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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잠 재의 꿈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0
기리노 나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무라노 젠조! 동료들은 그를 '무라젠'이라고도 부른다. 주간지 '주간 담론'의 프리랜서 기자이기도 한 그는, 타고난 '특종꾼'으로 통한다. 모든 기자들이 그럴지도 모르지만 어느 한순간 한순간을 놓치지 않고 뭐 좋은 소재가 될 만한 기사꺼리가 없는지 두리번 거린다. 무라노 젠조라는 이름은 바로 독자들에게 익숙한 탐정 '무라노 미로' 시리즈에 종종 등장하는 그녀의 아버지이다. 탐정 무라노 젠조! 매력적인 탐정 무라노 미로의 아버지, 이 작품 <물의 잠 재의 꿈>은 무라노 미로 시리즈의 새로운 시작이다.
탐정 무라노 미로! 아니, 이번엔 조금 더 시간을 거슬러보자.
스물 아홉살의 주간지 프리랜서 기자, 아직 미혼, 주니치 드래곤의 팬이기도 한, 어떤 후배의 말에 따르면 '항상 킁킁거리며 무언가를 쫓는 사냥개처럼 귀가 쫑긋서 있다.'는 무라노 젠조. <물의 잠 재의 꿈>은 무라노 미로 시리즈에서 잠깐씩 등장해 독자들의 궁금증을 증폭 시키던 그녀 아버지의 젊은 시절을 그려내는 작품이다. 이쯤 되면 독자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물음표를 찾아내기 위해 꽤나 몸이 달아있을 것이다. 미로의 아버지 무라젠이, 기자에서 어떻게 탐정이 되었는지, 그를 탐정의 세계로 이끈 계기는 무엇이었는지, 미로 출생과 관계된 이야기들, 아니 그 이전 무라젠의 사랑은 어떠했는지... 등등
'폭탄이다!'
1963년 9월, 전후 20년도 채 지나지 않은 일본! 지하철에서 폭탄테러가 발생한다. 자신을 '소카지로'라고 말하는 이 테러범은 벌써 수차례 이와 유사한 사건을 일으키고 있다. '소카지로'? 왠지 익숙한 이름이라 생각하는 독자들이 있을줄 안다. 바로 오쿠다 히데오의 '올림픽의 몸값'에서 주요 인물로 낯이 익기때문일 것이다. '64년 도쿄 올림픽이 일어나기 이전에 일어난, 영원한 미제가 되어버린 연쇄 폭탄테러 사건의 주인공이 바로 소카지로다. 이번에도 이 소카지로 사건은 주요 소재가 된다. 그리고 그 중심에 무라젠이 있다.
자신이 탄 지하철에서 폭탄 테러를 경험한 무라젠은 소카지로 사건에 관심을 갖게되고 고바야시와 하시모토를 데리고 이 사건을 추적하게 된다. 소카지로 사건과 더불어 무라젠의 관심은 자신의 절친인 고토와 <주간담론>의 창립자인 도야마에게도 이어진다. 도야마는 무슨일인지 조직폭력배들의 협박을 받고 있고, 주간지계의 알랭들롱이라 불리는 멋쟁이 고토는 갑자기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한다. 뭔가 미심쩍은 냄새를 맡은 무라젠은 그들 사이에 숨겨진 비밀을 파헤친다.
또 하나의 사건은 우연찮은 기회로 찾아온다. 형의 무탁으로 가출한 조카 다쿠야를 찾으러간 무라젠은 '오타케 사나에'라는 이름의 추억속 그녀를 스치듯 만나게 되고, 잠시 과거 추억속에 잠긴다. 고토와 사나에... 그 사이에 선 무라젠. 어쨌든 문란한 파티장에서 다쿠야를 데리고 나오던 무라젠은 조카의 부탁으로 '다키' 라는 여학생을 집까지 데려다주게 된다. 하지만 그녀 아버지의 폭력으로 다키를 자신의 집에서 하룻밤 재워주게 된 무라젠은 뜻하지 않은 사건에 휘말리게 되고 살인 용의자로 내몰리는 상황과 맞닥드린다.

소카지로 사건, 고토와 도야마, 다키 사건으로 살인용의자로 몰리고 그 과정에서 추억속 그녀 사나에와의 또 다른 만남! 네가지 사건이 서로 뒤섞이며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이야기는 재미를 더해간다. 한편 지하철 폭탄테러가 있은 직후 소카지로는 요시나가 사유리라는 인기 아이돌에게 돈을 요구하며 협박장을 보낸다. 고토에게 편집장 자리를 제의한 '대일본 건축문화 진흥회'와 도야마를 협박하는 야쿠자, 그리고 다키와 사나에... 전혀 연관이 없을 것 같은 이야기들이 시간의 흐름속에 꼬일때로 꼬여버린 실타래를 하나둘씩 풀어놓는다. 쉴새 없이 내달리는 무라젠의 땀과 열정으로 ....
무라노 미로 시리즈의 외전 형식을 띠고 있지만, 사실 이 작품과 무라노 젠조의 모습은 아직 초보 탐정에 불과한 미로의 모습보다 훨씬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특종꾼, 프리랜서기자라는 직업에서 자연스럽게 풍기는 치밀한 행동들과 광범위한 정보수집력, 기자로서의 직감이 풀어내는 사건의 진실은 독자들을 매혹시키기에 충분해보인다. 초보 탐정답게 아직은 감성적이고 미숙한 느낌을 많이 풍기는 미로와는 다른, 상당히 이성적이고 균형잡힌 행동과 남성적 매력을 충분히 발산하며 야쿠자, 경찰과 몸으로 부딪히는 무라젠의 활약상이 아직은 2% 부족한 미로에게 보이지 않는 특별함을 전해준다.
미로 출생의 비밀, 아마도 <물의 잠, 재의 꿈>을 만나면서 이 부분에 대해 관심을 갖았던 독자들이 많았을 줄 안다. 그러면서 무라노 젠조의 사랑에 시선이 이어졌음은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하지만 조금은 안타깝고, 끈어질듯 아슬아슬 이어지는 그들의 인연, 앞으로 그려질 그와 그녀의 사랑이 더욱 궁금해진다. 고토와의 우정, 사나에를 둘러싼 숨겨진 감정들, 삼각관계... 긴박하게 벌어지는 사건들과 자신을 옭죄어오는 살인 혐의 속에서 무라젠의 숨겨진 사랑, 미로와의 인연이 조심스레 고개를든다.
'그대는 아는가. 불탄 재 속에 찬란한 다이아몬드가 숨어 있음을...'
'난 인형이니까.' 소카지로 사건으로 시작했지만 다키의 사건으로 문제를 풀어낸다. 다키가 말했던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기리노 나쓰오는 전작에서 그려내던 그녀만의 분위기가 그대로 이어진다. 전후 얼마 지나지 않은 일본 올림픽을 즈음한 시기, 사회적인 폭력, 불편한 욕망을 꿈꾸는 사람들, 화려함 이면에 숨어있는 인간의 추악한 모습과 진실들이 작가의 펜끝에서 그 짙은 어둠을 그려낸다. 조금더 재미있고 촘촘하며 남성적인 느낌의 탐정소설, 미라노 미로시리즈를 있게 만든 무라노 젠조의 매력이 등장부터 독자들을 매료시킨다.
'저는 저 자신을 위해서만 일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당신 일을 맡을 수도 있습니다. 단.... 제 마음이 내킬 때에만, 그게 조건입니다.' - P. 486 -
탐정 무라노 미로를 가능하게 만든, 그녀의 아버지 무라젠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이제 첫 만남을 가진 미로와 젠조, 그와 그녀의 함께 만들어가는 이야기가 조금더 독자들을 찾아와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아니, 무라노 젠조의 젊은 시절이 더 많이 그려졌으면 좋겠다. 조금더 박력 넘치고 이미 준비된 탐정으로서의 매력을 가진 그의 활약이 너무나 기대되기 때문이다. 우리사회 이면의 어둠을 담고, 매력적인 캐릭터로 그려지는 치밀하고 섬세한 이야기, 기리노 나쓰오에게 엄지손가락을 내어놓을 수 밖에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무라노 미로와 젠조, 그들이 더욱 궁금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