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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밥상
제인 구달 외 지음, 김은영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6년 2월
평점 :
서른이 넘으면 드러나든 드러나지 않든 몸에 갖은 이상이 생긴다고 하는 속설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서른 초반이 되자 마자 나의 건강검진 결과통지서의 의사 소견란은 나와는 전혀 관계없다고 생각해 왔던 질환명과 함께 '의증', '관찰요망'과 같은 말들이 따라붙기 시작했다. 아직 해당 질환의 환자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환자로 진입하는 문턱까지 올라간 수치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고, 이런 무시무시한 수치들이 기록된 건강검진 결과통지서는 마치 염라대왕의 초청장처럼 핏빛으로 물들여 보이는 듯했다. '아뿔싸, 이러다 가는 것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운동을 시작했다. 죽음의 문턱에서 달려나오는 심정으로 격하게 자전거를 탔고 아령을 들었다. 음식을 줄였다. 마음속으로 먹고 싶은 양이 10이라면 실제로는 7에서 8을 펐다. 소금이나 설탕이 많이 들어갔다 싶은, 그러나 대개 가장 먹음직스럽기 마련인 음식은 피해서 먹었다. 그렇게 10개월여 만에 10킬로그램을 뺐고, 그 후로 한두해가 지나자 미쳐 날뛰던 검진 수치가 잠잠해지고 변곡점을 그렸다. 아직 완벽히 건강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가장 흔하면서도 가장 무섭다는 두 가지 성인병의 수렁 바로 옆을 스치듯이 지나서 어느 정도 굳은 땅을 밟은 것 같다는, 가장 치명적인 시기는 지났다는 위로가 든다. 이렇듯 악몽같은 건강상의 위기를 경험하고 나서는 건강을 주제로 한 책에 관심이 부쩍 늘었고, 이런저런 건강 서적을 틈틈이 읽고 있다. 비록 아내로부터 선물받은 것이기는 하지만, 제인 구달의 '희망의 밥상'도 그러한 '내 몸 살리기 독서'의 연장선상으로서 읽기 시작한 책이다.
그러나 이 책을 단순한 건강 관련 도서 정도로만 생각한다면 이 책이 품고 있는 메시지의 삼분의 일 정도만 이해한 셈일 것이다. '침팬지의 어머니' 제인 구달답게, 그는 이 책을 통하여 현재의 기업적인 먹거리 생산방식이 내포하고 있는 위험성 또는 비윤리성을 인간의 측면, 동물의 측면, 그리고 지구의 측면을 고루 강조하여 역설하고 있다.
첫째, 인간의 측면. 저자는 자연친화적(sustainable; 흔히 '지속 가능한'으로 옮겨지는 본 단어에 대한 어색한 번역의 자기변론을 역자 후기에서 볼 수 있다.) 음식을 섭취하는 것보다 기업적으로 재배/사육된 농축수산물을 섭취하는 것이 인체에 훨씬 해롭다고 말한다. 일견 당연한 명제로 생각되지만, 이 책을 통해 철저히 깨지는 것은 기업적으로 생산된 음식이 몸에 그리 썩 좋지 않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별 생각없이 먹어 왔던 우리의 안일함이다. 유전자 조작 작물이 겉으로 보기에는 일반 작물과 큰 차이가 없게 여겨지지만, 기실 그 안에 살충제 유전자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사람들은 잘 느끼지 못하는 유전자 조작 유무의 차이를 야생동물은 아주 잘 알고 있으며 유전자 조작 농산물과 일반 농산물을 나란히 주면 거의 언제나 일반 농산물을 먹는다는 것. 이런 사실을 알게 되고서도 약간 더 싸다는 이유로 유전자 조작 작물을 별 생각없이 먹을 수 있을까? 저자는 이렇게 우리가 별 생각없이 먹어 왔던 기업적 농축수산물의 여러 숨겨진 비밀을 고발함으로써 그것들이 우리 몸속에서 생각이상으로 위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속된 말로, '이거 먹는다고 안 죽어' 할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둘째, 동물의 측면. 제인 구달의 동물 사랑은 짐작했던 대로 책의 곳곳에서 쉽게 발견된다. 그러나 그것이 배부른 동물애호가의 호사스런 과잉 애정으로 치부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 또한 책을 읽으면서 더욱 명백해진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동물에게도 사람들과 같은 감정이 있다는 사실이 점점 밝혀지고 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인간에게 제대로 된 감정이 있다면 동물들을 그렇게 혹사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일례로 푸아그라를 얻기 위해 사육되는 오리를 보자. 이 불쌍한 동물들은 목에 금속 파이프를 꽂고 펌프를 통해 엄청난 양의 옥수수를 곧장 식도로 받아들여야 한다. 간의 크기가 정상치의 열 배가 될 때까지. 이렇게 사육된 오리는 제 힘으로 걷거나 서기는커녕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다고 한다. 저자는 공장식 사육장에서 생산되는 가축의 경우에는 빨리 죽는 것이 감사한 것이라고까지 말한다. 부리와 발톱이 잘라진 채로 움직이지도 못하며 살아가는 닭, 뒤로 돌아설 수도 없을 정도로 좁은 우리에서 눈이 희미해진 채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돼지, 정신이 멀쩡한 상태로 도살 기계에 떠밀려 들어가 가죽이 벗겨지고 사지가 절단되는 소 등. 단지 효율성만을 목적으로 가축들을 지옥이상의 삶과 죽음으로 내모는 인간이 짐승보다 감정이 있다고 말하기는 힘들어진다.
셋째, 지구의 측면. 인간의 탐욕적인 기업적 농업은 넓은 땅을 오로지 한 가지의 수지 맞는 작물로 채우고, 지력을 되살리는 윤작을 비효율적이라고 배척하며, 개간이라는 이름으로 대수층이 마를 정도로 물을 뽑아낸다. 화학 비료와 농약 등으로 인해 한 때 비옥했던 토양과 깨끗했던 지하수는 끔찍하게 오염되었고 오랜 기간동안의 기업적 농법으로 현저히 떨어진 토양의 생산성을 더 많은 화학 비료로 보상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생태계를 유연한 방법으로 풍요롭게 유지시켰던 종의 다양성은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으며, 물은 점점 부족해져서 머지않은 미래에 석유가 아닌 물을 얻기 위한 전쟁이 예견된다... 저자는 기업적 농축수산업의 폐해가 얼마나 지구의 식량자원을 황폐화시키는지를 2005년 발행된 국제 연합의 <밀레니엄 리포트>를 인용해 무시무시하게 보여준다. 그 내용인즉슨, 2050년쯤이면 지구상의 모든 인구를 먹여 살릴 자원이 말 그대로 고갈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지구를 일회용 컵인양 사용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런 상황을 살펴 보건대, 인류와 지구는 멸망으로 이르는 심각한 성인병의 문턱에 와 있음이 분명하며, 지구의 건강도를 측정하는 수치가 있다면 지금 그 수치는 빨간색 위험 영역을 향해 분출되듯 올라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삼십대 초중반의 내가 실행했던 것과 같은 뭔가 중요한 변화가 없다면, 그 결말은 눈 멀고 발 잘린 후 결국 사망에 이르는 당뇨병과도 같이 끔찍한 재앙과 그에 뒤따르는 세계의 종말일 뿐이다. 모르는 사이에 우리를 서서히 죽음으로 이끄는 '침묵의 살인자' 당뇨병처럼, '희망의 밥상'같은 검진 결과통지서를 받기 전까지는 풍요로와 보이는 현대의 세계에는 그런 일이 전혀 일어날 것같지 않게 여겨지겠지만 말이다.
그럼, 개개인이 식이습관 개선과 운동을 통해 성인병의 문턱에서 유턴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인류에게도 종말론적 파국에서 탈출하는 방법이 있을까? 제인 구달은 그 해법이 유기농이라고 말한다. 농업의 현실을 모르는 소리라고? 글쎄... 지속가능하지 않은, 즉 미래가 없는 현실주의를 진정한 현실주의라 부를 수 있을까? 단위 면적당 소출이 유기농의 경우가 더 높다는 제인 구달의 주장을 굳이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기업형 농업에서 유기농으로의 신속한 전환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급격한 전환이 가능하려면 유기농만이 나와 가족과 지구가 살 길이라는 소비자의 자각이 절실하다. 제인 구달은 바로 이 부분에 방점을 두고 있다. 기업형 농업으로 피폐해진 지구를 구할 수 있는 진정한 영웅은 바로 유기농의 소중함을 깨달은 소비자로서의 '나'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