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류의 소설은 국내에 아마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만큼이나 많이 번역되어 있고 인기도 많을 것이다. 나 개인적으로는 다자이 오사무 주간이나 선대스 키드 풍의 일본현대소설이 더 좋아졌지만, 학창시절 무라카미 류는 나에게 중요한 의미로 다가왔다. 특히 이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가 뿜어냈던 허무와 절망은 깊은 인상으로 刻印되었던 것이다. 요즘엔 국내에도 이런 것들을 소설로 적어내는 것이 금서로까지 묶이지는 않을만큼의 상황이 되었지만, 아직까지 그 의미는 일본과 국내에서 많이 다르다고 생각된다. 예컨데, 김태형 시인이 「로큰롤 헤븐」에서 보여주었던 그러한 쾌락에 관한 일련의 단어들이 20년 가량 전에 발간된 이 책의 의미보다 상당히 낧아 보이는 것도 그런 생각을 짙게 한다.이 책의 초판이 발행되었을 때, 이것이 그 집단섹스의 문제로 금서가 되었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었다. 왜냐하면, 책의 컨텍스트는 그것이 마리화나나 집단섹스 등의 소재를 다루었다고 해서 그것이 퇴폐적이고 단순한 쾌락을 서술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문호개방 이후 근대화를 통해 달성된 사회 속에서 일본 젊은이들의 상실감과 좌절감이었다. 그들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알 수 없었던 것이다.류가 릴리에게 가르켜보였던 검은 새는 나에게 그렇게 보였다. 物神이 지배하는 사회를 뒤덮은 검은 새. 근대화와 자본이라는 검은 새. 그것이 일본의 젊은이들에게 방향을 잃게 만들었다. 스스로를 텅 비어있는 쓰레기로 치부하는 그 세계의 절망 속에서 마리화나나 집단섹스는 아무런 쾌락이나 의미도 지니지 못했다. 그들은 그냥 의미없이 그런 행위들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나에게 쓸쓸하고 황량하게 읽혔다. 일본을 뒤쫓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앞으로 이러한 황량한 모래바람이 불어닥칠테지. 그때 나는 어떻게 이 슬픔들을 추스리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