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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가지를 흔들 듯이 - 3학년 1학기 국어교과서 3-1(가) 수록도서 ㅣ 동시 보물창고 3
정완영 지음, 김수연 그림 / 보물창고 / 2014년 7월
평점 :
오늘처럼 더운 날이면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고 그저 덥다, 이 생각만 하게 된다. 그것이 비단 여름뿐만이겠는가. 봄에는 황사때문에 코가 간지럽다, 싫다. 가을에는 아 외롭다, 살찐다. 겨울에는 춥다, 아 춥다. 태생이 시인과는 거리가 멀기에 단순하고 일차적인 생각만 한다. 그러다 가끔 시를 읽게 되면, 같은 시간을 살면서도 다르게 표현하는 그들에게, 시에게 감탄한다.
정완영 시인의 <꽃가지를 흔들듯이>는 동시조집이다. 그러나 형태를 자유롭게 배치하여 동시조라는 느낌보다는 참한 동시의 느낌이 든다. 그래서 낯설다, 라는 느낌보다는 익숙한데, 뭔가 다른 새로움이 느껴진다.
까치가
깍 깍 울어야
아침 햇살이 몰려들고
꽃가지를
흔들어야
하늘빛이 살아나듯이
엄마가
빨래를 헹궈야
개울물이 환히 열린다.
동시조에도 행과 연을 도입하여 동시인듯 하면서도 마지막 종장의 첫 구절은 세글자로 시조의 형식을 갖추었다. 어떻게 보면 동시와 동시조의 구별을 짓는 일이 무의미한 듯 한 이 시들은, 그러나 동시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규칙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규칙성이 시를 더욱 안정감있게 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어딘가 차분한 마음이 들게 한다.
시에서도 그러한 차분한 느낌이랄까, 나지막이 일러주는 할아버지의 음성이 들리는 듯 하다. 철저히 구어체의 문장으로 구성된 시조들은 할아버지 무릎에서 듣는 옛이야기들을 닮았다. 따뜻한 옛 정취를 함뿍 담았음에도 오래되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건, 시인의 마음 속에 동심이 살아 있기 때문이리라. 읽으면서 가장 좋았던 시도 그런 시조였다. 아이와 할아버지가 묻고 대답하는 듯한 <꽃과 열매>라는 시조는 호기심 많은 아이와 할아버지의 대화를 엿듣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뭇잎은 새파란데
꽃은 어찌 새빨갈까
세상에 꽃 빛깔 많아도
잎 닮은 빛 엎는 것은
벌 나비
환하게 불러
열매 맺잔 뜻이란다.
그러면 이상하다
꽃은 붉고 샛노란데
어찌해 풋열매는
잎을 닮아 새파랄까
잎 속에
덜 읽은 열매를
숨겨 두잔 뜻이란다.
용하고 또 용하다
높고 깊은 하늘의 뜻
열매가 다 익으면
고운 빛깔 갈아입혀
과일은
새에게 주고
씨는 묻잔 뜻이란다.
<봄비>로 시작한 동시조는< 설날 아침>으로 이어진다. 사계절을 동시조에 담아내었다. 봄에는 상추씨도 뿌리고 보리밭을 건너기도 한다. 박꽃을 보다가 큰나무 아래서 더위도 피한다. 불러만 보아도 단물 잘잘 흐르는 달이 뜨는 한가위도 보내고 강물 소리 나는 연줄을 팽팽하게 감아 높이 연을 올려 띄운다. 지금은 잊혀진 일들이 많다. 요새 아이들이 상추씨를 알 것이며, 보리밭의 푸른 너울을 본 적이 있을까. 박꽃은 어떤 색인지 알려나. 희뿌연 하늘에도 달은 뜨는지, 연이 하늘로 올라가면 가슴이 벅차서 터질 것 같은 그 마음도. 아마 이 시조들을 읽어본다면, 아이들도 경험하고 싶을 것이다. 연도 상추씨도 박꽃도.
읽는 내내 가슴이 저미게 아름다운 추억들을 떠올리게 된다. 내가 기억하는 추억들을 몇 개의 자음과 모음들로 살려낸 시인의 마음에 고마운 마음이 든다. 그리고 그림을 그린 김수연 화백에게도 감사한 마음이다. 소설은 영화같고 시는 사진 같다고 했던가. 머리 속에 장면 장면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시와 함께 그림으로 표현되어 더욱 좋았다. 시조들에 너무나 잘 어울리는 그림들이었다. 하나하나가 작품이고 감탄이었다.
나이가 들수록 느려지는 미학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좀 더 어렸을 적에는 빠른 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느리게 이해하고 느리게 행동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즐기고 간직할 수 있는지를 깨닫게 된다. 정완영 시인의 동시조도 그렇다. 느릿느릿 나지막이 얼러주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