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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 읽기 - 전체주의의 탐험가, 삶의 정치학을 말하다 산책자 에쎄 시리즈 8
엘리자베스 영-브루엘 지음, 서유경 옮김 / 산책자 / 2011년 6월
평점 :
품절


 한나 아렌트 [Hannah Arendt]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통해서 악의 평범함(?진부함)에 대해서 논했던 아렌트는 20세기 독일 실존철학의 3대 거성인 하이데거, 후설, 야스퍼스를 차례로 사사한 여성 철학자(?)입니다. 실제로 아렌트 자신은 철학자라는 호칭에 대해, 철학은 '단독자인 인간'에 대해서 관심을 가진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불리우는 것을 반기지 않았으며, 자신은 '한 인간'이 아닌 지구에 살며 거주하는 '인류'에 대한 관심을 가진다는 점에서 철학자라기 보다는 '정치이론가'로 묘사했다고 합니다. 1906년 10월 14일 독일 하노버 근교의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고, 이후 쾨니히베르크 (칸트의 고향)와 베를린에서 자랐습니다. 괴니히베르크 대학을 졸업하고 마르부르크 대학에서 하이데거와 철학을 배웠는데 그 과정에서 두사람은 연인관계로 발전하며 후에 우여곡절을 겪게 됩니다. 이후 프라이부르크에서 후설에게 현상학을 배우고,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야스퍼스의 지도하에 <사랑 개념고 성 아우구스티누스>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2차 세계대전 중 나치의 박해를 비해 1941년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에 정착하였고, 1951년 미국 시민권을 얻고, 1953년부터 프린스턴 대학, 케임브리지 대학, 버클리 대학, 시카고 대학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1951년 간행한 <전체주의의 기원>을 통해 명성을  얻게 되었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통해서 악의 평범성에 대한 통찰력을 보여줌으로써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이외에도 이 책이 다루는 <인간의 조건>, <정신적 삶>을 비롯한 <폭력의 세기>, <혁명에 관하여>, <시민적 불복종>, <공화국의 위기: 정치에 있어서 거짓말>등이 있습니다. 그녀는 1975년 사망하여 뉴욕의 허드슨 강 유역 애넌데일에 있는 바드 대학에 묻혀 있습니다. 아렌트의 업적은 전체주의, 권력의 속성과 정치, 권위 등과 같은 주제들과 연관을 가지고 있는데, 파시즘과 스탈린주의 등 '전체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과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주장한 악의 평범성(진부성)에 대한 개념은 오늘날까지 크게 인정받고 공감을 얻고 있습니다. 

 왜 오늘 아렌트가 주목받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이 책의 뒷부분에 있는 <옮긴이 해제: 오늘 우리는 왜 한나 아렌트에 주목하는가?>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저자는 1990년 중반 서구 학계에 불어닥친 아렌트 재해석 열풍은 동유럽의 '벨벳 혁명'과 그에 뒤따른 시민사회의 태동이 기폭제가 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실제 사회주의 국가 통제가 해체된 자리를 민선 체제가 차지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정치 패러다임이 요구되었는데, 이에 대한 현실적인 대안이 한나 아렌트의 사상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데리다의 해체주의와 같은 탈근대적 사회이론들은 비판이상의 정치적 대안을 필요로하는 사람들의 갈망을 채우지 못했지만, 아렌트의 정치 행위와 판단에 관한 이론은 시민들 각자의 행위와 정치적 결과의 상관관계를 조명하면서, 사회정치적인 상황에 대한 매우 실질적인 지향점을 보여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현재 우리가 아렌트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는 1990년대 중반 서구에서 아렌트 재해석의 열풍이 불었던 때와 동일한 이유들을 들이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아렌트가 거침없이 비판했던 전체주의의 그림자가 현재의 민주국가라는 미국이나 현대 국가의 이면에 숨겨져 있고, 대다수의 시민들이 정치에서 소외되어 버린 현실, <인간의 조건>에서 보여주고자 했던 정치 행위-사적인 삶의 관심사에서 벗어나 공적인 장에 참여하여 동료 시민들과 더불어 수행하는 의사소통 행위-를 통한 인간다운 삶, '상호 약속'의 필요성과 정치행위로서의 용서의 유용성 등의 내용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통해서 현실화 되었으며, 사회 및 정치적으로 우리 삶의 현장에서 발생하는 이의제기에 대한 답을 담고 있다는 사실 등의 이유 말입니다. <정신의 삶>은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가 아닌 '우리가 사유할 때, 의지할 때, 그리고 판단할 때 무엇을 하는가?'라고 묻는 사고의 변화를 통해서 사람과 인류와의 관계 맺음으로 표현되는 '정치'와 철학의 결합에 대한 숙고를 담고 있다고 해도 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렌트 읽기, <전체주의의 기원>, <인간의 조건>, 그리고 <정신의 삶>을 통해서.... 

 <아렌트 읽기>는 아렌트의 대표작인 위의 세 책을 근간으로 아렌트의 사상을 소개한 것입니다. 초기 파시즘에 대한 경험을 바탕으로 현실정치에 눈을 뜨고 내놓은 <전체주의의 기원>,  그 이후 자신의 약속과 용서를 담은 정치이론을 통해 진정한 정치의 복원과 공적 행복을 주장한 <인간의 조건>, 그리고 사유와 의지와 판단을 통한 사랑과 우애의 철학을 말하는 <정신의 삶>에 대한 저자 자신의 해석을 곁들여 독자들이 아렌트의 사상의 숲에 들어갈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는데, 실제로는 단순한 안내서라기보다 아렌트 사상에 대한 하나의 '개론서'정도로 취급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책 원서가 2006년에 발행된 것은 아렌트 탄생 100주년이라는 의의와 앞에서 언급한 동유럽의 벨벳 혁명,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진실과 화해 위원회' 등을 통한 현대의 사회정치적 문제의 대안으로서의 아렌트 사상의 가치에 대한 확신이 자리잡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렌트의 사상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는 더 큰 이유는 그녀의 정치 사상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 여전히 필요하고 유용할 것이라는 기대에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그런 기대가 이번 한국어판 <아렌트 읽기>에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는지.....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1961년 아렌트는 예루살렘 재판에 입회하여 육신을 가진 아이히만이 야릇한 독일 관료의 어투로 증언한 것을 직접 본 다음에, 아이히만이 아무런 독자적 책임감도 느끼지 못하고 오로지 나치의 계급 구조 내에서 진급하겠다는 일념으로 속속들이 진부한 자신의 사회에 철저히 순응한 한 사람의 천박한 인간이었다고 결론지었다. 결정적으로 그는 '생각이 없는 thoughtless' 자였다. 아렌트에게 '생각없는'이라는 말은 무심하다는 뜻이 아니라 상식이 없거나 사유할 능력이 없다는 뜻이었다" '무사유성 thoughtlessness'에서 '악의 평범성'의 근원을 보았던 아렌트는 무사유성을 '무지하고 분별이 없음, 혹은 어떨 수 없는 혼동, 혹은 하찮아지고 공허해져버리는 진실들의 자기만족적인 반복이'라고 정의 했으며, '우리 시대의 두드러진 특성들 가운데 하나'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결과에 대해 무감각한 관료이자 범죄국가의 대리인이었던 아이히만은 결과적으로 세계에 대해 너무나 무관심했으므로, 또한 세계와 소원했으므로 세계를 황폐케 하는 일에 일조할 수 있었'고, 결국은 우리에게 '흔치 않는 용기와 진짜 사려 깊음'이 없다면, 우리를 통해서도 '악의 평범성'이 드러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될 것 입니다. 아렌트의 이러한 탁월한 분석에 대한 뒷받침이 될만한 심리학적인 실험으로 스탠리 밀그램의 <권위에 대한 복종 실험>과 필립 짐바르도의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권위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이나 두려움에 굴복한 우리 내부의 폭력성의 발현은 아렌트가 말한 '무사유성'과 진실한 용기가 없음과 서로 통하는 부분이 있다는 생각에서입니다. 물론 아렌트는 그러한 인간에 대한 세밀한 분석에서 끝내지 않고, 그러한 위험성에 노출된 사람들이 다시 풍요로운 삶과 정치의 주체로 거듭나고, 서로간의 소통과 합의와 용서를 통해 공동체적인 삶을 회복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는 면에서 더 큰 의미와 가치를 지녔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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