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피리
한하운 지음 / 미래사 / 199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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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한하운 시인의 詩들을 중학교 문학 교과서에서 읽었을 때엔, 다만 그의 시를 소리내러 읽었던 것 뿐이었다. '나는/나는/죽어서/파랑새 되리(「파랑새」)'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참고서를 통해 어렴풋이 알았지만, 그의 詩가 가진 슬픈 힘과 절규를 우리는 보지 못했다. 어쩌면 그것을 보지 못하게 하려했던 어른들의 모종의 의도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십자가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위해 한평생 희생을 알게 된다고 양귀자씨가 그랬던가.. 한하운 시인은 자신을 문둥이라고 서슴없이 부른다. 그러나, 그렇게 불러야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못내 이 세상을 살기 위해서는 예컨데, 쿨리(C. H. Cooley)의 면경자아 이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자신을 스스로 문둥이라도 불러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이 비정한 도시의 사람들이 강요하는 것이다.

나는 알지 못했다. '신을 벗으면/버드나무 밑에서 찌까다비를 벗으면/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全羅道길」)'와 같은 싯귀를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지금까지 그들을 혐오하고 기피하고 손가락질하는 법만을 배웠지, 그들과 대화하고 부대끼고 마음을 털어놓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나를 도양하는 것이면서, 더 나아가 세상을 정화하는 것이다.

시인의 「어머니」와 같은 시를 읽으면 나는 그들의 소수이면서 특이한 삶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다. 그를 낳고서도 기뻐했던 어머니인데, 그런 어머니인데 세상은 어떤 용서나 화해도 주지 않는다. 다만 양지를 위해, 음지에서 숨어있으라고 전라도행을 강요할 뿐이다. 그런데도 '아 하나밖에 없는/나에게 나의 목숨은/아직도 하늘에 별처럼 또렷한 것이냐(「목숨」)'고 외쳤던 시인. 살아있으면서 끊임없이 죽어줬으면, 내 곁에 오지 않았으면 하는 시선에 시달렸을 시인. '그래도 살고 싶은 것은 살고 싶은 것은/한 번밖에 없는 자살을 아끼는 것이요(「봄」)'라고 체념했던 시인. 그러나 시인은 나즈막하게, 그러나 또렷또렷하고 힘있게 말한다.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라고. 당신들이 생각했던 문둥이가 아니라고. 정말 아니라고.

나는 장애인의 한 사람으로 당신의 말에 뜨거운 박수를 보내고, 당신의 말에 깊은 신뢰를 보내며, 당신의 행동에 두 손 잡고 연대하리다. 한하운이여, 아파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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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무라카미 류 지음 / 예하 / 199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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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류의 소설은 국내에 아마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만큼이나 많이 번역되어 있고 인기도 많을 것이다. 나 개인적으로는 다자이 오사무 주간이나 선대스 키드 풍의 일본현대소설이 더 좋아졌지만, 학창시절 무라카미 류는 나에게 중요한 의미로 다가왔다.
특히 이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가 뿜어냈던 허무와 절망은 깊은 인상으로 刻印되었던 것이다. 요즘엔 국내에도 이런 것들을 소설로 적어내는 것이 금서로까지 묶이지는 않을만큼의 상황이 되었지만, 아직까지 그 의미는 일본과 국내에서 많이 다르다고 생각된다. 예컨데, 김태형 시인이 「로큰롤 헤븐」에서 보여주었던 그러한 쾌락에 관한 일련의 단어들이 20년 가량 전에 발간된 이 책의 의미보다 상당히 낧아 보이는 것도 그런 생각을 짙게 한다.

이 책의 초판이 발행되었을 때, 이것이 그 집단섹스의 문제로 금서가 되었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었다. 왜냐하면, 책의 컨텍스트는 그것이 마리화나나 집단섹스 등의 소재를 다루었다고 해서 그것이 퇴폐적이고 단순한 쾌락을 서술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문호개방 이후 근대화를 통해 달성된 사회 속에서 일본 젊은이들의 상실감과 좌절감이었다. 그들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류가 릴리에게 가르켜보였던 검은 새는 나에게 그렇게 보였다. 物神이 지배하는 사회를 뒤덮은 검은 새. 근대화와 자본이라는 검은 새. 그것이 일본의 젊은이들에게 방향을 잃게 만들었다. 스스로를 텅 비어있는 쓰레기로 치부하는 그 세계의 절망 속에서 마리화나나 집단섹스는 아무런 쾌락이나 의미도 지니지 못했다. 그들은 그냥 의미없이 그런 행위들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나에게 쓸쓸하고 황량하게 읽혔다. 일본을 뒤쫓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앞으로 이러한 황량한 모래바람이 불어닥칠테지. 그때 나는 어떻게 이 슬픔들을 추스리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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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세노야 문학과지성 시인선 95
곽재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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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구 시인의 시집 가운데,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집이 이것이다. 이 시집 가운데 「어란진에서」는 학창시절에 외우고 다니면서 즐겼던 것이다. 특히, 고등학교 때 문예부를 하면서 문학에 대한 열정을 품었던 나의 10-20대 시절을 되짚어보면 그때가 참 그립다.

삶에 대한 진지하지만 무겁지 않은 작은 열의와 작은 희망, 그리고 작은 화해와 직관을 보여주고 있는 곽재구의 시집은 그때 내가 사랑했던 시집이다. 그래서 「어란진에서」를 읽으면 결국 문학을 택하지 못했던 내 삶의 진로와 그때 나를 잠시나마 문학에로 매료시켰던 문단의 형과 누이들의 얼굴이 교차해서 나는 깊은 상념에로 이끌린다.

특히 나에게 곽재구의 詩들을 엮어 보내주었던 J형의 친철이 아니었다면 나는 학창시절 남들과는 다른 생각과 조숙함을 틔워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형의 친철은 곽재구를 통해서 나타났고, 곽재구 역시 그의 시를 통해서 나에게 또렷한 성찰들을 불러일으켰으니, 둘은 실재로 중첩되어 있는 나의 앨범의 옛사진과 같은 것이라 하겠다.

앞에서 나는 '또렷한 성찰'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곽재구 시인의 詩에 대한 나의 이마쥬이다. 우선, 그의 시들을 사실적이다. 그는 과거의 역사로 남아있던 아픔들이 이미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아직도 남아있는 아픔들이라는 것을 우리의 주변에서 끌어내어 보여준다. 또 현재 우리의 주변에서 무심코 일어나는 작은 일들을 스케치하여 이들에 대한 성찰을 독자들에게 자연스럽게 제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곽재구의 詩를 읽는 사람들은 그가 제시한 문제제기에 대해 어떻게든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서, 곽재구가 제시한 일련의 서정시들을 읽는다.

결국, 나에게는 시인이 하나의 문제제기와 자신의 답을 병렬적으로 보여준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 방법은 매우 힘있고 선명하여 독자들에게 어떤 성찰을 계기지운다는 점에서 그의 문학은 매력있다. 단지 시인의 감성에로 들어오기를 바라는 시가 아니라, 시인의 감성과 독자의 감성이 같이 交感할 수 있도록 하는 힘이 그의 매력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독자들에게 곽재구 시인의 시를 추천한다. 책이 아니면 우리 언제 같이 생각해볼 겨를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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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정현종 지음 / 미래사 / 199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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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은 같은 제목의 영화로도 유명했는데, 나는 아직 그 영화는 보지 못했다. 어떤 내용인지 잘 모르겠지만, 보고 싶은 생각도 별로 없다. 대개 유명한 글의 제목이나 한 구절을 따와 만든 작품은 엉성하고, 더러는 그 구절과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구절이 영화 제목으로까지 등장한다는 것은 시인의 글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냐는 것을 반증한다고 할 수 있겠다.

정현종 시인은 내가 첫시집 <사물의 꿈>(1972)을 펴냈을 때부터 좋아했다. 이후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1984)이나 시론집 <숨과 꿈>(1982) 등에서 그의 글을 종종 접하였는데, 나에게 정현종 시인에 대한 인상은 좋게 남았다. 여기서 '좋다'는 것은 그의 詩가 철학적으로 읽혔다는 뜻이다.

물론, 무엇이 철학적으로 읽혀서 좋은 것이 아니라, 다른 시인들의 시와 달리 철학적인 문제와 밑그림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시인이 詩를 쓰면서 얼마나 많이 고심하였고, 노력을 들였는가를 알 수 있었다는 것이다. 신대철 시인 풍으로 이야기하면, 투명한 닻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라고 할까?

그런데 정현종 시인의 詩가 가지는 중요한 이마쥬를 하나 꼽자면 운동성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 의미에서 이 돛은 먼 바다까지 나아가는 원양어선 쯤에 걸맞는다고 볼 수 있겠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는 그런 정현종 시인의 시선집이다. 물론, 이 책을 수능이나 다른 시험을 위해 사보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의 시는 아름답다. 첫 시인 '獨舞'부터 시작되는 저 투명한 운동성. '事物'에 대한 집요한 성찰이나, '공중에 떠 있는 것들' 연작은 이런 운동성을 한껏 도드라지게 한다.

해제에 김치수 선생조차 그의 시들을 '움직임과 바라봄'으로 규정하지 않는가! 그런 의미에서 그의 시는 철학적이다. 그러나 서양철학에서는 사물이나 이마쥬는 '동일성'이 없는 판타즈마(환각)으로 치부하고 무시한다. 운동성 또한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는다. 그래서 시인은 시를 썼는가보다. 이것은 거의 정확하게 보인다. 끝없이, 그러나 가만히 사물과 그 움직임을 바라보는 시인의 맑은 눈. 그 풍경을 생각하고 이 시선집을 읽으면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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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 1998 제1회 백석문학상 수상작 문학과지성 시인선 220
황지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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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를 쓰는 분들이라면 황지우 선생은 유명인사이고, 누구나 한 번쯤은 일게 된다. 그런데, 이 시집은 개인적으로 하나의 전회를 이루는 책으로 보여졌다. 전부터 禪에 관해서 언급은 하였지만, '나는 환자로서 병을 앓으면서 병을 가지고 깨달음을 실행했던 유마힐 생각이 많이 났다'고까진 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말이다.

詩를 쓰고 그것에 많은 애착을 가지기는 하였지만, 나는 도통 황지우 시인의 詩를 이해하지 못하겠다. 이번 시집에 대해 평론가들은 투명성의 확보나 '겹언어'를 사용한 기법적인 긴장을 이야기하면서 우리 詩史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할 그런 시집이라고 격찬을 아끼지 않는데, 나는 잘 모르겠다. 차라리 <새도 세상을 뜨는구나>나 <나는 너다>, 그리고 문제작인 <게눈 속의 연꽃>이 더 좋았던 것 같다. (여기에 대해서는 많이 아시는 분께서 좀 가르쳐주시기 바란다)

즉, 나에게 있어 황지우 시인은 처음에는 잘 와닿았는데, 이후로 갈수록 이상하게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오히려 그의 언어를 잘 알아들을 수 없게 되었다고 할까? 아마 이렇게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시인의 시들 가운데에는 시인이 자기 밖으로 시를 내어놓는 경우가 있는 반면, 다른 어떤 경우들은 시인의 안으로 시를 찾으러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황지우 시인의 詩는 시인의 몸 안에 있다. 그래서 내가 열심히 찾으러 들어가야 하는데, 그게 여의치 않다.

물론 그것이 시의 특성일수도 있겠지만, 나에게 적어도 불편한 심기를 주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분명 무엇인가가 있을텐데, 그것을 알 수 없다는 것. 나는 철학을 전공하는데,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흔히들 알쏭달쏭하다고 한다. 그런데 황지우 시인의 시를 보니 그렇다.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보통 시집 마지막의 해설을 잘 읽지 않는데, 그것을 읽어보아도 잘 모르겠다. 몸과 몸으로 엉켜붙어 있는 것은 하나의 祭儀的 연극일 뿐이라고? 어느 분께서 나에게 조금 알기쉬운 해설을 드렸으면 감사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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