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 유형지에서 (외)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19
프란츠 카프카 지음, 박환덕 옮김 / 범우사 / 199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변신

[개와 같이 잠을 자면 벼룩이 옮는다] 유대인 스승 뢰비에게 영향을 받기 시작한 28살의 카프카에게 아버지가 주는 경고다. 유대인인 아버지가 유대인 아들에게, 개라는 유대인에 대한 독일인의 모욕적 호칭으로, 그에게 유대의 정신이라는 벼룩이 옮겨왔다고 이야기한다. 유대인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아버지는 아들이 이제 유대인이 아닌 존재로 뿌리내려 주길 원했다. 유대의 정신 안에서 자신을 발견한 카프카는 이제 스스로 커다란 벼룩, 한 마리 벌레가 되어간다.  정작 유대인의 피를 물려준 아버지의 이 선언은 이작크 뢰비와의 만남을 통해 민족적 정체성을 발견하여 가는 그를 스스로 벌레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도록 만든 것이다.

그레고르이자 카프카인 그는 어느날 아침, 벌레임이 드러났다. 그의 유대인으로의 주장, 혹은 그 주장으로 말미암은 변신은 그에게 죽음 혹은 격리를 뜻한다. 그는 소통을 꿈꾸며, 그의 존재를 그대로 가진 채로 그의 가족과 직업, 이웃과의 관계가 지속되길 원한다. 하지만 그의 존재는 이미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다. 해답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것이고 또 [기대 당하고 있는 것]이다. 벌레인 식구를 가졌다는 고통을 더 이상 주지 않기 위해 가족의 눈앞에서 사라져줌 혹은 죽어줌. 이야기는 예기된 결론에 다다르고, 다시 가족에겐 평화가 찾아온다.

어느날 모임에서 미국에 산지 이제 20년을 넘어가는 어떤 분에게 들은 얘기다. 이민자의 자녀들이 느끼는 혼란. 아이들이 5, 6학년이 되며 불현듯 스스로가 한국인임을 발견하게 될 때, 혹은 친한 아이들이 피부색, 인종에 대한 사회적 압력으로 멀어져 갈 때, 아이들은 자신이 한국인인걸 너무 싫어하게 되는 때가 있다고 한다. 주위 사람과 똑같은 나였는 줄 알았는데, 다른 종족의 일원임을 알게 될때, 아이들이 느끼는 당연한 반응인지도 모른다. 그러다 더 크면 조금씩 스스로 자신을 받아들이고 상처도 아물며 조금은 위축되었지만 다시 부모와의 관계도 회복된다고 한다.

어쩌면 이 일은 굳이 이방인으로 사는 이민자 혹은 유대인만의 문제가 아닌지도 모른다. 문득 자신의 본래 모습을 소스라치듯 놀라며 발견하는 우리 각자의 모습일 수도 있다. 아름다운 삶, 깨끗한 삶, 지리멸렬한 구세대와 다른 삶을 꿈꾸던 자신에게서 갑자기 버러지와 같은 삶을 사는 자신을 본다. 나일리가 없는 모습의 나를 주위 사람은 이미 알고 있었다! 벌레. 악다구니가 되어가는 무명인, 밥벌이 존재. 그런 아저씨. 그런 아줌마. 나만 나를 더 나은 존재로 생각했던 것인가?

인간은 원래 그런 존재인지도 모른다. 주홍글씨를 각자의 가슴에 새긴, 자신만 모를 뿐이다. 점점 남을 욕할 수 없어지고, 스스로에게 기대할 것이 없어지는걸 깨닫는다. 혼란을 이겨낸 아이들처럼 언젠가는 스스로를 받아들이고 다시 일어나며 웃게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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