지론』(De libero arbitrio)의 출판이었다.7)

에라스무스는 이 책을 통해 루터의 문제를 찬·반이라는 성토의 입장을 떠나 학문적인 영역으로 끌어 올려 우호적인 논의가 될 수 있다고 하는 자신의 관점을 아주 훌륭하게 제시하였다. 비록 자유 의지에 대한 입장이 자신과 루터가 다르다는 점을 알기는 했었지만. 그러나 이런 우호적인 시도는 완전히 실패하였다. 루터의 『노예적 의지』(De servo arbitrio)에 대해 그는 매우 분노했으며, 이 문제는 계속 가장 큰 쟁점이 되었다. 루터의 『노예적 의지』에 대한 반박문인 『광신』(Hyper -aspistes)에서 에라스무스는 루터와의 관계를 깨버렸다.

에라스무스가 루터와 결별한 것은 궁극적으로 루터 종교개혁의 타협 없는 급진적 성격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전 교회를 분열과 분쟁으로 몰고 갔기 때문이었다. 바꾸어 말해서 에라스무스의 평화주의는 그의 로마 교회에 대한 충성과 루터와의 결별의 주된 이유이다. 그는 1525년 그의 신약성경을 비판하는 자들에 대한 자기 옹호에서 로마 교회의 공동체를 떠나지 않는 이유는 일치를 사랑하고 싸움을 증오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8) 1521년 그는 루벵 대학 신학교수들에게 이렇게 약속한다. "가능하다면 나는 카톨릭 교회의 평화도, 복음의 진리도, 로마 교황의 위엄도 버리지 않을 것이다"(CWE 8: Ep. 1217, lines 161-63). 호전적인 후텐과 그의 무리에게 에라스무스는 로마 교황청이 모든 것을 혼동으로 몰아 넣는 호전적인 폭동에 의해 개혁될 수 있다면, 차라리 잠자는 악으로 남아 있도록 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ASD 9-1 : 174).9) 에라스무스는 스트라스부르그 개혁자들에게 이렇게까지 말한다. "바울이 오늘날 살아 있다면, 교회의 사태를 찬성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악덕들에 대하여 그의 목소리를 높일 것이다". 이 악덕들은 제거되어야 하나 물론 폭동이 없이 해야한다(ASD 9-1: 308). 에라스무스에게 로마 카톨릭 교회로부터 분리하여 새로운 교회를 형성하는 것은 기독교 세계 내의 불화와 불일치를 의미하며, 루터가 성공을 거둔다는 것은 바로 교회의 통일이 깨어지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이는 에라스무스가 볼 때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즉 기독교 신앙은 평화와 일치를 향하여 추진되어야 하는데, 지금 종교개혁은 바른 길에서 벗어나 이 일치를 고의적으로 위태롭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에라스무스가 볼 때, 종교개혁자들의 최악의 죄는 교회 평화의 파괴이다. 에라스무스는 종교개혁이 급진적인 변화를 초래하기 위해 모든 것을 전복시키고 있다고 느꼈다.10) 그 지도자들은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것은 무엇이든 좋아하지 않으며, 세상을 갑자기 변화시키려는 그들의 시도는 "전 교회의 일치를 무너뜨렸다".11)고 그는 생각한다. 에라스무스가 볼 때, '불화의 사과'를 세상과 교회에 던진 자는 다름 아닌 루터이다. 더 중요한 것은 평화가 종교개혁자들의 진영에 존재하지 않는 데 있다. 그는 멜랑히톤에게 그와 쯔빙글리 사이의 교리의 차이를 상기시키고, 부커(Martin Bucer)에게 쯔빙글리(Ulrich Zwingli), 루터, 오시안더(Osiander) 가 신앙고백상의 문제로 서로 분쟁하고 있는 것에 놀라움을 표현한다.12) 로마교황청에 대한 반대자들은 교회의 필수적인 요소인 평화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 하나의 교회를 이루지 못한다.13)

종교개혁의 시작과 더불어 에라스무스의 교회 내의 평화와 일치에 대한 관심은 덕에 대한 관심보다 더 큰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종교개혁의 시작과 더불어 그것들은 교회에서 최고의 덕목이 된다. 부패한 교황청은 교회 일치의 보존을 위해 지불해야 할 그렇게 큰 대가는 아니다. 혼란을 막기 위해서는 사악한 교황들이라도 그 권위를 관대하게 인정해주어야 한다(ASD 9-1: 38). 따라서 에라스무스는 이단이나 분파와 같은 불화와 불일치를 최고의 악덕으로 본다. 그는 교회의 일치가 다른 어떤 덕목보다 위의 서열에 있으며, 교회의 불일치보다 더욱 악한 것은 없다고 본다. 루터는 신앙이 없는 인간의 선행이 사실상 치명적인 죄라고 믿는다. 반면에 에라스무스는 이단과 종파분리자의 경건과 덕은 오히려 죄와 악덕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카톨릭 교회에는 많은 사악한 사람들이 있을 수 있지만, 죄는 면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교회 밖에는 평화도 덕도 경건도 없다. 그러나 덕과 경건은 평화에 종속되어 있다. 평화 없이 이러한 것들이 교회에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단과 분파주의자들의 근본적인 죄악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통옷을 찢는데 있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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