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상업영화는 대부분 캐릭터 영화다. 다중의 주인공들이 등장하여 삶의 다양한 군상들을 보여주는 (형태를 띠고 있는) 연극과 달리, 단일한 메인서사와 부차적인 서브서사가 공존하는 일반적 형태의 현대상업영화들은 캐릭터에 영화적 재미의 상당부분을 기대고 있다. 관객들이 극에 몰입해야 끌어가는 이야기가 서사적 재미를 줄수 있고, 그래야만 영화를 보기 때문. 어찌보면 당연한 말일수도 있는 이말은 영화 제작비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그리고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는 주연배우의 ‘개런티’ 문제를 잘 설명해준다. 잘생기고 멋진 주인공이 등장하면 흥행의 반은 따놓은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영화의 상업적 성공여부를 떠나서 영화에서 배우가 차지하는 역할은 ‘흥행의 반’과는 또 다른 부분이다.
초기 에드워드 노튼을 연상시키는 스펙트럼
흔히 얘기하는 정공법의 배우들– 액팅머신-이라 불리는 로버트 드니로나 알 파치노 같은 배우들은 고전적 연기파 배우들이다.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강하게 드러내지 않으며 극 속에 등장하는 인물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관객들에게 전달하는데 집중한다. 어떤 상황, 어떤 시간에 있더라도 그 상황에 적절한 액션을 펼쳐보이며 그 순간 로버트 드니로, 알 파치노라는 이름은 사라지고 <택시 드라이버>가, <대부>가 스크린에 투사된다. 하지만 배우 스펙트럼의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는 이런 배우들이 있는가하면 스펙트럼의 한축에 고정되지 않고 종횡하며 끊임없이 비현실성과 영화적 환상의 경계를 허무는 존재들이 있다. 에드워드 노튼이 그런 축에 속하는데, 에드워드 노튼은 전혀 일관적이지 않은 필모를 바탕으로 규정하기 힘든 연기패턴을 보여주고 있다. <투모로우>로 뒤늦게 주목을 받은듯하지만 인디영화계에서 어느정도 연기력을 인정받고 있는 제이크 길렌할이라는 배우 또한 흡사 초기의 에드워드 노튼을 연상케하는 다양한 필모를 자랑하며 신진 연기파 배우로 떠오르고 있는 인물이다.
<세크리터리>에서 사도마조히즘에 살짝 경도된채 제임스 스페이더에게 엉덩이를 내맡겼던 매기 길렌할과 남매 사이인(매기가 세살 터울 위) 제이크 길렌할은 연출가인 아버지와 시나리오 작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집안의 영향으로 어린시절부터 연기에 맛을 들인 제이크 길렌할은 여타 배우집안 출신들과는 다르게 어린시절부터 브라운관이나 스크린에 얼굴을 알리거나 하지 않았다. 그의 데뷔작은 <옥토버 스카이>라는 영화. <옥토버 스카이>라는 인디영화에서 타이틀롤을 맡은 것에서 알수 있듯이 그는 주위 틴에이저 배우들이 데뷔작으로 택하는 로맨틱 코미디나 틴에이저 취향의 영화들과는 약간의 거리를 가지고 영화의 시작을 알렸다. <옥토버 스카이>는 구 소련의 스푸트니크 발사 당시 미국의 한 작은 마을 풍경을 그린 영화로, 구 소련과의 체제 경쟁 광풍에 휩싸였던 미국의 당시 상황을 살짝 조롱하는 메타포를 함유하고 있다. 여기서 제이크 길렌할은 동네 친구들과 함께 하늘로 작은 로켓을 쏘아올리는 호머 히컴을 연기하며 정공법의 배우들이 그러하듯, 우주여행이라는 소박한 이상을 실현하는 순박한 소년 그 자체를 보여주는데 집중한다. 하지만 이런 그의 연기는 바로 다음에 찍은 영화인 <버블보이>, <도니 다코>로 재해석된다.
<도니 다코> VS. <버블 보이>
레이건 시대의 엄숙주의와 냉전적인 폐쇄적 사고를 엽기적인 코미디 패턴으로 버무린 <버블보이>에서 제이크 길렌할은 기존에 <옥토버 스카이>에서 보여주었던 모범적이고 이상주의적인 시골마을 소년에서 벗어난다. 면역상의 이유 때문에 평생 비닐 풍선 안에 갇혀서 살아야 하는 소년 ‘버블보이’로 분한 제이크 길렌할은 국기와 국가에 대한 경배에 사로잡혀 있는 어머니의 보호에서 벗어나 사랑을 찾아 미국을 여행하며 미국의 조롱받을 만한 현재 모습을 보여준다. 장애인과 유색인종을 경멸하는 화장실 유머류 영화의 연장선상으로 생각될 소지가 있는 <버블보이>에서 제이크 길렌할은 선배 연기파 배우들로 진행할수 있는 첫번째 필모를 스스로 해체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의 연기이력을 논하는데 있어 빼놓을수 없는 것은 바로 <도니 다코>. 전작 <버블보이>의 캐릭터와 정확하게 반대편에 있는 도니 다코를 연기하며 제이크 길렌할은 그간 <옥토버 스카이>와 <버블보이>에서 언뜻언뜻 보여주었던 정상성의 이면이 하나로 재구성한다. <옥토버 스카이>와 <버블보이>는 장르적으로 정통 드라마, 코미디의 형식을 갖고 있으나 각각 광풍에 휩싸인 사회에 대한 조롱이란 메타포를 함유하고 있었으며 캐릭터들 또한 억압된 욕망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사실 그전의 영화에서 <도니 다코>에서 보여주었던 이중적인 광기를 발견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도니 다코>는 꾸준히 정상적이었던 자신의 역할들이 가질수 있는(혹은 가졌던) 광기를 한꺼번에 함유하고 있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이런 흥미로운 필모는 딱히 규정되지 않는 일관성을 갖는다는 점에서 제이크 길렌할을 주목하게 만드는 것이다.
재구성, 재해석되는 그의 필모
가장 일반적인 역할이라 할수 있는 미 남부 시골소년의 얼굴과 도시적인 도니 다코의 얼굴을 동시에 훌륭하게 소화해낼수 있다는 점에 있어서 그의 연기와 마스크가 가지는 장점. 그의 얼굴과 눈이 때로는 청순하고 고결한 이상의 대변이라는 점에서(<옥토버 스카이>), 광기와 환상, 비정상성의 상징이라는 점에서(<도니 다코>), 무색무취의 백지상태(<버블보이>)라는 점에서 굉장히 광범위한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애쉬튼 커쳐 같은 동갑내기 틴에이저 배우들이 상당히 안전한 선택, 로맨틱 코미디나 멜로물로 시작한 것과 반대로 제이크 길렌할은 인디영화에서 그리고 자신이 계획한 캐릭터를 조합하며 필모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투모로우
다소 의외라고 생각할수 있는 제이크 길렌할의 <투모로우> 출연도 이런 필모의 ‘구성’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한다면 쉽게 수긍할수 있는 부분이다. 이 영화에서 길렌할이 맡은 역할은 퀴즈대회 참가차 뉴욕에 갔다가 가족과 떨어지게된 고등학생 샘 홀역. <투모로우> 서사의 핵심축이라 할수 있는 가족애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로 빙하기가 도래한 지구의 유일한 희망(젊은 세대)이라 할수 있는 인물이다. 이 역할에서 길렌할은 스펙터클에 함몰되기 쉬운 <투모로우>에 강력한 드라마성을 함유시키며 영화를 빙하기에서 건져낸다. 스펙터클의 도구로 쓰이는 함정에서 영화와 ‘함께’ 벗어나는 것. 사실 사실 그는 시각적 재미와 서사적 재미, 그 어느 것도 소홀히 할수 없는 블록버스터 무비에서 너무나 강한 자기성을 드러내기 보다 ‘상생’하는 방법을 배운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필모에서 <투모로우>는 제작자들의 자신에 대한 약간의 백안시를 벗어나게 하는데 많은 도움을 줬을 것은 당연한 것. 길렌할은 현재 이안의 신작 <브로크백 마운틴 Brokeback Mountain>. 60년대 두 청년의 아이러니한 상황을 그릴 영화인 이 작품에서 이안의 이방인적 시선과 길렌할의 분열적 모습이 만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뭔가 색다른 기대를 하게 만든다는 점은, 길렌할이 지금껏 보여주었던 모습에서 기인한다.
사실 배우만 등장해도 영화는 성립한다. 그 배우가 보여주는 우리 안의 또다른 삶이 우리가 영화를 보는 이유이며, 예술을 즐기는 가장 큰 이유이다. 하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저그런 모습이라면 누가 ‘그 삶’을 스크린에서 무대에서, 브라운관에서 볼 것인가. 우리의 영역 속에 포함되어 있으나 인지하지 못하는 균열적이고 다양한 모습들, 그들이 이끌어가는 닮았으나 닮진 않은 모습들이 우리가 배우들에게서 발견하는, 혹은 하고 싶어하는 모습들이다. 길렌할에게서 관객들이 기대하는 부분도 당연하지만 그런 것들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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