Ⅳ. 에라스무스의 교회 화합의 궁극적 근거: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관

종교개혁으로 교회가 분열되어 가는 과정에서 에라스무스가 얼마나 교회의 재 화합을 간절히 원했는가는 전 교회를 분열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 보는데서 절정을 이룬다. 바꾸어 말해서 에라스무스의 교회 화합을 위한 지금까지의 모든 시도는 궁극적으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교회관에 근거한다. "그리스도의 몸"은 에라스무스의 사상 구조에서 근본적인 요소의 하나로서 채택되고 있을 만큼 그의 신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28) 에라스무스는 "교회의 가장 신성한 몸의 살아있는 구성원"이 되는 것은 인간의 행복과 위엄의 본질적인 표시(CWE 29: 69)라고 말하면서, 이 그리스도 몸의 개념에 근거하여 사랑과 일치와 평화의 개념을 도출한다.

에라스무스는 교회의 이미지로서의 그리스도 몸이라는 개념을 그의 『그리스도교도 전사 교본』에서 많이 취급하고 있다. 그는 그 근거로써 널리 로마서 12: 4-6, 고린도전서 12: 12-27, 에배소서 4: 15-16을 인용하면서 교회의 통일, 즉 그리스도의 통일의 원리 아래 통일된 조화로운 구조로서의 교회에 대한 그의 절대적인 믿음을 증명한다.29) 교회에서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한 몸이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가 된다. 에라스무스는 결론 맺기를 "하나님, 그리스도, 그 몸과 구성원들은 모두 하나이다"(CWE 66: 95). 따라서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서로 사랑하는 기독교인들의 평화스런 통일체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하는 교회 공동체의 폭은 어디까지인가? 그 비전의 폭은 창조로부터 최후의 심판에 이르는 전 기간의 인류를 다 포함할 만큼 넓다. 즉 에라스무스에게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리스도를 공식적으로 믿는 자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창조(아벨의 교회)와 더불어 시작하고 마지막 승리로 끝난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그리스도 몸의 구성원이 되는 필수적인 조건은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고, 정당하게 살고자하는 진지한 욕망이다. 교회는 이러한 삶을 살려는 사람들로 구성된다. 그래서 에라스무스는 "그리스도는 동서남북의 어떤 주민이 되었건 모두를 끌어들인다. 세상에는 기독교 신앙이 전파되어야함에도 불구하고 아직 항해사나 지리학자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지역이나 섬 혹은 대륙이 있을 수 있다"(LB.Ⅴ1175A).라고 말한다. 그는 제논, 크세노크라테스, 소크라테스와 같은 철학자나 현자들이 유대-기독교도는 아니지만 그들의 삶에서 그러한 거룩함이 발견된다고 주장한다. 이 점에서 에라스무스는 토마스 모어보다 폭이 넓었다. 모어는 내적 교회의 경계선을 유대-기독교 계시에 대한 맹목적이지만 공식적인 신앙을 지닌 자들의 한계선 너머로까지 확대하지는 않았다.30)

한편, 에라스무스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그들의 공통의 머리인 그리스도로 인하여 통일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계열의 위엄과 기능을 지닌 많은 구성원들을 이루고 있다(CWE 66: 95-96). 즉, 교회는 동일한 부분들로 구성된 하나의 몸체가 아니다. 각 구성원들은 각기 독특한 성격과 기능을 지니며, 이 같은 다양성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조화 있는 통일체로 함께 묶어진다.31) 따라서 한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의 도움으로 새롭게 태어나고 교회공동체 안에서 형제애의 실천을 통하여 한 몸을 이룬다.32) "전체 그리스도인"인 교회는 크게 그리스도를 공동의 중심점으로 하여 그 기능이 다른 세 개의 동심원, 즉 복음 전도의 임무를 띤 성직자 층(사제들, 주교들, 추기경들, 교황 등), 그리스도를 위해 정의의 전쟁을 수행하는 세속 군주들(CWE 14), 그리스도와 가장 멀리 떨어져있는 평민들로 구성된다(CWE 15). 여기에는 중세기의 경우처럼 수직적인 가치의 차별은 없다.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각 기독교인들은 각자 자기의 자리를 지켜야 하며 각자 자신의 양심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그러나 이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개인주의는 인정되지 않는다. 한 개인에게 일어나는 것이 무엇이든지 전체에게 영향을 미친다. "당신과 그 몸체의 다른 구성원들에게 일어나는 일은 그리스도에게 연결되며, 하나님 자신에게까지 영향을 끼친다"(고전12: 26). 하나님, 그리스도, 그 몸, 그 구성원들은 함께 하나의 단일한 공동체를 구성한다.33)

그러면 에라스무스에게 있어서 이처럼 기능이 다르지만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교회의 궁극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첫째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라는 점이다. 에른스트빌헬름 콜스(Ernst-Wilhelm Kohls)는 에라스무스의 『그리스도교도 전사 교본』에서의 교회 개념을 "사랑의 공동체"34)라고 부른다. 에라스무스에 의하면 사랑은 신으로부터 나와서 결국 신으로 되돌아간다. 교회는 신적 사랑의 역사적, 사회적, 제도적인 표현이다.35) 교회의 몸인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며 우리 모두는 모든 것을 드려 하나님께 감사하고, 또 이웃을 위해서 사용해야만 하는 지체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아무도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능력에 따라서 공동체에 선한 일을 하며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모든 것으로 영광을 돌리게" 해야한다(LB.Ⅴ45F). 에라스무스에 따르면 농촌 사람과 도시인들, 농부와 시민들, 부자와 가난한 자, 권력자와 약자, 성직자와 평민 사이에 싸움이 있다면 그것은 비 기독교적이다. 그리스도의 몸인 이 새로운 공동체 안에는 오직 하나의 법, 즉 사랑의 법만이 적용될 뿐이다(LB.Ⅴ45DE). 교회 생활의 제도적인 양상은 성령의 내적이며 역동적인 힘의 표현으로서, 그리고 구성원 서로에 대한 사랑의 삶에 깊게 참여해 가는 것으로서 그 가치와 의미를 지닌다.36) 기독교인의 교제는 본질적으로 사랑의 교제이다.37)

『그리스도교도 전사 교본』의 유명한 다섯 번째 규칙에서 에라스무스는 사랑(charity)의 성격을 밝혀준다. "빈번한 교회 출석이나, 성자 상이나 타는 촛불 앞에서 무릎을 끓거나, 지정된 수의 기도를 반복하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에라스무스는 바울의 사랑에 대한 개념을 "우리들의 이웃을 교화하는 것, 모든 사람을 같은 몸의 구성원들로 배려하는 것,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간주하는 것, 형제의 번창을 자신의 것인 양 주 안에서 기뻐하고 그의 불행을 자신의 것인 양 해결하는 것"(CWE 66: 79)이라고 설명한다.

에라스무스는 성인으로 불렸던 영국의 토마스 베켓(Thomas Becket)의 온갖 보화로 뒤덮인 무덤과 흰 대리석으로 치장된 이탈리아의 성당에 대해 크게 분노하면서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교회를 이렇게 비판한다. "그러므로 내가 알기로는 수많은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몸들이 굶주려 죽어가고 있고, 헐벗어 유랑하며 비참함과 궁핍 가운데서 신음하고 있는데, 수도원이나 교회를 짓고 치장하는데 엄청난 돈을 퍼붓는 자들은 결코 영원한 죄로부터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LB.Ⅰ684 F-685C). 에라스무스에 의하면 기독교의 사랑의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가 가장 높은 규범이며, 다른 모든 것들은 이 규범에 의해 평가된다. 그는 카톨릭 교회가 내세우는 '권세'나 '지배권' 등의 권력적인 용어를 격렬히 비판하면서, 주는 그리스도 한 분뿐이며, '아버지'란 의미를 가진 말인 교황이나 대 수도원장은 권력을 지칭하지 않고 사랑을 뜻하는 말이며, 마찬가지로 사도, 목사, 주교도 봉사 직을 뜻하는 명칭이지 권력을 나타내는 직함이 아님을 명백히 한다(LB.Ⅴ49AB).

둘째로 에라스무스는 그리스도의 몸이 되고 있는 교회를 평화의 공동체로 본다. 사랑의 공동체가 지향하는 최고의 선은 평화이다. 에라스무스가 『그리스도교도 전사 교본』에서 분명히 해주는 바와 같이 교회는 그리스도 지배권 아래서 서로 사랑하는 기독교인들의 평화스런 통일체다.38)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평화스럽게 삶으로써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사랑을 표현해야 하는 개인적이고도 공동적인 책임을 지닌다. 그는 1521년 루터가 교황 레오 10세에 의해 파문되고 카알 5세에 의해 <제국 금지령>을 받았을 때, 독일의 인문주의자요 루터파였던 조나스(Justus Jonas)에게 "우리 신앙의 가장 중요하고 최선의 것인 기독교 세계의 보편적 일치"39)에 대해 말하면서 만약 교회에 평화와 일치가 없다면 교회의 이름은 무가치할 뿐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우리의 신앙이 성령 안에서의 평화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라는 말인가?"(A.Ⅳ1202. 9 s.)라고 그는 말한다.40) 루터가 그의 「95개조」를 제시했던 해인 1517년에 처음 출판했던『평화의 탄원』(Querela pacis)에서 그는 사람들에게서, 기독교인에게서, 도시에서, 궁정에서, 학자들에게서, 교회와 수도원에서, 어디에서든지 평화가 사라지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어떻게 그들이 스스로를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말할 수 있을까 반문한다. "위대한 선지자 이사야가 성령의 감동으로 모든 것의 화해자로 오실 그리스도를 말했을 때, 이 그리스도는 독재자의 모습으로 약속되었던가? 아니면 제왕으로서? 영웅적인 장군으로? 정복자로? 그렇지 않다! 그러면 어떤 모습이었던가? 바로 평화의 왕으로 약속되었다"(LB. Ⅳ 628B-629E).

에라스무스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일치와 상호 사랑"(CWE 27: 299)의 교사이다.41)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주와 주인에게 복종하고 따르기 위해 평화의 사람이 되어야한다. 오직 교회 내에서만이 평화가 진실로 꽃피울 수 있다. "교회의 경계선 밖에는 평화가 없다"(ASD 5-2 ; 344). 에라스무스는 교회에 평화적 개념을 부여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용어 외에 '그리스도의 신부', '그리스도의 무리'나 '양의 우리', '그리스도의 집', '그리스도의 새도시', '그리스도의 비둘기' 등의 이미지들을 사용한다(ASD 5-2: 344).

에라스무스에 의하면,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요 사랑과 평화의 공동체로서 하나가 되는데 있어서 성례전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점에서 헨쩨(Hentze)는 "성례전 공동체"를 에라스무스 교회관의 주요한 특징으로 언급한다.42) 에라스무스가 볼 때, 성례전들은 은혜를 부여하며, 더욱이 그것들은 많은 사람을 하나로 모은다.43) 또한 그것들은 구원의 수단이면서 교회 통일의 표시로 작용한다.44) 신성한 성례전들은 교인들을 하나로 가장 가깝게 묶는 특별한 상징이다(CWE 27: 304). 특히 세례와 유카리스트는 기독교 통일의 가장 신성한 상징들이다.45) 그리스도인은 세례 시 성령에 의하여 새롭게 태어나고 형제애의 실천을 통해 한 몸으로 융합된다.46) 마찬가지로 유카리스트는 이 같은 그리스도교의 사랑의 삶을 심화시키는 하나의 수단이다. 그것을 통해 사람은 그리스도의 영과 함께 하는 하나의 영, 그리스도의 몸과 함께 하는 하나의 몸이 된다.47) 세례가 통일과 조화로의 진입을 의미한다면 유카리스트는 교회의 통일을 유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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