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이 있었다
임영태 지음 / 창해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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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이 주는 존재의 사색

 사실 달빛은 존재하지 않는다. 달은 빛을 내는 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달은 언제나 우리에게 사색의 빛을 던져 주곤 한다. 비록 지금은 달이 지구 주위를 돌고 있는 광물 덩어리라는 것이 밝혀졌지만, 달에 얽힌 모든 상상과 사색들은 나에게는 아직 생생한 신화로 남아 있다.
 게다가 달빛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그래서 달빛은 헤어지는 두 아이를 모두 집까지 바래다 줄 수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의 달빛 역시 세 명의 주인공을 따라다니며 그들의 상처와 고통의 삶을 비추어 준다.

깡패와 시인, 그리고 둘과는 위상이 좀 다른 이름을 가진 여자.
이 세 명의 주인공은 남다르게 고통스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이 소설에서의 주인공은 진정한 주인공인데 다른 소설에 비해서 배경이나 관념적 설명, 다른 인물들의 비중은 의도적으로 축소되어 있고, 오직 이 세 명의 인물에만 초점이 맞춰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 소설의 배경은 놀라울 정도로 인물에 종속되어 있는데, 그 공간이 너무나 협소해서 세 명의 주인공들은 큰 개연성 없이 자주 만나게 된다.
이런 상황은 이 세 명의 주인공이 서로 다른 사람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게 해주는데, 그래서 이 소설의 공간은 마치 작가의 머리 속인 것 같이 느껴진다.
그렇다면 혹시 이 세 명의 인물은 작가의 Id, Ego, Superego가 소설 속에서 형상화 된 것은 아닐까? 물론 본능적인 삶을 사는 폭력적인 깡패는 Id, 시적 영감을 현실로 구현하기 위해서 고뇌하는 시인은 Ego, 놀라운 언어 능력에 종교적 감성을 지닌 여자는 Superego이다. 
 아니다. 이것은 프로이트의 폭력이다. 그 폭력에 사고를 제한당한 심리학 전공자의 억지스럽고 유치한 상상일 뿐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소설을 다 읽었다. 그리고는251쪽에서 작가의 말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작가가 밝히는 이 소설의 주제는 ‘상처를 통해 획득하는 존재증명’이라고 한다.
‘세상의 모든 것이 고통’이라는 불교적 세계관과 ‘나는 생각하고 그래서 존재한다.’는 서양의 철학자의 말이 머리를 스친다. 단지 생각하는 것만으로 존재를 연역하는 서양의 이성중심, 뇌중심 사고에 비해서 인생의 고통에서 존재의 확신을 얻었던 동양적 존재의식! 머리가 아닌 몸과 마음에서 우러나온, 단지 앎이 아닌 삶에서 존재를 증명하는 불교의 사색이 이미 읽었던 소설에서 밀려온다. (내용없는 형식이 없듯이 서양철학자의 앎도 삶과 철저하게 유리된 것은 아니었겠지만…..)

이렇게 존재에 관한 진지한 생각을 접할 때면, 난처한 느낌이 없지 않다. 형이상학적 내용자체가 낯설고, 부담스럽기도 하겠지만, 이런 생각을 언뜻 밖으로 내어 놓기에는 너무 어리다는 왠지 모를 생각이 내 속 어디엔가 자리잡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내가 사람인가?” 하는 물음에 답하기 어려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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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년간 20번이나 고쳐 쓰고, 스스로에게 만족이 되는 이 소설을 반나절에 읽은 것이 작가에게 조금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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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독약 1 - 에덴 동산 이후의 중독과 도취의 문화사 책세상총서 17
알렉산더 쿠퍼 지음, 박민수 옮김 / 책세상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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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주의 작가들에 도취된 자료수집가의 지루하고 못된 이야기

“신의 독약 : 에덴 동산 이후의 중독과 도취의 문화사” 이 책의 제목과 부제이다. 물론 취향의 문제이긴 하지만 내겐 아주 그럴 듯했다. 그런데 책을 읽어가면서 이 그럴 듯한 제목이 점차 빛을 잃어 가는 것을 느꼈다. 제목을 따라가며 빛을 잃어가는 과정을 생각해 보는 것은 이 책에 대해 말하는 좋은 방법인 듯 하다.

* 신의 독약


인류의 탄생과 동시에 진행된 ‘앎의 역사’에 있어서 술을 비롯한 약물의 역할은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이성의 냉철함이 결여한 새로운 앎의 수단으로서의 약물은 결코 역사의 주변부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고 한다.
사실 새로운 것을 알아낸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상식의 견지에서는 약물에 의한 새로운 앎의 방식이 편법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상식 역시 사람이 만들어 낸 것에 불과한 것이고, 결과적으로 우리는 언제나 새로운 앎에 열광해 왔다.
 저자는 알코올을 비롯한 약물에 그다지 반감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이렇게 해석이 결여된 사실만을 늘어놓는 것인지도 모른다. 약물에 대한 긍정을 역사적 사실에 적당하게 숨기는 방식으로 말이다. 상식의 측면에서 보면 이것 참 ‘못된 이야기’이다. 누구나 금지된 것을 좋아하듯 이런 못된 저자의 생각은 흥미를 끈다. 마치 결사조직의 비밀을 공유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런데 책장을 넘기다 보니 저자의 궁극적인 관심은 독약이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중독과 도취에 관심이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독약을 제목으로 하는 것은 조금 이상한 일이다. 하긴 애당초 나의 관심도 약물 보다는 도취에 있었으니 오히려 잘된 일이다.

*에덴 동산 이후의


에덴 동산 이후라는 말은 너무 거창하다. 에덴 동산 이후라면 장구한 시간을 함축하고 있기도 하고, 인류 보편의 어떤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시간적인 고찰에 있어서도 공간적인 고찰에 있어서도 너무나 협소한 19-20세기 서양의 낭만주의자들에게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 중독과 도취의 문화사


약물이 새로운 문화 창조의 힘으로 중요하게 작용한 것은 사실이다.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서양의 많은 작가나 예술가들이 약물에서 비롯된 영감을 통해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 냈다는 것도 흥미로웠다. (에머슨, 앨런 포, 윌리엄 제임스, 보들레르, 니체, 고흐, 노발리스, 실험에 불과했지만 괴테나 실러조차….) 그러나 이러한 뒷이야기들을 스포츠 신문의 흥미거리 기사처럼 나열하는 것으로는 ‘도취의 문화’를 제대로 해석해 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도취의 의미나 사회적, 심리적 메커니즘 같은 성찰도 없고, 문화사라고 할 만한 내용은 더욱더 아니다. 같은 유형으로 계속해서 제시된 작가들의 이야기를 읽는 것은 사실 지루했다.

이제 저자가 지닌 진정한 관심을 알만하다. 나중에 뒤져보니 그의 전공은 약물학자도 역사학자도 사회심리학자도 인류학자도 아닌 영문/독문학자 였던 것이다. (물론 영문학이나 독문학이 위에서 언급한 학문보다 못하다는 소리가 아니다. 단지 책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제목이 내용과 잘 맞지 않고, 그 제목에 끌려 책을 선택한 사람의 관심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의 관심은 19-20세기의 낭만주의 작가들이 약물을 어떻게 이용했는가 하는 것이었으며, 이 책에서 다루는 그들의 뒷이야기들은 작가와 그들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려는 사람들에게는 훌륭한 역할을 할 것이다.

“19-20세기 낭만주의 예술가들의 약물에 얽힌 뒷이야기들” : 재미는 덜해보이지만 새로 붙여본 이 책의 좀더 정직한 제목이다. 

* 도취에 대한 성찰을 위해 이책을 골랐다면 얇지만 깊이 있는 니체의 처녀작 ‘비극의 탄생’을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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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 시공 로고스 총서 5 시공 로고스 총서 5
J. G. 메르키오르 지음, 이종인 옮김 / 시공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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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의 어깨에 걸터앉아 뒤통수를 보는 재미

미셸 푸코(1926-1984)
그의 저작은 하나의 숲과 같다. 그것도 단정하고 곧게 뻗은 침엽수림이라기 보다는 온갖 넝쿨손이 엇갈리고, 발밑은 푹푹 꺼지는 정글과 같은 숲이다. 언젠가 그의 초기 저작인 ‘광기의 역사’를 손에 들고, 읽은 줄 또 읽어가며 거의 광인(狂人)이 될 뻔 했었던 경험이 있다. 아마도 그가 사유하는 방식이 매우 낯선데다, 다소 지루했기 때문이었으리라. 이런 정글에 무턱대고 들어갔을 때는 몇 발 못가서 지쳐버리기 마련이다.

몇 년이 지나고, 이 정글의 지형을 알려주는 지도를 만나게 되었다. ‘푸코’라는 제목의 입문서가 바로 그것인데, 메르키오르(저자)는 푸코의 모든 저작들을 섭렵하고나서 나름대로 친절한 입문서를 남겼다. 이제 새로운 방식의 정글 여행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마치 거인의 어깨에 걸터앉은 채, 잔잔한 웃음까지 지으며 ‘푸코’라는 숲을 지나가는 느낌이랄까? (이는 입문서나 해설서에 관한 편견이 다소 사라지는 경험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원전을 중요시 하며 입문서의 가치를 평가 절하한다. 그러나 지식이란 자신에게 의미있을 때만 진정한 것이다. 혹자는 타인의 해석을 따라가는 것이 ‘독창적 책읽기’에 크게 방해가 된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과 같은 정보 범람 시대에는 독창성 못지않게 효율성의 문제가 중요하다. 게다가 훌륭한 입문서는 원저작에 대한 관심을 갖게 만든다. )

거인의 어깨에 앉아서 시야를 확보한 후, 숲을 보니 생각보다 많은 것이 보였다. 

먼저 철학과 역사를 결합하려 한 푸코의 사유방식이 보였다. 생활이 모인 역사가 갖는 불완전함은 추상이 주는 철학의 완전함을 상대화 시킨다. 그는 이렇게 세상을 조감함으로 새로운 지식에 도달한다.(그는 부인하지만 그의 이러한 태도 때문에 그에게는 구조주의자라는 호칭이 따라다닌다.)

다음에 보인 것은 ‘에피스테메(episteme)’라는 관념이다. 그는 앞서 말한 사유방식으로 ‘지식의 역사적 지층’을 찾아냈다. 한 시대와 문화의 일반화된 해석체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단절적이고, 이 지층간에는 긴장과 갈등이 있지만, 보편적인 진리는 없다.

이제 점점 그의 사유는 친숙해져서 일상과 결부되기 시작한다. 우리 사회의 판옵티콘(panopticon)은 왜 이리도 거칠고 어설픈지(비록 좋지 않은 의미에서 세련되고는 있지만…), 감시탑의 주인과 그의 행동이 훤히 보인다.

드디어 시선은 추상과 세계와 우리 사회를 거쳐 나의 뒤통수에 날아와 박힌다. 근대 서구의 자아의 조작된 인간관인 ‘온순한 인간(Homo Docilis)’의 개념이 내 속에서 숨쉬고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이런 것들을 살펴보고 나는 거인의 어깨에서 만족한 채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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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과 의식 - 현대심리철학입문
P.M.처치랜드 지음, 석봉래 옮김 / 서광사 / 199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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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물질과 의식이라는 책을 "유물론의 향기로운 전도서"라고 부르고 싶다. 저자는 매우 친절하고 세심하게, 때로는 강력한 논지로 유물론이란 종교를 전파하고 있다.  전도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는데 있어서 매우 미숙하다.  열정이 논리를 압도하여 역효과를 내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그러나 몇몇 향기로운 전도자들은 지극히 자연스럽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이 책의 저자 역시 주도 면밀함과 솔직한 태도로 자신의 이야기를 써내려 간다.  다만, 지적할 것은 부분적인 객관성과 전체적인 편향이다. 부분적으로 보면 주장과 반론의 객관적 검토가 뛰어나지만 전체적인 구성과 어투는 유물론을 옹호하고 있다. 난 이 책을 부분적 주장과 반론의 언급보다 전체적인 시각에서 되돌아 보고자 한다.
 

  존재론은 모든 철학의 근간이 되는 영역이다.  그런데 존재론은 논의에 비해 결실이 적고, 현대 사회의 병리현상이나 큰 전쟁등이 부른 절실함으로 인해 현대철학은 인식론이나 가치론의 영역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과학'이 꾸준한 발전을 거듭하며 그 영역을 확장하기 시작했고, 과학철학은 존재론을 비롯한 모든 분야에 주된 관점으로 자리잡기에 이르렀다.  이제 이 새로운 관점으로 존재론을 다시 바라보게 된 것이다. (사실 이런 식으로 존재론, 인식론, 가치론 등으로 영역을 구분하는 태도는 그것들의 상호 연관성으로 볼 때 그다지 바람직 스럽지 않다.  현대는 멀티미디어와 탈 장르의 시대가 아니던가? 이런 구분들은 워낙 거대한 철학적 논의를 편의에 의해 분할한데 지나지 않는다.)
 

 작가는 존재론을 꼼꼼히 정리하고 있다. 그런데 존재론의 언급에서 작가의 편향이 숨어있다.  작가는 존재론에서 이원론과 유물론만 다루고 전통적으로 존재론의 한 영역인 관념론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고 있다. (관념론에 대한 것은 5장의 방법론에서만 잠시 언급한다.) 물질을 존재로 인정하지 않는 관점을 존재론의 범주에 넣을 수 없다는 것이 작가가 가진 당연한 상식인 듯 보인다.

 

 의미론은 분석철학의 영역이다. 이는 언어의 뜻을 정확히 정의하고 분석하므로써 연구대상의 본질을 밝혀내는 철학의 한 분야이다. 처음에는 인간이 만들어낸 언어로 인간을 이해하려한다는 사실이 우습게 느껴졌으나 이 책에서 존재론과 의미론의 밀접한 관계를 알아낼 수 있었다. 언어를 정의 하는 방법은 크게 내적 현시와 이론적 망상구조에 의한 정의로 대별된다. 내적현시에 의한 정의 방식은 인간이 느끼는 내성에 의해 언어를 정의 하는 방식이다. 이 방법은 존재론상의 이원론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내성은 자기 외에는 어느 누구도 대신 경험할 수 없는 방식이므로 내적 현시에 의한 언어의 정의는 어떤 형식으로도 서로 같음을 증명할 방법이 없는 회의론으로 빠져들게 된다. 이런 회의론에도 불과하고 이원론자들이 이 방식을 인정하는 이유는 내성이라는 정신적 경험이야 말로 영혼을 존재하게 하는 본질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론적 망상구조에 의한 언어의 정의 방식은 유물론자들이 채택하는 방식이다. 이는 어떤 언어의 정의는 그 언어의 본질적 속성이 관찰가능한 다른 속성과의 인과관계속에서 결정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내성이라는 모호한 개념을 배제할 수 있는 정의 방식이기에 유물론자들에 의해 인정되고 있다.

 

   유물론은 여러가지 면에서 인간이란 존재를 격하시키는 측면이 있다. 환원적 신경과학은 인간의 창조적 활동은 뇌의 작용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며, 진화론은 인간을 동물의 수준으로 끌어 내린다. 하지만 인식론의 영역은 유물론의 관점에서 바라보아도 인간의 자리매김을 달리 하는 측면을 가진다. 작가는 이 책에서 인식론의 영역을 '다른 존재의 마음의 문제'와 '자기 의식의 문제'로 축소하여 다루고 있다. 많은 인식론의 영역을  존재론과 장법론의 견지에서 다루고 있는 듯하다. 심리학은 인간에 대한 학문이르로 근본적으로 인식론의 영역이라고 생각하며 이 책의 영역인 심리철학도 많은 부분 인식론의 측면에서 다루어 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작자는 존재론에 치중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며 느낀 인식론과 존재론에 대한 느낌을 간단히 적으려 한다.


  인간은 최근에 들어와서 자기의 가치를 놀라울 정도의 큰 목소리로 부르짖곤 한다.  하지만 시간과 공간의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무한성을 떠올릴 때는 처음의 큰 목소리 만큼이나 자신의 왜소함과 무가치함을 절실히 깨닫는다. 시간과 공간의 틀은 존재론, 특히 유물론의 기본틀이란 점에서 인간은 존재론의 영역에서는 아주 미미한 존재에 불과한 것이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의 거대한 두 축에서 하나의 작은 점으로 표시될 수 있다. 점은 넓이도 부피도 갖지 못한채 위치만을 표시하는 속성으로 볼때 얼마나 초라한 것인가? 인간은 이런 절망과 한계들을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인간은 이러한 생각을 계속하다가 생각을 하고 있는 자기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말과 상통하는 것으로 존재들을 바라보는 인식의 주체를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존재론의 거대한 두 축에 또 하나의 축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이것이 인식론의 시작이 아닐까?  인식론의 시작으로 인간은 공간과 시간에 매몰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또한 인간은 점에서 넓이와 부피를 갖는 존재로 발돋움하게 되는 것이다.

 

 방법론의 논의 중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현상학의 영역이다.  현상학은 자기 자신만의 세계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만의 생활과 그에 따른 사적 경험이 있다. 이런 경험의 기억들이 대뇌 피질부의 조그마한 주름으로 환원될 지라도 개인들의 경험세계의 존재는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런 개인의 세계를 연구함으로써 보편적인 세계를 탐구하는 방법이 그럴 듯 하다고 느껴진다. 어차피 모든 연구는 개인의 경험의 일부이며 그 연구의 방향성은 사적 경험의 세계에 의해서 좌우될 수 있다. 보편적인 세계를 직접 연구하는 것이 이렇게 개인의 주관에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방향을 바꾸어 사적 경험의 세계를 연구해서 보편적인 세계를 추론하는 방식이 바로 현상학이다. 방법론의 나머지 영역인 인지/연산적 접근법과 방법론적 유물론은 인공지능과 신경과학의 장에서 자세히 설명되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 두가지, 즉 컴퓨터 과학과 생명과학은 유물론의 발전과 이상 실현의 가장 중요한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인공 지능이란 가능한 것인가? 컴퓨터는 최근 인간이 만든 것중 가장 그럴듯한 것임에 틀림없다. 사람들은 자신이 만든 언어라는 수단을 통해 자신을 연구하기도 하고, 자신이 만든 컴퓨터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본다. 인간의 정신을 유추해서 컴퓨터를 만들고는 컴퓨터를 유추하여 정신을 살피고 이제 그것을 만들어 내려 하는 것이다.  수 많은 공상과학 영화에서 인공지능을 가진 컴퓨터들의 반란을 다루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인공지능에 대해 회의적이다. 고등 동물의 의사 결정과정은 노링와 연산의 과정 보다는 감성의 영향을 더 많이 받기 때문이다.
 생리심리학은 그동안 궁금하던 인간의 행동을 상식에 맞는 새로운 관점에서 설명해 준다는 점에서 인상적이었다. 이제는 생물의 오묘한 신비가 생물학의 영역으로 환원되고 이제 미지의 세계로 남은 것은 뇌를 비롯한 신경계 뿐인듯 하다. 이제 신경과학이란 말이 곧 생물학을 뜻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신경과학에서 무엇보다 신기한 것은 기쁨, 우울과 같은 감성적 영역들을 신경 전달 물질등을 통한 과학적 증명과정이다. 앞으로 신경과학이 발달을 거듭한다면 인간의 감성의 영역도 통제하고 조절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보면 한편으로는 끔찍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여태까지 물질과 의식을 읽고 느낀 점을 정말 두서 없이 적어 보았다. 시간에 쫓겨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부분도 넘어가거나 좀더 깊은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 아쉽게 느껴진다. 시험이 끝나고 방학이 시작되면 꼭 다시한번 읽고 많은 생각을 해 보아야 겠다. 이책은 존재론, 의미론, 인식론, 방법론 등의 철학적 발전 과정과 각 주장들을 이해하는 데도 큰 도움을 주었지만 그보다는 한 주장에 대한 빈틈없는 근거제시와 반론들을 통해 다각적이고, 비판적인 사고를 갖게 해 준다는 점에서 더 큰 의의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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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에게 말걸기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199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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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 족의 담담한 세상보기

 약간 우울한(mild depressive) 사람이 세상을 가장 정확하게 본다는 심리학의 연구 결과가 있다. 이 결과는 논문 속의 복잡한 수치와 분석 기법 보다는 오히려 은희경의 소설집 ‘타인에게 말걸기’에 더욱 잘 구현되어 있었다.

 우울이라는 감정도 약물로 조절하는 시대에 살고 있기는 하지만, 우울하려면 일단 외로워야 한다. 그리고, 외로우려면 자신의 존재를 돌아볼 줄 아는 조건들이 절실하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은 모두 그렇다. 경제적 문제가 크지 않은 30대의 지성을 갖춘 여성 혹은 남성들. 인생의 절반쯤을 걷고 있는 이들에게 삶의 문제들은 죽음처럼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는 의미 ; ‘사랑’에서 쿤데라가 한 표현) 다가온다. 벗어나기 힘든 일상들과 환상들 속에서 타고난 외로움을 지니고 살아가는 외로움의 족속들은 담담하게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일상이라는 것 만큼 복잡한 양가감정을 지닌 단어가 또 있을까? 일상의 지겨움과 일탈의 두려움. 어떤 하나를 택하기에 다른 한가지의 기회비용이 너무나 커보이는 그런…. 그래서 사람들은 환상을 택하기도 한다. 일상을 살며 일탈이라 느끼는 환상. 사람들은 일상의 지겨움을 넘어서기 위해서 자신의 상황과 감정을 끊임없이 증폭시켜 살아간다. 이런 환상의 주된 주제는 바로 사랑과 고통이다.
그런데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소설의 주인공 만이 누릴 수 있는 일상을 벗어난 삶을 살아 감에도 불구하고, 사랑과 고통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절대 환성 속으로 밀어넣는 짓은 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렇게 외롭게, 한 점의 과장도 없이, 담담하게 자신과 직면하고 있었다.
삶은 어차피 억지스런 의미 부여와 과장 또는 증폭과 상관없이 내 것인 듯, 내 것이 아닌 듯, 그렇게 나비 마냥 팔랑거리며 날아가는 것임을 아는 듯이 모르는 듯이…..

 이 담담한 태도는 나의 감성에 들어 맞는다. 더구나 작가는 뛰어난 관찰과 표현으로 일상속에서 비일상성을 끄집어 내고, 일탈 속에서 일상성을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이 소설은 가을을 닮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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