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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문화비평이다 ㅣ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 4
이택광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문화비평가'란, 저자가 인용하는 영어판 위키피디아(Wikipedia)의 정의에 따르면, '기존의 문화를 전체적인 관점에서 급진적으로 비평하는 비평가'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언급되는 '급진적 radical'이라는 말은 '뿌리에서' 문제를 바라본다는 의미로 단순히 '과격한 언사나 독설을 늘어놓는다고 급진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문화비평가란 '어떤 사안을 뿌리에서, 발본적으로 사유하는 자'라는 의미로 '존재한다기보다 존재해야 하는 것이고 존재하게 만들어야 하는' '당위적 존재'로 밝히고 있습니다. 결국 저자가 주장하는 문화비평이란 '언제나 전체적인 관점에서 개별 문화 현상을 바라보며 실행하는 급진적인 비평 행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독자의 입장에서는 '전체적인 관점'과 '급진적 비평'이라는 말의 의미와 실재에 대해서 의문이 생기지만, 책을 읽는 내내 숙고하더라도 답을 찾기가 쉽지는 않을 듯 합니다.
저자가 말하는 문화비평을 이해하고, 그러한 개념에 의거해서 시행하는 한국 사회의 문화 현상들에 대한 이 책의 비평을 이해하기 위해서, 독자들에게 필요한 것으로, '인문학적인 소양'이 먼저 언급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저자가 사용하는 개념이나 용어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없이 무턱대고 들이대는 것은 결국 오해와 오역을 낳게 되고, 저자가 말하는 문화비평의 진지한 면에 대해서마저 부정적인 인상을 남길 수 있을테니 말입니다. 저자는 서문에서 과거 문화비평가를 '문화좌파나 살롱좌파'로 매도하고, '겉멋 든 언사로 여자나 후리는 놈' 정도로 생각하던 시절을 상기시키고 있는데, 결국 '지금 여기'에서도 저자의 의도가 제대로 이해되지 못한다면 그러한 과거의 인상보다 더 나은 모습으로 그려지기는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인문학적 소양은 차치하고, 우리 사회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있는 지극히 평범한 시민이요 문화비평이라는 장르에 그리 익숙하지 못한 독자의 입장에서는 저자가 다루는 우리 문화 현상에 대한 시각과 분석들이 일관되게, 전체적인 관점에서 근원적인 부분을 건드리고 있다고 동의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여전히 확신이 서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철학과 비평, 사회와 정치, 문화와 인물 사이를 넘나드는 저자의 비평행위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전체적인 관점에서 뿌리를 드러내 보이는 치열함이 담겨 있다는 느낌이 강하지 않아서이기도 하겠지만, 좀더 근원적으로 이해하기에 난해함을 주는 표현과 시각에 담긴 불편함이 더 큰 이유일 것 같습니다. '지극히 평범한 시민'이라는 의미를 신문의 사설을 읽고 우리 사회의 흐름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 정도 -물론 이건 너무 두리뭉실하지만 소양의 정도를 표현하자면 이런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로 말한다면 아마 저자가 생각하는 것과 독자로서의 간극을 조금이나마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도시에 대해 쓰는 것은 추억에 대해 쓰는 것'이라는 독일의 철학자 벤야민의 말이 옳다면 우리 후손들은 모두 아파트의 모양처럼 동일한 기억들을 갖게 될 것이다. 그 도시에서 나고 자란 이가 자신의 도시에 대해 쓰기 위해 필요한 것은 유년의 기억이다. 한국의 아파트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에게 이 기억은 아파트처럼 규격화되어 있지 않을까? 그나마 이 규격화에서 차이를 만들어내는 기준은 얼마짜리 아파트에 살았는가 하는 것 정도일 테다. ..... 보기에도 아찔하고 흉물스러운 한국적 아파트의 모습은 건설 자본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내재화한 우리의 증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건축 양식이다. -p119~120, 아파트라는 증상
그러나 이 스펙터클-김길태라는 악인의 충격적인 범행이라는-을 넘어서서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그 여중생은 왜 집에 혼자 있었고, 그 동네는 왜 그토록 빈집들이 많았는지 말이다. 결국 재개발이라는 한국 사회의 도시 정책이 이런 사건을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있는 원인이 아닌지 우리는 반문해야 한다. 재개발이라는 명목으로 거주민들을 몰아내고 동네를 파괴하는 것이 누구에게 가장 극심한 피해를 주고 있는지 이번 사건은 정확하게 증명한다. ..... 이 사건이 우리에게 일깨우는 것은 이렇게 마구잡이로 달려온 한국 자본주의에 대한 반성이다. 용산 철거민과 부산 여중생의 죽음은 사실 그렇게 멀리 있지 않은 것이다. 재개발의 이권에 삶의 터전을 내어주는 악순환을 끝내지 않는다면 이번 사건은 끊임없이 다른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이다. -p186~187, 김길태와 한국사회
서구의 부르주아와 달리, 한국의 부르주아는 아직도 일천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게다가 귀족계급이나 구체제와 투쟁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정립한 경험도 없다. 그러나 이들에게 서구의 부르주아와 다는 특징이 있는데 바로 '서민 정서'라는 특이한 요소이다. 이 서민 정서로 인해 한국 자본주의의 노른자라고 불리는 압구정동에 여전히 연탄불 돼지껍데기집이 있는 것이고, 최첨단 아파트에 김치냉장고가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p229, 서민은 나타나지 않는다
북한의 어뢰는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존재하는 '부재 원인'의 현신 같다. <개그 콘서트>가 사라져야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들이 욕망하는 현실이 개그맨의 대사들처럼 말도 되지 않는 억측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개그 콘서트>가 금지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개그 콘서트>, 부재했지만 여전히 우리를 웃겨주었던 좋은 프로그램이다. -p357, 개그없는 정권
정말 전체적인가? 정말 근원적인가? 무엇을 위해, 무엇을 비평한 것인가? 저자 나름의 시각을 존중하지만, 저자의 글에 동의한다기 보다는 앞의 의문들을 들이대면서 뜯어보고 싶은 내용들의 일부입니다. 저자의 생각처럼 아파트 숲에서 자란 아이들의 기억마저 획일화 되었다고 판단할 근거는 무엇인지, 아파트라는 거주구조가 갖는 의미가 상당하지만 아이들의 기억을 형성하는 것이 그러한 구조만이 아니라는 것은 왜 간단히 외면하고 말았는지, 김길태의 범행과 그에게 희생된 여중생을 우리 사회가 달려온 자본주의의 결과라고만 단정할 수가 있는 것인지, 그러한 논리의 전개가 여성의 옷차림이 성폭행을 일으키는 측면이 있다는 사고방식과의 차이를 구분할 수 있는 것인지, 저자는 김치냉장고와 연탄불돼지껍데기를 왜 고급 아파트나 압구정동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지, 천안함 사건에서의 정부의 대응과 갈등을 간단히 웃음을 주기 위해 온몸을 던지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개그맨들의 프로그램과 비교하는 것이 이 사건을 뿌리에서부터 바라보고 비평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는지.......
책을 읽고 나서 문득 '허풍선이'이라는 단어를 떠 올렸습니다. 비평가와 허풍선이. 아마도 비평가에겐 허풍선이의 기질이 조금은 있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비평가와 허풍선이 사이에는 그 둘을 구분하여 주는 선이 분명 존재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예를 들자면 허풍선이란 배보다 배꼽이 크다고 우기며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들의 눈길을 끌어 모으며 웃기는 사람으로, 그리고 비평가는 배보다 배꼽이 더 크지 않다는 사실을 직시하지만 배꼽에 관심을 가져야 할 때면 사람들의 모든 시선을 배꼽에 집중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또한 '벌거벗은 임금님'이라는 동화에서처럼 보이지 않는 것을 열심히 보려고 노력하다가 정말로 보이는 듯이 열광하는 어른들의 시선이 아니라 '벌거벗었다'고 솔직히 말할 수 있었던 아이의 시선이 전체적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근원적이라고 할 수는 있겠다는 생각도 함께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