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양장) 믿음의 글들 9
엔도 슈사쿠 지음, 공문혜 옮김 / 홍성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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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챠니티 투데이 20세기의 책들 시리즈(1)

포르투갈의 대서양 진출과 이를 이은 16세기초의 중국, 일본까지의 진출에는 두가지 動因이 존재했다고 한다. 첫째는 베네치아 중심의 동박교역의 우회로를 확보하여 무역의 우위권을 점령하는 것, 둘째는 카톨릭적 가치이다. 이는 처음에는 이슬람을 우회한 기독교 국가(프레스터 존)와의 연계를 위해 마련되었지만 점차 기독교전파를 목적으로 하게 된다.종교적 가치가 절대적이던 16세기에서 17세기초까지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물질적, 제도적 후원의 이유가 된다.

17세기에 오면서 상황은 급변한다. 팽창하여오던 네덜란드 상인들은 상업적 이윤을 위해 포루투갈인들이 일본을 '기독교화'시킬 위험이 있다고 비방함으로써 일본 영주들의 환심을 사는데 성공했다(김명섭, 대서양문명사,한길사) 그들은 일본인들이 카톨릭국가들에 비해 '덜 기독교적인'인 자신들을 선호하리라 믿었다. 그 예상은 적중했고 1624년과 1636년 에스파냐, 포르투갈은 일본에서 축출된다. 데시마섬에서 상업적 독점권을 갖게 된 네덜란드의 이익은 막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당시 서양사회가 명분으로 내세운 종교적 구신교 갈등이 얼마나 상업적, 국가적 이익을 이익을 위한 구실이었는지 보여준다.

바로 이런 시대를 살아간 한 신부의 신앙적 고민이 이 소설의 내용이다. 철저히 국가적 수준에서 자행되는 핍박과 이 가운데서 [사랑과 종교적 가치] 사이에 방황하는 한 개인의 처절함이 있다. [당신이 믿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인가? 아니면 종교의 하나님인가? 그도 아니면 아예 비인격적인 신인가?] 이 책은 이것을 묻는다.

배교자라고 선언하는 도그마적 사고와 사랑의 신적 계시에 대한 자기확신이 로드리고 안에서 충돌한다. 사랑을 택한 로드리고는 옳았는가? 모른다. 엔도 슈사쿠가 옳은지 알수 없는 만큼이나 로드리고의 판단에 절대적 가치 판단을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가 부딪히는 종교의 근원적 문제가 [인간의 공론에 의해 형성된 규정]인지 [살아계신 분과의 인격적 교제]인지는 항상 중요한 질문으로 남아있다.

종교의 왜곡은 항상 우리가 접하는 우리 자신의 문제이다. [인간인데...요새 세상에...남들이 다 하니...] 개신교 가치를 내세운 네덜란드의 유물적 사고나, 카톨릭 가치를 내세운 남미의 인종청소의 광란이나 모두 왜곡된 인간 안의 자기확신에 불과한 종교이다. 그것이 개인적 신조의 문제가 아니고 계시된 말씀일 때 이 문제는 심각하다. 타자에게 강요하거나 판단하는 근거로 신적 틀을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가운데 방황하는 로드리고는 사실 나의 모습이다. 그것이 나를 공감케 하고 가슴 아프게 한다. 어쩌면 어려움이 올때까진 그런 고민조차 않는 사실이 더 가슴아파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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