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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웃을 사랑하라 - 20세기 유럽, 야만의 기록
피터 마쓰 지음, 최정숙 옮김 / 미래의창 / 2002년 4월
평점 :
절판
이 책에서 다루어진 보스니아 내전의 야수적인 만행은 이미 서양의 이성들에겐 골깊은 문제였습니다. 그 시작은 바로 유태인 학살(genocide)이었죠. 이 문제 때문에 하버마스(J. Habermas)와 바우만(Z. Bauman)은 대립했죠. 즉, 하버마스가 그런 학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근대적 이성의 기획은 아직 실패하지 않았다고 보았죠. 다만, 분리된 '생활세계'와 '체계'를 '소통'으로 다시 복원하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바우만은 근대적 이성은 실패했다고 보았죠. 즉, 그는 유태인 집단학살 문제를 천착하면서 탈근대적인 윤리학을 주장합니다. 즉, 죽음의 '범속화(Banalisierung)', '아디아포라이제이션(adiaphorization)', '무언의 요구(unspoken demand)', '무조건의 책임성(unconditional responsibility)'이 그런 개념들이죠.
우선, 범속화는 우리가 점차 일상 속에서 실존적으로 유의미하지도 않고 치명적이지도 않은 죽음의 경험에 노출되어서 그것에 무감각해진다는 것입니다. 일상의 범죄와 살인이 그것을 유도하며, 더 나아가 전쟁과 같은 것은 그런 것을 극대화하죠.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한 지난 걸프전이나 빈 라덴을 잡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한 장면은 CNN을 통해서 마치 게임처럼 전세계에 방송되었죠. 그 곳 현지의 사람들은 정말 지옥같은 상황에 있었는데도 전세계의 지성들은 그것을 지켜봤죠. 수많은 민간인의 희생이 그들이 규정한 '적'을 타도한다는 미명하에 눈감아졌습니다.
다음으로, 아디아포라이제이션은 모던적 윤리 규제 방식이 만들어내는 일종의 도덕적 무관심입니다. 즉, 특정 행동이나 행동의 대상을 도덕적으로 중립적이거나 또는 무의미하게 만듦으로서, 그 행동이 마치 도덕적 가치 평가로부터 면책이 가능한 것으로 인식되게 만들죠.
마지막으로, 무언의 요구와 무조건의 책임성은 이런 두 상황에 대한 바우만의 최소한의 해법입니다. 즉 이 둘은 늘 존재하고 있으며, 존재하여 왔고, 존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도덕적 상황에 던져져 있음을 생각한다면, 무언의 요구와 무조건의 책임성은 그 상황의 당사자들 사이의 관계에서 있어야할 도덕적 기본전제입니다. 근대적인 보편적 도덕모델은 이제 적용하기가 곤란해졌지만, 도덕적으로 판별하기 애매한 수많은 상황 속에서 이성의 탈을 쓰고 야만적 행위를 저질러서는 안되기 때문에 이것은 최소한의 전제입니다.
저는 바우만의 주장에 공감합니다. 피터 마쓰가 보여준 상황과 같은 것은 여전히 역사에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볼 때, 과학기술은 발전하지만, 역사가 진보한다고 단언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두 가지입니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보편적인 도덕을 서로 약속할 수 있는지 하는 것, 그리고 그것이 약속될 수 있다면 어떻게 그것을 인류와 세계 속에 굳건히 실현할 수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강대국들이 힘의 논리를 도덕적인 것으로 미화하는 경우를 우리는 많이 보아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보편적인 도덕도 아니며, 올바른 평화의 유지방법도 결코 아닙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에게 평화는 어떻게 가능할까요? 우리가 무언의 요구와 무조건의 책임성을 발휘할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세계사에 광기와 폭력이 아닌, 이성을 구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