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취접냉월 / 황미나
팀매니아 / 1~2권, 완결 (1995) - 잡지 연재 : 『르네상스』1991년 1월 ~ 1992년 1월
오랜만에 [취접냉월]을 꺼내 읽었다. "술 취한 나비와 차가운 달"이란 뜻을 갖고 있는 이 만화는 1990년대 초반, 잡지『르네상스』에서 연재된 황미나표 무협만화(라고 한)다.(전문[傳聞]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이유는 그 때의 내가 만화잡지라고는 "보물섬" 밖에 몰랐던 순진한 국민초등학생이었기 때문) 이 책을 읽은 건 단행본이 나오고도 한참 지나서였는데, 아마 고 1때였던 걸로 기억한다. 일찍이 무협에 심취해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무협이란 게 한번 빠져들기 시작하면 거의 아편 수준의 중독 증상을 유발하며, 어설프게 떼어낼라치면 무시무시한 금단 현상까지 동반하는 마력의 장르물인 건 주지의 사실.(정말?) 따분하기 짝이 없는 야자시간, 공부는 뒷전이고 감독 선생님 몰래 만화책을 읽거나 영웅문을 비롯한 각종 무협소설들을 탐독하던; 그 시기의 내가 무협과 만화의 절묘한 조합물인 [취접냉월]을 읽게 된 건 어쩌면 필연적인 것일지도.
황미나는 '작가의 말'에서 자신은 동양적 정취의 무협물에 대한 꿈이 있다고 말한다. 결국은 '취향'이라는 다소 빈약한 어휘로 밖에 설명할 수 없지만, 밑바닥에 깔린 진한 애정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무협이라는 통속적 판타지에서 때론 심오한 철학을 느끼기도 한다는 대목에서는 절로 고개를 끄덕끄덕. 그러면서도 기존의 무협과는 다른 만화를 그리고 싶었다는 황미나는 정통 무협물의 방식을 따르면서도 이색적인 [취접냉월]을 그려내었다.
하루 아침에 가족이 몰살 당하지만 용케 살아남아 복수를 다짐하는 주인공이 우연히 스승을 만나 절대고수로 성장하는 스토리는 무협에 있어 오래된 정석 중 하나다. 철이 들기도 전에 복수심부터 배운 주인공의 심리와 행동 패턴은 늘 독기어린 아슬아슬함이 있다. 알고보니 스승이 자신의 원수였다거나 더 나아가 진짜 원수는 따로 있다는 설정, 때마침 찾아온 사랑이 원수의 핏줄이라는 갈등 구조는 이제 고전 중의 고전이다. 황미나는 이 전형적인 플롯을 착실히 따르면서, 그녀가 말한 '취향'을 작품 속에 녹여내는 데 성공한다. 이른바 '동양적 정취'가 물씬 풍기는 것이다. 수묵화 느낌의 그림체도 그러하거니와 정情에 이끌리는 인물들의 감정 흐름, 애달픈 마음을 표현하는 한시가 배경으로 깔리는 것은 영화보다 절제되고 소설보다 애틋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그것이 바로, 까딱하면 흔해빠진 이야기가 될 수도 있었을 이 만화가 매력적인 이유다. 늘어지지 않고 촘촘하게 진행되는 서술 방식은 예상 가능한 전개임에도 극적 긴장감을 높이는데 일조한다. 무협복수극의 코스를 착착 밟으면서도 순정(만화)의 두근거림을 놓지 않는 [취접냉월]은 비록 신선하지는 않을지언정 내게는 각별한 만화. 오래된 만화책의 눅눅한 향마저 고풍스럽다. 스산한 밤, 기울어가는 달밤에 읽기에 그야말로 딱이다.
차가운 달이뜨니 취한나비 날아든다
나비야 오지마라 네 앉을곳 없도다
내마음 차갑고 검조차 무정한데
검에 비친 이눈물은 뉘의 것이냐...
검하나에 의지한채 홀로 방랑하는데
강호엔 내한몸 뉠곳조차 없어라
수심속에 잔을드니 옛정이 떠오른다
묻노니 달빛은 어디를 비추는가...
검 대신 잔을 들어 슬픔을 마실 차에
하늘에 달이 뜨니 술잔에도 있어라
강호엔 오늘도 혈화가 흩날리니
무정타 검이여, 내 마음을 모르는고...
- 취접냉월(醉蝶冷月) 중에서 -
2008/05/04 작성, 알라딘에 옮겨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