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에 친구와 만나서 커피나 한잔하려고 시내에 갔다가 민족대이동을 몸소 느꼈다. 세뱃돈 받고 좋아서 뛰쳐나온 꼬꼬마부터 잔소리와 집안일에서 탈출을 감행한 어른들까지, 시내 한복판은 무슨 아이돌 팬사인회가 열리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길을 걷다 감히 방향을 틀라치면 앞, 뒤, 옆사람과 한번쯤은 부딪혀야했다. 커피숍은 또 어떤가. 대형 프렌차이즈 커피전문점부터 소규모 개인 커피숍까지 단 둘이 앉을 자리 조차 없을 만큼 사람들로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그 와중에 폰케이스를 바꾸고, 필름을 붙이고, 음반가게에 들러서 벼르고 있던 CD 하나를 샀다. 바로 대세 <겨울왕국>의 사운드 트랙이다. 



OST코너에서 <겨울왕국> 디럭스 에디션을 골라 카운터로 가고 있는데, 홀점원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오더니 "손님 잠깐만요."했다. "아, 겨울왕국은 카운터에 많으니 계산하실때 달라고 하시면 줄거에요. 이건 전시용으로 놔둔거라..."하면서 CD를 달라고 했다. 과연 대세는 대세군. 본래 음반가게나 책가게나 대세는 카운터에 쌓아두는 법이지. 사가는 사람이 많으니까.


<겨울왕국>은 <변호인>과 더불어 올 겨울 최고 대세 영화가 되었다. 나 역시 개봉하자마자 보고, 연휴에 3D로 한번씩 더 보았으니 확실히 대세에 한몫했다고 할 수 있다. 원래 애니메이션을 좋아하고, 영화나 드라마의 사운드트랙을 많이 사모으는 편인데, 디즈니에서 간만에 대작 하나 터뜨려주었으니 나로선 기쁠 수 밖에. 최근 각종 차트를 휩쓸고 있는 엘사의 테마곡 'Let it go'를 위시하여 'Do you want to build a snowman?', 'Love is an open door', 'For the first time in forever' 등 영화내내 나를 즐겁게 해주었던 곡들을 CD로 들을 생각을 하니 왠지 설렜다. 이걸 CD로 들으려고 일부러 음원사이트에서 음원을 다운받지도 않았다. 어차피 살건데 음원으로 다운 받으면 감흥이 떨어지니까. 몇 백원이지만 이중결제해야하니 돈이 아깝기도 했고. 


집에 돌아와 오랜만에 CDP를 꺼냈다. 몇백장의 CD를 가지고 있는 주제에 집에 쓸만한 홈오디오 시스템 하나 없다는 게 좀 슬프지만, 어쨌든 나에겐 CDP가 있으니까 뭐. 내가 갖고 있는 CDP는 파나소닉과 소니 두개인데, 간만에 꺼내보니 파나소닉은 고장이 났는지 새 건전지를 넣어도 작동이 안 되고, 소니는 충전건전지의 +극 부분이 약간 녹슬었긴 했지만 완충하니 제대로 작동했다. 소니 CDP를 라인인 케이블로 아이폰 독스피커에 연결해서 크게 들었는데, 꽤 쓸만했다. 아무래도 CDP라 출력이 약해서 독스피커의 볼륨을 엄청 올려야했지만 말이다.



소니 D-NE730



위 CDP는 2007년인가 'CDP들이 멸종위기'라는 카더라 소식에 혹시나 해서 하나 사둔 거다. 파나소닉 CDP가 있긴 하지만, 고장나면 어쩌나 싶어서 사둔 건데, 나름 선견지명이었나보다. 실제로 파나소닉은 고장이 났고, 이건 그나마 최신모델(...)이라 그런지 아직 쌩쌩하니까. 당시 병행수입된 제품을 사서 7~8만원 정도 가격으로 제법 싸게 샀던 기억인데, 지금 검색해보니까 무려 45만원이나 한다. (헐- 그돈이면 야마하 오디오도사겠다.;;;;) 속물스럽지만 가격이 그만큼 뻥튀기되니까 갑자기 내 CDP가 사랑스러워진다.


<겨울왕국>을 몇 번 돌려듣고나니 그동안 소홀했던 다른 사운드트랙에도 눈이 갔다. 그래서 'Love Affair'와 'Anastasia', 'Titanic', 'A lot like love'를 차례로 들었다. 실체가 없는 mp3 음원과 동그란 형태를 가진 CD의 음원은 같은 음악이라도 그 느낌이 전혀 다르다. LP도, 카세트 테이프도 그 느낌이 다르다. 음질의 좋고 나쁨을 떠나 향유하는 방식이 다르므로, 받아들이는 느낌도 달라지는 것이다. 칙칙지지직 튀는 LP에는 디지털 매체에는 없는 아날로그의 향수가 있고, 늘어진 테이프에는 어리고 서투른 시절이 숨겨져있다. 디지털로의 전환을 알렸지만, 이제는 천천히 그리고 확연하게 구시대 매체로 귀속되어가는 CD에는 나름대로의 세련됨과 과도기의 추억이 함께 묻어있다. 그래서 CD는 디지털인데도 묘하게 아날로그적이다. 아마 좋아하는 가수의 앨범을 물리적으로 소장할 수 있는 마지막 매체가 아닐까. mp3는 CD를 갈아끼우거나 앨범 속지를 들여다보며 가사를 곱씹을 수 있지는 않으니까. 점점 발매되는 CD의 양이 줄어들고, 음원쪽으로 기울어가는 걸 막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난 CD가 오래오래 사랑받았으면 좋겠다. 정말로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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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노무직 2014-02-03 1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여기 계셨군요!!

근데 다소님은 뭐하는 분이세요??
오래 알고지내면서도 전혀 뭐하시는 분인지 모르네요..

다소 2014-02-04 12:34   좋아요 0 | URL
온지 얼마 안 됐어요. 정착할지 안 할지도 모르지만...아마 할 듯.
제가 포스트에서 제 얘기 안하던가요? (최근엔 안 했나..;ㅎㅎ) 그냥..꼬맹이들 가르쳐요.^^
 



  • 취접냉월 / 황미나
    팀매니아 / 1~2권, 완결 (1995)
  • 잡지 연재 : 『르네상스』1991년 1월 ~ 1992년 1월



오랜만에 [취접냉월]을 꺼내 읽었다. "술 취한 나비와 차가운 달"이란 뜻을 갖고 있는 이 만화는 1990년대 초반, 잡지『르네상스』에서 연재된 황미나표 무협만화(라고 한)다.(전문[傳聞]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이유는 그 때의 내가 만화잡지라고는 "보물섬" 밖에 몰랐던 순진한 국민초등학생이었기 때문) 이 책을 읽은 건 단행본이 나오고도 한참 지나서였는데, 아마 고 1때였던 걸로 기억한다. 일찍이 무협에 심취해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무협이란 게 한번 빠져들기 시작하면 거의 아편 수준의 중독 증상을 유발하며, 어설프게 떼어낼라치면 무시무시한 금단 현상까지 동반하는 마력의 장르물인 건 주지의 사실.(정말?) 따분하기 짝이 없는 야자시간, 공부는 뒷전이고 감독 선생님 몰래 만화책을 읽거나 영웅문을 비롯한 각종 무협소설들을 탐독하던; 그 시기의 내가 무협과 만화의 절묘한 조합물인 [취접냉월]을 읽게 된 건 어쩌면 필연적인 것일지도.

황미나는 '작가의 말'에서 자신은 동양적 정취의 무협물에 대한 꿈이 있다고 말한다. 결국은 '취향'이라는 다소 빈약한 어휘로 밖에 설명할 수 없지만, 밑바닥에 깔린 진한 애정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무협이라는 통속적 판타지에서 때론 심오한 철학을 느끼기도 한다는 대목에서는 절로 고개를 끄덕끄덕. 그러면서도 기존의 무협과는 다른 만화를 그리고 싶었다는 황미나는 정통 무협물의 방식을 따르면서도 이색적인 [취접냉월]을 그려내었다.




하루 아침에 가족이 몰살 당하지만 용케 살아남아 복수를 다짐하는 주인공이 우연히 스승을 만나 절대고수로 성장하는 스토리는 무협에 있어 오래된 정석 중 하나다. 철이 들기도 전에 복수심부터 배운 주인공의 심리와 행동 패턴은 늘 독기어린 아슬아슬함이 있다. 알고보니 스승이 자신의 원수였다거나 더 나아가 진짜 원수는 따로 있다는 설정, 때마침 찾아온 사랑이 원수의 핏줄이라는 갈등 구조는 이제 고전 중의 고전이다. 황미나는 이 전형적인 플롯을 착실히 따르면서, 그녀가 말한 '취향'을 작품 속에 녹여내는 데 성공한다. 이른바 '동양적 정취'가 물씬 풍기는 것이다. 수묵화 느낌의 그림체도 그러하거니와 정情에 이끌리는 인물들의 감정 흐름, 애달픈 마음을 표현하는 한시가 배경으로 깔리는 것은 영화보다 절제되고 소설보다 애틋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그것이 바로, 까딱하면 흔해빠진 이야기가 될 수도 있었을 이 만화가 매력적인 이유다. 늘어지지 않고 촘촘하게 진행되는 서술 방식은 예상 가능한 전개임에도 극적 긴장감을 높이는데 일조한다. 무협복수극의 코스를 착착 밟으면서도 순정(만화)의 두근거림을 놓지 않는 [취접냉월]은 비록 신선하지는 않을지언정 내게는 각별한 만화. 오래된 만화책의 눅눅한 향마저 고풍스럽다. 스산한 밤, 기울어가는 달밤에 읽기에 그야말로 딱이다.



차가운 달이뜨니 취한나비 날아든다
나비야 오지마라 네 앉을곳 없도다
내마음 차갑고 검조차 무정한데
검에 비친 이눈물은 뉘의 것이냐...


검하나에 의지한채 홀로 방랑하는데
강호엔 내한몸 뉠곳조차 없어라
수심속에 잔을드니 옛정이 떠오른다
묻노니 달빛은 어디를 비추는가...


검 대신 잔을 들어 슬픔을 마실 차에
하늘에 달이 뜨니 술잔에도 있어라
강호엔 오늘도 혈화가 흩날리니
무정타 검이여, 내 마음을 모르는고...


- 취접냉월(醉蝶冷月) 중에서 -

 

 

2008/05/04 작성, 알라딘에 옮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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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2-02 2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놔 마니아로써의 열정이 느껴지네요. 좋습니다.
제가 아는 분 중에 만화를 좋아해서 만회학회 회원이 되어서
세미나에 종종 참석하시는 분이 계시는데
그분 소개시켜 드리고 싶네요... 후후후.....

다소 2014-02-02 23:15   좋아요 0 | URL
오오, 대단하시네요. 저는 그냥 혼자 좋아하는 걸로 끝냈는데, 제 친구중에서는 직접 동호회 만들고, 소재 공모해서 만화 그리고, 비평하고 이런 친구들도 많았어요. 그런 애들 보면 저는 정말 열정없는 만화애호가구나 싶었죠. 전 그냥 사서 보는 정도였으니..;

곰곰생각하는발 2014-02-02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맨 마지막 시'를 읽으니 아, 이 약간 허세가 들어간 게 만화의 진정한 의미가 아니었던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정말 한때 만화 르네상스였는데, 정치하는 새끼들이 다 개같이 만들어놔서.. 정말 욕 나오죠...

다소 2014-02-02 23:15   좋아요 0 | URL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이 정치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진심으로.
 

 

 

한 문장으로 간추리면, '차가운 인상에 다소 깐깐해 보이는 모범생 기현과 누구와도 잘 어울리고 능글능글하며 은근히 마이페이스 태경의 학원라이프 한자락'이라고 할 수 있겠다. 두 남자를 중심으로 한 심플한 학원물이지만 그게 오히려 감수성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이 이 만화의 매력. 평범한 남학생들의 일반적인 학교생활은 오히려 신선하기까지 하다.(사실 '순정'에 기반을 둔 만화에서 소년 특유의 '거친 모습'을 찾기는 힘들다. 간혹 그것이 현실과 동떨어져 보이기도 하지만 나쁘지 않다. 반듯한 훈남 고교생의 환상을 쫓는 게 얼마나 설레는 일인가) 10대란 알 수 없는 감정들이 하루에도 열두번씩 소용돌이 치는 때. 설명할 수 없는 끌림은 남녀사이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어서 당사자는 혼란하기 짝이 없다. 어느날 갑자기 자신의 삶속에 들어와 이유없이 친절하고, 남이 못보는 자신의 감정을 단박에 눈치챈다거나 하면 신경이 안 쓰이는 게 더 이상하지. 심지어 귀찮기만 한 녀석이 어느 순간 멀어지면 허전해지기까지 한다. <올웨이즈>는 기현의 시점에서 태경과의 관계를 이야기 하는 만화다. 단지 '같은 반 친구'에서 '의미있는 내사람'이 되기까지의 과정은 '남녀사이의 시작'만큼이나 두근거린다. 특히 눈을 바라보며 살짝 낯뜨거운, 그러나 분명히 진심인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는 모습은 나까지 두근거릴 지경. 이쯤되면 보는 사람도 조바심 나는 법. '이거이거 위험한데?'를 외치며 음흉한 미소로 흥미진진하게 책장을 넘기지만 만화는 급속하고 매정하게 끝을 내 버린다. 아쉬워라. 작가도 너무하다고 생각했는지 나름 양질의 에필로그로 마음을 달래주기는 한다. 그러나 한껏 고양된 나의 상상력은 날개를 달고 훨훨. 자극적인 설정이나 어여쁜 그림체로 유혹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서 두근거리게 하는 게 권교정 학원물의 특징. 그저 조금만 더 길었다면 하는 아쉬움만 남을 뿐.



 
갑자기
이 녀석과 <대화>란 걸 하고 싶어졌다.



난…. 지금까지 어떤 얘기를 해 왔더라…?

응….
그래.

그것 말고 조금은 다른 얘기를 해 보고 싶어.
이런 생각이 든 것도 처음이지만.

 

 

 

 

2010/10/08 작성, 알라딘에 옮겨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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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소 후 발굴해낸 이마 이치코의 단편집. 야오이와 판타지계를 넘나들며(?) 종횡무진 활약하는 이마 이치코의 초기 작품들이 대거 실려있다. 짧게는 4쪽 짜리 지면 메우기용 만화부터, 풋풋함이 물씬 느껴지는 데뷔작은 물론 장편으로 그려도 좋을 정도로 여운이 남는 만화까지 통일성은 없지만 다양성은 넘쳐난다. 넓게 보면 <이마 이치코 걸작 단편집>이라고 해서 2000년대 초반에 대원에서 연속 출간한 단편집 중 첫 번째 작품집이기도 하다. 전부 10편이 실려있는데, 초기작임에도 불구하고 그간 보여왔던 그녀 작품들의 정체성이 분명하게 드러나서 감탄하게 된다.

하지만 작가는 이 작품집을 내기까지 제법 갈등을 했었나보다. '그리운 망신의 추억'이라는 제목이 붙여진 후기에 따르면, 작가가 이미 어느 정도 인지도를 얻은 후에 이 작품집을 내게 된 터라 새삼 자신의 초기작을 단행본 형태로 묶어낸다는 게 창피해서 "가능하다면 땅이라도 파서 깊이 묻어버리고 싶다"고 말한다. 원래 작가들이란 자신의 초기작을 늘 부족하다고 여기는 법이니까. 오죽하면 '자기 책 몰래 고치는 사람'이란 책까지 나오겠는가. 다행히 이마 이치코는 "여기서 망신을 잘 견딘다면 그 대가로 인세가 들어오게 된다"는 재치있는 대사를 치며, 각 작품에 대한 간단한 해설을 덧붙인다. 팬으로서는 참으로 고마운 일.

개인적으로는 '마이 뷰티풀 그린 팰리스'라는 그녀의 데뷔작이 가장 기억에 남는데, 이마 이치코 특유의 경쾌한 BL 분위기가 데뷔작에서 이미 결정되었구나 싶어 놀랐다. 동성간의 야릇한 감정에 대해 지분거리지 않고 산뜻하게 처리하는 진행방식은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어쩌다 이 문제를 리얼리티 측면에서 진지하게 생각하려는 사람은 바보가 되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 과연 이치코 사마는 독자를 자신만의 세계로 데려가는 능력이 출중하다. 멋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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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2-02 2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오이 만화로군요.. 후후.
이것도 체질적으로 맞아야 비엘 만화도 그린다고 하더라고요.
내 친구는 주로 로맨스 만화를 그리는데 비엘 만화는 못 그리겠다고 하더라고요...

다소 2014-02-02 23:17   좋아요 0 | URL
저는 일명 야오이'를 이십대 넘어서 접했는데, 처음에 가졌던 편견이나 선입견들을 제쳐놓고 보면(아니 그걸 뛰어넘을 만한)수작들이 제법 많더라구요. 그래도 하드한 건 잘 못보지만.. 제 친구중에도 다른 만화는 다 그리겠는데 비엘은 체질에 안 맞다고 청탁거부하는 친구 있어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02-03 11:35   좋아요 0 | URL
다소 님 친구분도 만화가시군요. 제 친구도 비엘 청탁을 많이 받는 모양인데
못 그리겠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밥 먹고 살려면
동성을 이성처럼 그리면 되잖아.. 하고 말해도 그게 안 되나 보더라고요.. 후훗..

다소 2014-02-04 12:32   좋아요 0 | URL
아..정식 만화가는 아니고, 아마추어로 이것저것 그려요. :-)
 

작품명 붕우
작가명 권교정
장르 혼합(단편)
발행정보 1999년 도서출판 대원(주) 단편집 발행 (전1권)
2003년 시공사 권교정 단편시리즈2 발행 (전1권)
수록작품 - 대원(1999)
제1화 붕우
제2화 마법사의 화장실
제3화 피터팬
패러디 "후크를 말한다"
- 시공사(2003)
붕우
피터팬
후크를 말한다
작가 후기

 


 

짧지만 강한 인상을 남긴 단편집. 늘 느끼는 거지만, 권교정의 그림에는 묘한 중독성 같은 게 있다. 어딘가 어수록해보이고, 인물들은 미묘하게 감정을 억제하거나 약간은 결여된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이게 굉장히 와닿는단 말이다. 이것이 이야기 자체의 힘인지, 작가의 연출력 때문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모르겠지만 여하간 어떤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음은 틀림없다.

표제작 '붕우朋友'는 2회 연재 분량의 짧은 단편으로,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서하와 방연은 전란의 가운데 병법가로서의 면모를 보이며 우정을 다지게 되나, 방연이 세상에 자신의 재능을 펼쳐보이고 인정받고 싶어하는 것과 달리, 서하는 더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저 소박하게 시골에서 소일하며 살기를 바란다. 이를 바라보는 위낭자는 서하의 재능을 높이 사면서도, 자신의 욕망을 실현해 줄 이는 야심이 있는 방연이라 생각하고 그와 결혼하여 차근차근 최고병법가의 아내로서의 위치를 다져간다. 한편 위나라의 군사로서 명망을 쌓고 있던 방연은 늘 서하가 초야에 묻혀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 하여 그를 위나라로 불러들여 천거하려 하고, 이를 알게 된 위부인(위낭자)은 서하의 뛰어난 재능이 남편의 출세에 방해가 될 것을 예감하고 모함을 해 그를 옥에 가둔다.

만약 방연이 야심과 우정 사이에서 방황하는 그렇고 그런 캐릭터였다면 '붕우'는 그저 스쳐지나갈 짧은 이야기일 뿐이다. 그러나 '방연' 캐릭터는 독자의 예상을 약간 비틀면서 제목 이상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방연은 위부인의 계략을 알아채고 서하를 구해냄과 동시에 서하를 세상으로 끌어낼 최고의 비책을 쓴다. 그것이 자신의 목을 죄어오는 비수가 될지라도. 이런 방연에게 위부인은 서하의 존재가 방연에게 위험이 될 거라고 경고하지만, 방연은 초연하게 받아들인다.

두 친구 사이의 우정과 오해가 주요 맥이지만, 그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이 이야기 전반에 흐르는 절제된 슬픔이다. '붕우'에는 크게 세 명의 인물이 나오는데, 이 인물들은 전체 이야기가 본 궤도를 타면서 엇갈림을 반복한다. 서하는 촌부로 살기에 자신의 능력이 너무나 출중했고, 방연은 야심가로 대성하기엔 그 안의 우정과 사랑의 비중이 너무나 컸다. 위부인은 자신의 욕망을 방연을 통해 이루려 하지만 그 사이에 진짜 사랑이 싹트고 있음을 몰랐다. 서하는 방연을 믿었으나 결국은 오해했고, 방연은 서하를 시기하기엔 그의 재능과 서하라는 인간 자체를 너무나 사랑했으며, 위부인은 욕망을 쫓느라 자기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지 못했다.


 

권교정은 물고 물리는 엇갈림을 특유의 그림체와 분위기로 담담하게 끌고 가다가 약간은 비극적 결말로 냉정하게 끝을 내버렸는데, 작가 후기에 의하면 그런 결말이 비극을 돋보이게 하려 함도 아니요, 인물에 대한 배려도 아닌, 그저 그래야만 비로소 성립이 되는 이야기였다고 간략하게 덧붙인다. 당연하지 않은가. 역사를 아예 바꿀 수는 없었으니. 그렇다. 이렇게 짧지만 강렬한 여운을 남기고 끝난 '붕우'의 진짜 매력은 실제 역사에서 그 이야기의 틀을 가져와 완벽히 권교정 식으로 비트는 데 있었던 것이다.

실제 역사에서 손빈은 전국시대의 전략가로 어려서 방연과 동문수학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빈(臏, 종지뼈)이란 이름은 방연의 계략으로 무릎의 슬개골을 빼내는 형벌을 받은 뒤 붙여진 이름이고 본명은 알 수 없다고 하니, 만화 속 '서하'라는 이름은 아마 작가의 상상력의 산물일 게다. 만화와 달리 실제 역사에서 방연은 손빈에 대한 열등감이 굉장히 컸고, 자신의 자리를 빼앗길까 지레 염려하여 그를 위나라로 불러들여 계략에 빠뜨려 자신의 안위를 도모하려 했던 모양이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진 고생 끝에 위나라를 빠져나가 제나라 병법가로 등용이 된 손빈은 마릉(馬陵)에서 방연을 속여 마침내 그를 죽음에 이르게 만든다. 손빈을 이기고 싶었으나 끝내 이길 수 없었던 방연은 죽어가며 "遂成豎子之名(기어코 그 녀석의 이름을 떨치게 만들었구나)"라고 하였다고 한다. 권교정은 이 피투성이 전투의 한 자락을 보고 일인자와 이인자의 대결이 아닌, 친한 친구와의 우정과 오해로 인한 슬픈 이야기로 재창조했다. 방연의 마지막 말을 '서하가 세상에 나와 재능을 떨치고 있음을 기뻐하며 죽노라'로 역설하고 있으니 그 상상력이 얼마나 돋보이는지. 위부인 캐릭터와 편지라는 장치를 적극 활용함으로써 이야기에 신빙성과 안타까움까지 더한다. 전하려 했으나 전하지 못한 위부인의 편지를 통해 우리는 역사에는 없는 뒷이야기를 마음껏 상상한다.

권교정은 작품에 자기 색을 확고하게 불어넣는 작가다. 특히 동화를 재해석하며 보여주었던 재능은 많은 이들에게 신선한 감동을 주었다. 흥미 위주의 패러디가 아닌 생각을 확장할 '꺼리'를 제공하는 데에도 일가견이 있다. '붕우'는 그 연장선상에서 봐도 될 것 같다. 차이점이라면 동화가 아니라 역사 속의 한 단편을 재해석했다는 것. 개인적으로는 위부인 캐릭터에 관심이 많이 가는데, 셍각해보면 방연의 내면을 둘로 나누어 탄생한 게 위부인이 아닌가. 전형적인 권력지향에 자신의 욕망을 발현할 줄 아는 여인은 차고 넘치지만, 그 단계를 넘어서서 깨달음이 있은 후의 행보가 궁금하다. '붕우'를 프리퀄로 해서 그 후세의 이야기가 나온다면 재미있을 것 같다.



덧, 새삼 이 책의 절판이 아쉬워진다.
같이 수록된 '마법사의 화장실'과 '피터팬'도 재미있게 읽었지만 글이 너무 길어져서 그건 다음 기회에.

 

2012/05/25 작성, 알라딘에 옮겨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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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2-02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 < 우리집 > 이라는 리에코 만화 보셨나요 ?
저 요거 보고 벅찬 감독으로 몸을 떨었더랬죠.....
함 기회 있음 읽어보세요.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다소 2014-02-02 23:18   좋아요 0 | URL
곰발님이 추천해주신 만화 사볼께요. 곰발님이 쓰신 리뷰도 봤어요. 다른 분들 평도 좋던데... 기대됩니다. 그래도 땡스투는 추천해주신 곰발님께! :-)

곰곰생각하는발 2014-02-03 11:33   좋아요 0 | URL
탱스 투를 주신다는 말씀에 우리집을 읽었을 때의 감동보다 더한 감동을 얻습니다.

다소 2014-02-04 12:34   좋아요 0 | URL
오늘 배송 오기를 두근반 세근반 기다리고 있습니다. :-)

곰곰생각하는발 2014-02-05 20:10   좋아요 0 | URL
옷 !!! 우리집 사셨군요. 이야, 이거 어떤 감상일지 궁금하군요....
다 각자의 취향이 달라서 조심스럽군요...

다소 2014-02-06 06:28   좋아요 0 | URL
설연휴 이후 배송이 밀려서 늦게 받았는데 앞부분 30p 정도 읽으니 대강 감이 옵니다.
일단 감상은 다 읽은 뒤로 미루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