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명품이 좋다
나카무라 우사기 지음, 안수경 옮김 / 사과나무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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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책이 아닐 수 없다. 포디즘의 대량생산 시스템을 넘어 이제는 '다품종 소량 생산'과 '일상의 소비'가 하나의 생활 양식이 된 시대에서 창조되는 새로운 인간형. 그것이 바로 이 책의 저자와 같은 사람이 아닐까 싶다. 물론 그녀는 명품을 그냥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서 사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에 대한 정보를 빼곡히 알고 있는 매니아적 기질도 가지고 있다. 그런 속에서 일어나는 일상생활. 사실 이런 유형의 새로운 사람들은 내 주변에도 더러 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책을 읽고 느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일까? 참 별난 사람도 있다....는 이미 아닐테고(워낙 많으니까), 저러지 말아야겠다? 그러나 이 고도 자본주의 사회를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분 꿀꿀한 날에 쇼핑이라도 잔뜩 하고 싶은 충동을 느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가볍게 쓰여진 이 책은 너무나 무거운 주제를 등 뒤에 숨기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맑스가 그랬던가. 오늘날의 노동은 노동자 자신의 노동이 아니라고. 테일러와 포드의 공장이 한참 잘 나갈때부터, 그 공장의 노동자들은 자신이 만든 물건을 그 스스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 만들어야 했다. 즉, 노동을 파는 것이다. 이미 이때부터 인간의 노동은 상품화됐다. 그리고, 지금, 바로 이 대량 소비사회는 사람을 그런 괴로운 노동 작업장 뿐만이 아니라, 여가 시간도 모두 자신이 아닌 것을 탐욕하도록 만들었다. 이 책의 저자처럼, 자신 바깥에 있는 자본주의 상품만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또 그것만을 욕구하고, 거기서 만족하는 인간형. 노예이다. 스스로 만족을 느끼지 못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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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여행법 하루키의 여행법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마스무라 에이조 사진,김진욱 옮김 / 문학사상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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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감흥이야 각자에게 독특한 것이다보니 이 책을 다르게 보는 분들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신선한 것이었다. 개인적으로 여행이란 목적지도 없이, 그냥 막무가내로 정처없이 돌아다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치밀한 계획을 세워, 이미 여행 가기 전에 알만한 것은 다 아는 그런 것은 여행이 아니라고 본다. 가이드북보고 이미 다 아는 것을 왜 굳이 확인하려 하는가? 글쓴이가 거짓말이라도 했을까봐?

진정한 여행은 정말 떠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위기감이 있을때 폭발하는 것이다. 그날 무작정 떠난다. 하루키의 이 책은 그런 느낌을 잘 살려주는 책이 아닌가 싶다. 물론 여기에는 그가 소설에서 이미 보여준 그 특유의 무심함과 심드렁한 태도, 혹은 존재에 대한 허무감이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그런 정체성 혹은 성격이 여행을 통해서 자극받고 드러난다. 물론 어느 부분에서는 사실의 나열이나 교훈적인 내용이 좀 따분했지만, 전반적으로는 내 기분을 잘 달래주는 책이었다. 특히 '우동 맛여행' 파트에서 손그림을 직접 그려서까지 설명하는 이런 여행기가 또 어디 있을까? 그는 거창한 여행이 아니라 삶을 헤쳐나가는 진지한 여행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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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lue Day Book 누구에게나 우울한 날은 있다 블루 데이 북 The Blue Day Book 시리즈
브래들리 트레버 그리브 지음, 신현림 옮김 / 바다출판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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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단지 90여장의 사진과 그에 대응하는 하나하나의 문장만으로도 사람들에게 웃음과 생각, 그리고 위로와 다시 살아갈 힘을 준다. 한마디로 보석같은 책이라고 할까? 이 책에서 만약 사진이 사람이 모델이었다면 이만큼의 감흥은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일단 함께 살아가는 생명과 자연세계를 보여준다. 한편으로는 복잡한 사회 속에서 좀 단순하게 생각하며 살자는 메시지도 주는 것 같다. 또한 놀라운 점은 이 책의 문장들인데, 그것은 각각의 매력적인 사진들에게 영혼을 불어넣는다.

사진만 죽 배열이 되어 있었다면, 이것은 다만 '동물의 세계'에 지나지 않으며 인간과의 교감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하나하나의 문장들은 정말 우울한 날을 만난 사람들에게 딱 필요한 친구와 그들의 위로를 들려준다. 그 문장과 사진 속의 동물들은 정말 오래된 친구들처럼, 독자에게 때로는 웃음을, 때로는 교훈적인 말을, 때로는 동감의 제스처를 보여준다. 팍팍한 삶의 끝날에 다시 살아갈 힘을 주는 책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삶 속에서 발견해야 하는 가치를 알려주는 책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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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문화의 몰락 - 기업의 문화 지배와 교양 문화의 종말
모리스 버만 지음, 심현식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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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만이 말하는 '미국 문화의 몰락'은 일단 문화에 국한된 것이 아니며, 미국에 국한된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첫째, 문화란 것은 그 사회의 물질적 기반에 토대를 두고 있는 정신적인 차원인데, 이 책에서 말하는 '문화'의 물질적 기반은 바로 자본주의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자본주의는 오늘날의 세계를 거의 하나로 묶고 있는 유일한 단일 메커니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버만의 '미국 문화의 몰락'은 자본주의 생산체계의 한계와 모순입니다. 그 속에서 생산되는 자본주의적 주체들과 그들의 자본주의적 일상 영역은 문화란 것 역시 자본주의화 합니다. 가치와 질적인 다양성을 본질로 하고 있는 '문화'는 여기서 필연적으로 몰락하게 되죠.

버만은 '사회적 불평등, 사회보장제도의 점진적인 붕괴, 지적 능력의 상실, 정신적 죽음 등이 미국 문명의 몰락의 4가지 원인이라는 것을 실제로 증명하기는 어렵다'(89쪽)며 엄살을 피워대지만, 제가 논증한 것처럼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한계로 보면 쉽게 증명이 됩니다. 물론 여기에 대해서는 많은 실증적 연구가 있었구요. 다만, 저자인 버만은 자신의 전공영역 탓인지 '문화' 자체를 실재론적 입장에서 파악하다보니 증명하기 어렵게 느낄 뿐입니다. 그러나 마빈 해리스(Marvin Harris)와 같은 '문화유물론'의 입장에서 사회의 물질적 차원으로 문화적 영역이 환원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저자인 버만의 입장에는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앞에서 논증했던 것 뿐만이 아니라, 대다수의 학자들이 문화를 실재론적인 입장에서 이해하지는 않기 때문에 이 결론은 큰 무리가 없을 듯 합니다.

지금까지 '미국 문화의 몰락'이 '자본주의 생산체계의 한계와 모순'의 표피일 뿐이라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다음으로는 저자가 말하는 '수도사적 해법'에 대해서 언급해 봅시다. 사실 버만이 말하는 수도사적 해법의 타당성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일단은 중세 수도사와 12세기 문화 부흥에 대해서 깊은 지식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대안 자체가 허술하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저자가 말하는 수도사적 해법이라는 것은 다소 두리뭉실하지만, 그 요지는 볼테르 식의 건전한 회의주의와 개인의 창의성 발휘, 전통적인 기술, 남에 대한 배려, 학문의 정통성 보존, 계몽주의 지적 전통,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투쟁, 개인적 성취 및 독립적 사고 등입니다(208-209쪽). 즉, 소비주의 문화를 벗어나서, '나름대로의 바람직한 생활방식을 '수도원'으로 삼아 전통적인 좋은 문화유산을 자신과 후손들을 위해 보존'(209쪽)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정말 도덕 교과서에나 나올 듯한 말 아닙니까? 더욱이 이런 그의 주장이 들뢰즈(Gilles Deleuze)와 가타리(Felix Guattari)의 '노마돌로지(nomadology)'를 언급하는 것에로까지 이어져 있다니 참 어이가 없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비판은 매우 길기 때문에 언급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요점은 저자 버만은 보드리야르를 언급하는 정도에서 '노마돌로지' 개념을 이해했다는 점입니다. 두 철학자를 아시는 분이라면 이 개념이 얼마나 자주 곡해되어 있는지 아실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유목주의가 아닙니다. 버만은 개인주의를 강조하는 차원에서 그들의 이 개념을 빌려온 것 같은데, 사실 노마돌로지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반-자본주의적 논지를 충실하게 이해한 다음에서야 설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탈주선', '리좀', '노마드' 개념은 버만이 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이 책의 뒷부분에서는 참 많이 실망했습니다.

정리하겠습니다. 제가 모리스 버만의 '미국 문화의 몰락'을 읽은 후의 감상은 한 순간의 번뜩임은 되지만 자세히 보면 그 이상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전제[역사결정론, 문화적 실재론]가 불합리하며, 논리전개[자본주의 생산체제를 보지 못하고 '미국'과 '문화'라는 국지적 영역의 징후만을 언급함]가 엉성하고, 결론[제기된 문제에 대한 어떤 정당성이나 효과도 가지지 못하는 수도사적 해법]이 황당합니다. 어떻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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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웃을 사랑하라 - 20세기 유럽, 야만의 기록
피터 마쓰 지음, 최정숙 옮김 / 미래의창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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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다루어진 보스니아 내전의 야수적인 만행은 이미 서양의 이성들에겐 골깊은 문제였습니다. 그 시작은 바로 유태인 학살(genocide)이었죠. 이 문제 때문에 하버마스(J. Habermas)와 바우만(Z. Bauman)은 대립했죠. 즉, 하버마스가 그런 학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근대적 이성의 기획은 아직 실패하지 않았다고 보았죠. 다만, 분리된 '생활세계'와 '체계'를 '소통'으로 다시 복원하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바우만은 근대적 이성은 실패했다고 보았죠. 즉, 그는 유태인 집단학살 문제를 천착하면서 탈근대적인 윤리학을 주장합니다. 즉, 죽음의 '범속화(Banalisierung)', '아디아포라이제이션(adiaphorization)', '무언의 요구(unspoken demand)', '무조건의 책임성(unconditional responsibility)'이 그런 개념들이죠.

우선, 범속화는 우리가 점차 일상 속에서 실존적으로 유의미하지도 않고 치명적이지도 않은 죽음의 경험에 노출되어서 그것에 무감각해진다는 것입니다. 일상의 범죄와 살인이 그것을 유도하며, 더 나아가 전쟁과 같은 것은 그런 것을 극대화하죠.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한 지난 걸프전이나 빈 라덴을 잡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한 장면은 CNN을 통해서 마치 게임처럼 전세계에 방송되었죠. 그 곳 현지의 사람들은 정말 지옥같은 상황에 있었는데도 전세계의 지성들은 그것을 지켜봤죠. 수많은 민간인의 희생이 그들이 규정한 '적'을 타도한다는 미명하에 눈감아졌습니다.

다음으로, 아디아포라이제이션은 모던적 윤리 규제 방식이 만들어내는 일종의 도덕적 무관심입니다. 즉, 특정 행동이나 행동의 대상을 도덕적으로 중립적이거나 또는 무의미하게 만듦으로서, 그 행동이 마치 도덕적 가치 평가로부터 면책이 가능한 것으로 인식되게 만들죠.

마지막으로, 무언의 요구와 무조건의 책임성은 이런 두 상황에 대한 바우만의 최소한의 해법입니다. 즉 이 둘은 늘 존재하고 있으며, 존재하여 왔고, 존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도덕적 상황에 던져져 있음을 생각한다면, 무언의 요구와 무조건의 책임성은 그 상황의 당사자들 사이의 관계에서 있어야할 도덕적 기본전제입니다. 근대적인 보편적 도덕모델은 이제 적용하기가 곤란해졌지만, 도덕적으로 판별하기 애매한 수많은 상황 속에서 이성의 탈을 쓰고 야만적 행위를 저질러서는 안되기 때문에 이것은 최소한의 전제입니다.

저는 바우만의 주장에 공감합니다. 피터 마쓰가 보여준 상황과 같은 것은 여전히 역사에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볼 때, 과학기술은 발전하지만, 역사가 진보한다고 단언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두 가지입니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보편적인 도덕을 서로 약속할 수 있는지 하는 것, 그리고 그것이 약속될 수 있다면 어떻게 그것을 인류와 세계 속에 굳건히 실현할 수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강대국들이 힘의 논리를 도덕적인 것으로 미화하는 경우를 우리는 많이 보아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보편적인 도덕도 아니며, 올바른 평화의 유지방법도 결코 아닙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에게 평화는 어떻게 가능할까요? 우리가 무언의 요구와 무조건의 책임성을 발휘할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세계사에 광기와 폭력이 아닌, 이성을 구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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