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 에라스무스의 교회 화합을 위한 중재·중도의 모색

이처럼 에라스무스는 교회 분열의 책임을 루터에게 돌리고 그와 결별했지만 그것 때문에 교회의 재결합을 위한 시도를 중단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루터와의 결별을 선언한 이후에도 카톨릭 측과 루터파 양쪽을 재결합시키려는 중재자로서의 시도를 계속한다. 그는 루터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브란덴부르크의 알버트 대주교에게 설명하면서 그가 결코 고의로 오류를 가르치거나 혼란을 야기하거나 하지 않고 불화를 피하기 위해 무엇이든 하고자 한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15) 이것은 그 후의 저서들에서 되풀이된 주제이다. 모든 노력은 평화(pax)와 일치(concordia)를 유지하는데 집중되어야 한다.

1520년 에라스무스는 교착 상태를 타개하고자 이런 제안을 하고 있다. 즉 카알 5세(Karl V), 헨리 8세(Henry Ⅷ), 및 헝거리의 로드비이크 2세(Lodewijk) 등이 각자 자신의 백성 가운데서 루터로부터나 교황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몇 사람의 심판관을 지명하고, 이 심판관들은 루터의 저술을 반드시 읽고 루터와 대화를 나눈 후 최후로 결정적인 판단을 내리도록 하자는 제의였다. 이 제안에서 더욱 놀라운 것은 루터에 대한 41개조 죄목이 이미 선고되고 2개월간의 복종 기간이 주어진 이후 제안되었다는 데 있다. 바로 교회의 수직 구조 대신 기독교 정신이 우선이 되어 교회를 교정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가졌던 것이다.16)

루터가 1521년 보름스(Worms)의 제국회의에서 정죄된 이후에도 계속 자신의 방향을 고집하고, 이로 인해 기독교의 일치와 평화를 위태롭게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에라스무스는 자신의 위치를 더욱 강력하게 만들어줄 루터에 대한 반대 세력에 합류하지 않았다. 그는 루터를 이단자라 보지 않았고, 또 이 점을 공적으로 밝히기도 하였다. 여러 방면에서 그는 화해를 위해 애썼다. 스위스 내의 여러 지역에서 종교개혁이 시작되고 있을 때에도 에라스무스는 개방된 교회를 옹호했다. 그는 『육식 금지에 대한 서한』(Epistola de interdicto esu carnium)에서도, 의무적인 금식을 폐지하고, 몇 성자의 날을 줄이고, 성직자들의 결혼을 허용하며 강제성을 자유로 대체하도록 권고하고 있다.17)

종교개혁의 와중에서 에라스무스는 기독교 세계의 일치와 평화의 회복을 위해 두 가지 방안을 제시한다. 그 하나는 교회의 전 신자의 도덕적·영적 갱신이다. 도덕적·영적인 갱신은 두 가지 일을 수반하는데, 첫째는 그리스도인들이 서로의 악덕보다는 좋은 점들을 장려해야 한다는 것이요, 두 번째는 모든 사람들이 각자 마땅히 있어야할 자리를 지키는 것이다.18) 평화와 일치의 회복을 위한 에라스무스의 두 번째 큰 방안은 에라스무스의 핵심적인 방안으로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서로 논쟁거리들을 양보하며 대화하고 타협하는 것이다. 예컨대, 그는 의지의 자유선택에 대한 논쟁을 해결하기 위하여 사랑의 실천이 전제된 이신칭의의 공식을 "구원의 필수 조건"으로 제안한다.19)

에라스무스는 『교회의 일치』(Liber de sacrienda ecclesiae concordia)에서 카톨릭이 신교들과 타협할 수 있어야 하며 이들의 운동에 어느 정도의 자율권을 허용해 줄 수 있는 그러한 형태의 개방된 교회에 대한 이상을 가지고 있었다(LB. Ⅴ469-506). 당시의 거친 조류에서는 비현실적인 이상이며 더 이상 환영받을 수 없는 생각이었다. 에라스무스는 그가 말년에 쓴 소책자『교회에서의 화합의 회복』(On Restoring Concord in the Church)(1533)에서 교회 화합의 방안으로 양보와 관용을 통한 중도의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자유의지, 사자(死者)를 위한 기도, 성인들의 기원, 성상, 성물, 고해, 미사, 성일, 단식 등 교회의 논쟁적인 주제들에 대하여 사람들이 어떻게 동의를 끌어낼 수 있을까하는 물음에 대하여 에라스무스의 간결한 답변은 "서로 관용하라"이다. 에라스무스는, 우리가 신의 평화를 얻기를 원한다면 우리가 구해야 할 두 가지 필수적인 것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신학의 문제가 아닌 도덕의 문제로 직업을 가진 모든 사람들, 즉 교황과 군주, 행정관, 사제들은 물론 상인, 방앗간 운영자, 대장장이, 재봉사 등은 화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평화를 위한 또 하나의 필수적인 요소는 전통에 의해 전승되어온 모든 것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떠난다는 것은 안전하지도 유용하지도 않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20) 에라스무스에 따르면, 대립하고 있는 주제들에 대하여 사람들은 각자 자신들의 판단에 따라 결정해야 하며 이 같은 것을 상대방에게도 허락할 줄 알아야 한다. 예컨대, 성자들에게 기도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어떤 사람들은 신에 의해 성결하게 된 성자들이 기도하면 신은 악령을 추방하고 죽은 자를 일으켜 세운다고 믿는가 하면 다른 어떤 사람들은 직접 신실한 마음으로 성부·성자·성령에게 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으로 서로 논쟁해서는 안되고 서로 관용해야 한다. 에라스무스에 따르면, 분명히 관례화 된 미신들은 일소되어져야 하나 단순하고 헌신적인 마음은 그것이 비록 작은 오류를 지니고 있다고 할지라도 관용되어야 한다.21)

같은 맥락에서 성상과 관련하여 에라스무스는 우상은 허용되어서는 안되나 적절하게 그리스도의 삶을 표현하는 조상이나 그림들은 용납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성물도 성인들의 삶을 소중히 하고 모방하는 차원의 것이라면 관용될 수 있다. 에라스무스 자신은 고해성사가 그리스도에 의해 제정된 것으로 믿지 않지만, 그것은 옛 유용한 관습으로서 그것을 보존하고 올바로 사용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즉 무엇이 잘 못 되자마자 성급히 사제에게 달려간다거나 그것을 기계적으로 다루어서는 안되고 우리의 죄를 먼저 신에게 고백하고 적절한 기회에 고해를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사 제도의 경우 그것을 방해하는 사적인 미사 풍습은 제거되어야 하나 많은 세기에 걸쳐 용인된 그 자체가 지니고 있는 예배의 요소를 버릴 필요는 없다.22)

에라스무스는 각자 자신의 선택을 따를 것과 하찮은 것들에 대하여 불필요한 고집을 피하라고 한다. 그는 성찬식에서의 그리스도의 실질적인 존재를 믿으나, 그는 항상 그것의 존재를 규정하려는 신학자들의 노력을 비난한다. 그에게 화체의 교리는 교회의 초창기 믿음에 대한 불필요한 부가물로서 보였다. 규정하고 설명하려는 루터의 열광은 둔 스코트(Duns Scotus)의 복잡한 이론만큼이나 나쁘다. 에라스무스에게 형제애는 형이상학적 관조보다 훨씬 가치가 있다. 기존의 모든 엄격한 신앙 관례로부터 멀리 떨어져있는 에라스무스의 이 같은 근대주의(modern -ism)는 영적 복음주의의 가장 순수한 본질로 환원시키면서, 카톨릭 교회도 예수가 부여하지 않을 신앙의 관례들을 강요하지 말고 문을 활짝 열어놓을 것을 원한다.23) 그는 남용되고 있는 것을 즉각적으로 폐지할 것을 주장하지는 않으나, 그것들을 점차 제거하여 계몽에 이르도록 해야 한다고 보았다. 규칙과 의식들은 비본질적인 것으로 그것들의 무거운 짐과 영향력은 곧 인간의 양심에 자리를 내어 주어야 한다. 교회는 진지하게 성직자들의 결혼의 문제를 생각해야 하고, 무거운 짐을 가볍게 하고, 수많은 규칙과 규제들을 폐기해야 한다. 배우지 않은 자들을 위해 성경 번역판은 필요하며, 모든 일반적인 기도와 찬송 그리고 설교는 서민적인 언어로 행해져야 한다. 교회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위선과 형식주의 그리고 마음과 감정을 빈곤케 하는 모든 것을 폐기해야 한다.24)

실제로 에라스무스의 이러한 근대주의는 종교개혁 훨씬 이전에 속하는 1501년부터 그가 가르쳐온 것이었다. 그의『그리스도교도 전사 교본』은 의식·성상·성물 등에 관해 모든 의문을 제기했고, 균형감각과 영적인 가치만이 기독교인의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감동적으로 탄원했다(LB. Ⅴ 28D). 그러나 그것은 이 모든 상징물들의 완전한 폐지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어린아이와 장난감의 관계와 같이 아직 신앙적으로 미숙한 자들이 진정한 신앙적 지식에 이르기 위해 기존의 엄격한 신앙적 관례들을 적절하게 완화시켜야 한다는 탄원이었다. 그것은 또한 에라스무스에게 단순히 그리스도의 성품을 모방하는 시도를 의미했다. 이 같은 시도는 오직 지식을 통해 발견될 수 있으니, 여기에 바로 그리스도의 언행이 기록된 성경을 편견 없이 이성의 눈을 가지고 자유스럽게 관찰해야 하는 필요성이 있다. 그의 신약성서에 대한 끊임없는 주해와 개역(改譯)은 이러한 해방 운동의 작업을 의미했다.25)

요컨대, 이처럼 교회의 화합을 위해 신앙의 영적인 근대성을 강조하면서도 기존의 신앙적 관행에 대한 양보와 관용에 의한 에라스무스의 중도적 노력은 그가 카톨릭 측에 남아 있다고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본질적으로 카톨릭 측은 물론 루터 진영의 어느 한쪽에 서기를 거부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에라스무스는 그가 스스로 한 쪽과 관련을 맺는다면, 그가 지금까지 내세워온 모든 것을 저버리게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루터를 비난하는 것은 그가 그토록 미워한 형식주의를 지지하는 승려들의 입지를 강화하는 것이 될 것이었다. 반면에 개혁자들과 함께 하는 것은 그가 진정한 개혁이라고 생각한 그러한 개혁에 반기를 드는 것이 될 뿐만 아니라 불관용과 여러 종류의 새로운 형식주의에 동의하는 것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의 이 같은 중도적 태도로 에라스무스는 그의 적들 사이에 분노를 발생시켰고, 아직도 그의 이름과 함께 따라 다니는 비겁하다는 비난을 만들어 내도록 했다. 호이징가(Johan Huizinga)는 "그의 전 인격을 지배하는 비극적 약점, 이 궁극적 결론을 끌어내기를 거부하거나 그렇게 할 수 없는 무능"26)이라고 쓰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판단은 중도(middle way)가 에라스무스의 궁극적 결론이었음을 간과하고 있다.

결국 에라스무스의 화해를 위한 모든 시도는 전적으로 실패로 끝나고, 평화를 전혀 원하지 않는 쌍방으로부터 버림받고 절망적인 사람이 되고 만다. 그는 처음 로마 교회 안에서 어느 정도 개인적 자유를 유지하는 것은 가능했다. 그러나 종교개혁이 급진적으로 되어 감에 따라 구교 내에서의 이 자유는 더욱 강력히 규제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종교개혁에 대한 반동적인 기운이 일어나 옛 것에 대한 집착이 고집되고, 더욱 강한 차단에 의해 교회의 존속을 보장하려 했기 때문이다. 곧 바로 반동종교개혁의 시대가 와서 에라스무스의 이상은 설자리를 잃고 제 3차 트리엔트 공의회(1561/1563)의 결정에 따라 그의 저서들은 금서 목록에 들어가게 된다.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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