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속의 의술과 인술

시인의 입을 빌지 않더라도 사계절이 분명한 이 땅이기에 겨울이 어김없이 찾아온다. 이 땅의 입동(立冬)의식은 대학 입시와 함께 시작된다. 수십 년 동안 거의 매년 조령모개를 거듭해 온 대학입시이기에 전승되는 비법도 없다. 한 해 한 해 승부를 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렇듯 지극히 혼미한 제도 아래서도 결코 변하지 않는 뚜렷한 현상이 있다. 법대와 의대에 어김없이 우수한 수험생이 몰린다는 사실이다. 법률가나 의사가 사회에 기여하는 바는 적지 않지만, 그처럼 우수한 인재들이 기를 쓰고 매달릴만 한 가치가 있는 직업은 아니다. 법대, 의대를 선호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일신의 영달과 경제적인 안정에 있을 것이다. ‘사회정의’나 ‘인술(仁術)’이라는 숭고한 이념은 애초부터 명분과 구실에 그치는 경우가 태반이다.

의사와 법률가란 직업에 대해 문학이 취하는 기본 자세는 시기와 질시, 그리고 풍자가 특징이다. 문학이 사회의 거울이고 어느 사회에서나 이들 직업이 차지하는 의미는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다.

“크리톤이여, 나 대신 아슈클레피오에게 빚진 닭 한 마리 갚아주게.” 소신 때문에 죽으면서 소크라테스가 남긴 유언이다. 의술의 신에게 답례를 잊은 것을 일생일대의 부채로 여긴 것이다. 크세노폰이 전하는 ‘소크라테스 회상’에는 도제교육의 전형적인 예로 의사수업을 들었다. 스승의 시동 노릇을 통해 성장하는 전통은 오늘날에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유달리 학맥 전통이 강한 것이 의학교육이다.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는 통렬한 사회소설이다. 의사이자 선원인 걸리버가 진단, 해부한 법률가라는 직업은 “보수 때문에 검은 것을 희다고, 흰 것을 검다고, 말로 증명하는 기술을 훈련받은 패거리”이다. 그렇다면 법률가의 눈에 비친 의사는 어떨까?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1886)에 선연하게 드러난다.

각종 인연과 끈을 활용하여 세속적 성공을 거둔 고등법원 판사가 이름 모를 죽을 병에 걸리자 의사를 찾는다. 그런데 의사는 환자의 생명보다 병명에 더욱 관심이 깊다. 자신의 직업적 지식과 능력이 관심사일 뿐, 인간 그 자체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판사는 분개하지만 독자는 감탄한다. 어쩌면 의사도 판검사와 그리 같은가 라고. 그들도 피의자에게 적용될 죄명에만 관심을 두었지, 어디 인간 취급을 해주는가?

우리의 설화문학 속에는 살신성인의 의인이 많다. 모두가 서러운 신분이다. 몸과 마음을 바쳐 인술을 베푸는 사극 속의 의녀(醫女)들은 남을 구하기 위해 서역나들이를 감내한 바리데기의 후예일 것이다. 드라마 ‘허준’과 이제마의 인술이 빛나는 것은 그들의 신분이 중인에 불과하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의사가 상류 지배계급이 되면서 이미지는 달라진다. 청년의사들을 위한 교양서 ‘문학 속의 의학’(2002)에 단서가 제시되어 있다. 김동인의 ‘약한 자의 슬픔’을 보자. 엘리자베스의 몸을 유린한 남작, 그리고 강간자를 감싼 의사와 재판관, 이들 모두가 자신의 이익에 따라 타인의 몸을 재단하는 권력자인 것이다.

황석영의 ‘한씨연대기’ 에는 이데올로기 병에 물들지 않은 한 순수한 의사의 인생유전이 그려져 있다. 김일성대학 의학부교수가 전쟁의 소모품 신세가 되고, 월남하여 생계를 위해 무면허의사의 뒤치다꺼리 끝에 장의사로 전락한다. 오로지 약삭빠른 자만이 세월의 파도타기에 성공한다.

전광용의 ‘꺼피딴 리’의 임기응변은 실로 외과의사 이인국만의 장기가 아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대부분의 상류층 인물들에 공통된 처세술이다. ‘국어상용의 가’(國語常用의 家)로 지정 받은 자랑스런 황국신민, ‘불령선인’의 치료를 거부한 그는 일본의 뒤를 이어 지배자가 된 소련과 미국을 차례차례 ‘치질 핥기’로 섬긴다. 권력과 금력따라 움직이는 것은 어찌 그뿐이랴.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 그리고 내 자신이 미워졌다’ 라는 독백 속에 일말의 양심 찌꺼기라도 건질 수 있을지.

박완서의 ‘그 가을의 사흘동안’은 낙태왕국의 섬뜩한 현주소를 다시 보게 하는 시대의 거울이다. 역설적이게도 생명의 손길보다는 죽음의 칼을 휘두른 산부인과 의사가 자신이 설정한 퇴임을 앞둔 마지막 사흘이나마 실로 오랫동안 맛보지 못한 생명의 냄새를 갈구한다. 그러나 ‘사람백정의 손에 맡길 수 없다’는 황영감의 냉소에 아직도 가슴 한 구석에 남아 있는 히포크라테스의 선서가 아프다. 수능시험을 치르고 의대를 지망하는 청년들에게 상기시키고 싶은 구절이다. (안경환·서울법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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