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는 물이 깊었다. 그때는 신과 인간이 격하게 함께 흘러갔다. 이후에 얕아진 물은, 더 맑아지기는 했지만, 항상 출렁거려야 했고, 바로 그 얕음 때문에 알러지에 걸린것처럼 끝도 없이 시달려야만 했다. 강줄기가 휘는 지점을 볼 때마다 의사는 자신의 실패를 생각한다. -24쪽
소년 시절에 사샬은 콘래드의 책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바닷가의 영국 중산층 가정에서의 삶이 가지는 지루함과 자기만족감에 반해, 콘래드는 바다를 통해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제공해 주었다. 하지만 그렇게 주어진 시적인 것에는 남성적이지 않거나 쇠락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반대로 상상할 수 없는 것에 맞서는 남자들은 모두 강하고, 절제되고, 말이 없었으며,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콘래드가 끊임없이 경계했던 능력은 동시에 그가 호소했던 바로 그 능력, 상상력이었다. 바다는 이러한 모순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것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바다는 상상력에 호소했지만, 상상 할 수 없을 정도로 성난 바다에 맞서기 위해서는 , 그 도전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상상력을 버려야만 했다. 상상력은 고립과 두려움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58쪽
기본적인 욕구들이 해결되는 것에 감사할 줄 알기 위해서는 상당한 정도의 자의식이 필요하게 마련이니까-69쪽
몸이 아플때는 많은 관계들이 단절된다. 질병은 무언가를 분리시키는 것으로, 왜곡되고 분열된 자의식을 형성한다-75쪽
특별하다는 느낌을 악화시킨다는 점에 있어서는 대부분의 불행감도 질병과 비슷하다. 좌절감은 자신만의 차별성을 확대시키며 스스로 커져간다. 객관적으로만 보자면 이는 비논리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 사회에서는 좌절감이 만족감보다 훨씬 더 일상적인 감정이며, 흡족한 느낌보다는 불행하다는 느낌이 더 흔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객관적인 비교의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자기 자신을 확인시켜 주는 무엇을 외부세계에서 찾지 못한다는 것이다. 확인의 부재는 곧 무기력함으로 이어지는데, 이 무기력함이 바로 외로움의 핵심이다. -81쪽
불행한 환자가 의사를 찾아와서 자신의 병을 이야기할때는, 적어도 자신의 그 부분(병)이 무엇인지는 알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의사의 임무는 분명 환자를 한 인간으로서 알아주는 것이다. 누군가 자신을 알아준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하면-이러한 알아줌에 환자 스스로도 알아보지 못하고 있던 자신의 성격의 면면까지 포함되는 것은 당연하다.-전혀 희망이 보이지 않던 불행감에도 변화가 생길 것이다 어쩌면 행복해질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될 지도 모른다.
불행한 사람으로 하여금 누군가가 자신을 알아준다고 느낄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의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불행한 사람은,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취급받을 것으로 예상한다. 이러한 아무것도 아닌 상태가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특별함을 아프게 확인시킨다. -82쪽
그는 자신의 상상력에 부합하면서도 억압되어 있지 않은 그런 경험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다. 새로운 경험에 대한 그러한 열정을 만족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면서, 현대사회에서 서른 살 이상된 사람들의 상상력은 사장된다. -85쪽
하나의 자아를 다양한 자아들로 확장하고 싶은 욕구는 아마도 처음에는 과시욕에서 출발한 것일 수도 있다.
자기 자신의'과시'를 판단해 줄 사람 역시 자신뿐이다. 지금의 동기는 바로 앎이다. 거의 파우스트적인 의미에서의 앎-86쪽
일반적 문화라 함은 거기에 비춰 개인이 스스로를 알아볼 수 있는, 적어도 자신의 모습중에서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부분을 알아볼 수 있는 거울의 역할을 해야 한다. -107쪽
상식은 절대 스스로를 가르칠 수 없으며, 스스로의 한계를 넘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점이다. 결핍되어 있던 기본적인 교육이 회복되는 바로 그 순간, 모든 상식적 생각들은 의심스러운 것이 되고 상식의 기능 전체가 파괴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110쪽
상식은 본질적으로 정적이다. 그것은 이데올로기에 속해 있는데, 그 이데올로기는 사회적으로 수동적인 사람들, 그들의 처지를 지금의 상태로 만든 것이 무엇인지, 또 누구인지를 절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데올로기다 .
그리고 그들이 '상식이잖아요'라는 말로 무언가를 정당화하려 할 때, 그것은 주로 자신들의 아주 깊은 감정이나 본능을 부인하거나 혹은 거꾸로 드러내려 할 때 핑계로 하는 말인 경우가 많다. -111쪽
비통함을 느끼는 사람들은 그들에게 생긴 모든 일들에서 비롯된 그 한순간에 발이 묶여 버린 사람들이다. 사건들의 불가역성이라는 견고함에 직면해서-미처 대비하지 못하고 있던 이들에겐 끔찍한 일일 것이고, 또한 완벽히 준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 그들의 경험은 같은 자리를 맴돌게 된다. 시간의 꼬리를 잡을 수도 없고, 자신의 꼬리만을 좇아, 그렇게 눈이 먼 채 인생의 어느 한순간 안에서만 맴돌 뿐이다. 그때 한순간은 얼마나 많은 것을 그 안에 포함하는가? -140쪽
앎에 대한 그의 열망은 자신의 시간을 채워 줄 건설적인 경험에 대한 열망이어서, 주관적으로 말하자면 그 시간은 비통함을 느끼는 사람들의 '시간'에 비견될 만한 것이 된다. -141쪽
고통의 원인이 개인을 대상으로 할 때, 개인이 그 고통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다는 것이 현실이다. 도덕적인 본보기와 실재적인 힘의 이용사이에는 넘어설 수 없는 견고한 경계가 세워져 있는데, 그 경계를 넘어선 곳에서 생존은 우연적인 것에 의해 결정될 뿐이다. -144쪽
예민한 척하지 말자. 예민할 수 있다는 특권이 바로 운 좋은 사람과 불행한 사람을 나누는 기준이다. -1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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