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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머리 앤 - 빨강머리 앤 100주년 공식 기념판
루시 M. 몽고메리 지음, 강주헌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 부부는 앤셜리의 열렬한 팬이고, 우리 서가에는 오래전부터 빨강머리 앤 전집이 빛나게 자리를 잡고 있다.
루시모드몽고메리가 35년간 집필했다는 이 위대한 문학작품은 어떤식으로 재구성되어 전달되더라도 결코 우리 부부의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할 것이다.
캐나다의 대하소설의 진수를 보여주는 앤의 고장 PEI를 향해 떠나기로 했던 아내와의 약속은 경제적 사정으로 벌써 몇년째 뒤로 미뤄지고 있지만... 언제가 그 땅을 밟을 것이라는 믿음과 기대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30대 후반의 유부남으로는 드물디 드물게 앤을 사랑하는 내가 앤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또 한 권의 앤을 만났다.
가족들에게 '모드'라고 불렸다는 작가가 세상을 떠난 후에 태어난 손녀와 손자가 감사의 서문을 쓴 이 책은 '빨강머리 앤' 탄생 100주년 특별판이다. 모드의 상속녀 '케이트 맥도널드 버틀러'는 할머니 유품 중에서 일본 팬으로부터 선물 받았다는 기모노를 자랑스러워 하던 어린시절을 회상한다. 구한말 조선인이나 대한제국의 독립투사가 선물한 한복이나 짚신을 자랑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과 함께 문화의 힘이란 그런 것이구나 싶었다. 일본인들은 기모노를 선물했을 뿐만 아니라 앤의 어린시절을 1970년대에 이미 애니매이션으로 만들어 전세계에 공급함으로써 일찌감치 앤 문화의 동반자가 되어 있었다.
이야기는 에이번리의 레이첼 린드 부인의 surprise로 시작된다.
소심한데다 대인기피증까지 있는 늙은 총각 매슈 커스버트가 멋진 차림으로 외출하는 것 부터가 놀랄만한 일이었다.
매슈와 마릴다 남매는 스펜서 부인의 도움으로 호프타운의 한 고아원에서 농사일을 거들어줄 사내아이를 입양하기로 했던 것이다.
하지만 충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매슈가 도착한 기차역에는 말많은 수다쟁이의 빨강머리 소녀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매슈는 에이번리의 멋진 풍경에 홀딱 반한 소녀를 어찌하지 못하고, 집으로 데려오지만 팔짝 뛰는 마릴다는 미칠 노릇이다.
그 끔찍하다는 고아원으로 당장 돌려 보내야 하는 불쌍한 소녀와 두 늙은 남매와의 잘못된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저 애가 우리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우리가 저 아이한테 도움이 되겠지."
"오빠, 저 아이한테 완전히 홀린 것 같네요! 오빠 얼굴에서 저 애를 키우고 싶다는 걸 뻔히 읽을 수 있다고요."
"글쎄 저 아이는 정말 재미있는 아이야. 너도 역에서 집까지 오는 길에 저 아이가 한 얘기를 들었어야 했는데. (중략) 프랑스 남자 아이를 고용해서 내 일을 돕게 하면 되잖아. 저 아이는 네 말 벗이 되어주고." (55쪽)
마릴라 앞에서 자신의 본명이 맘에 들지 않는다며 코델리아라고 불렸으면 좋겠다는 엉뚱한 이 소녀는 이렇게 말한다.
"저를 굳이 앤이라고 부르시려면 꼭 뒤에 e를 발음해서 앤이라고 불러주세요. 훨씬 더 고상하게 들리잖아요. 아주머니는 사람 이름을 부를 때 마음 속으로 그 이름을 보지 않나요? 그 이름이 인쇄되어 나오는 것처럼요. 저는 그래요. A-N-N이면 촌스럽지만 A-N-N-E이면 훨씬 고상하게 보여요. 아주머니가 끝에 e 발음해서 앤이라고 불러 주신다면 저도 코델리아라는 이름을 포기하도록 노력해볼께요." (49쪽)
이름에 대한 소녀의 명언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상상력이 넘치는 소녀는 배리 호수를 반짝이는 호수, 가로수 길을 하얀 환희의 길은 기본이고,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며 행복에 겨운 하루를 보낸다. 아침에는 창가의 제라늄에게도 '보니'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자신이 있는 동안만이라도 그렇게 부르고 싶다면서 마릴라에게 애원한다.
"저는 제라늄이라도 이름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그럼 더 사람처럼 느껴지니까요. 그냥 제라늄이라고 부르면 제라늄이 상처를 받을지도 모르잖아요. 아주머니도 언제나 아주머니로만 불리면 기분이 좋지 않을거예요. 그래요, 저는 보니라고 부르겠어요. 오늘 아침에 제가 잤던 방의 창밖에 있는 큰 벚나무에도 이름을 지어 줬어요. '눈꽃 여왕'이라고요. 눈처럼 하얗찮아요. 물론 벚나무가 항상 그렇게 꽃을 피우진 않지만 꽃을 피우고 있다고 상상할 수는 있잖아요. 안 그래요?" (64쪽)
이 수다스럽고, 상상력이 풍부한 소녀는 자신의 처지에 저항하지 않고 순응하여 아쉬워 하는 매슈를 뒤로 하고, 마릴라와 함께 다시 고아원으로 돌아가게 되지만 그 짧은 동행에서 마릴라마저도 소녀에게 정이 들어 가슴 아파하고, 냉정함 보다는 소녀와 주고 받는 대화 속에 측은지심을 느낌과 동시에 미소를 불러 일으키는 소녀의 상상력에 흔들려 앤을 다시 초록 지붕의 집으로 데려와 버린다.
앤은 11살이 먹도록 경험해 보지 못했던 기도를 배우게 되고, 이웃에 사는 생일이 한 달 빠른 다이애나 배리라는 예쁜 소녀와 만나 자신의 주도하에 단짝 친구의 맹세를 한다. 주일 학교에 나가서 따분한 기도와 설교를 일상으로 받아 들이게 되었으며 설거지도 열심히 하는 등 빠르게 초록 지붕 집에 적응해 나간다. 당장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두 늙은 남매를 위해서라면 자존심마저도 쉽게 꺽을만큼 감사하는 마음으로 초록 지붕의 집에 적응에 가는 이 사랑스러운 소녀의 이야기는 독자가 마치 매슈나 마릴라인 냥 만들어 버린다. 반복되는 매슈의 '글쎄다~', '그러게 내가 뭐랬어' 또한 앤에게 적응해 가는 늙은 남매의 즐거운 마음이 아니겠는가.
따분함을 싫어하는 앤은 학교에 다니게 되면서 편견이 심한 필립스 선생님도 가뜩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데, 꽃미남 길버트 블라이스 마저 자신을 "홍당무! 홍당무!"라고 놀리는 통에 빨강머리에 대한 컴플렉스가 극심했던 소녀는 기대 이상으로 흥분하게 된 사건이 발생한다. 책상 위의 석판을 들어 길버트의 머리를 내려쳐 그만 두 동강 내버렸던 것이다. 길버트의 머리가 아니라 석판을...
이 사건을 계기로 길버트는 항상 앤에게 미안해 하고 기회만 되면 사과 하지만 앤은 영원히 길버트를 저주하기로 결심했고 절대 사과를 받지 않는 대단한 고집을 보여준다. 2년 뒤 어느 날, 연극 놀이 도중 앤이 타고 있던 배가 급물살에 휘말려 침몰하는 사고를 당해 다리 기둥에 매달렸다가 길버트에 의해 구조되는 사건이 생겼을 때마저도 그 결심은 유효하다.
앤의 독기어린 저주에 할말을 잃은 길버트는 그 자신도 다시는 앤을 쳐다 보지도 않기로 하여 둘은 완전한 앙숙이 되어 버린다. 앤은 길버트를 이기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길버트를 미워하는 만큼 단짝인 다이애나를 사랑하게 된다. 다이애나에 대한 앤의 사랑이 어느 정도인지는 다음의 고백에서 알 수 있다.
앤이 훌쩍이며 대답했다.
"다이애나 때문이에요. 저는 다이애나가 너무 좋아요. 다이애나가 없으면 못 살 것 같아요. 하지만 우리가 어른이 되면 다이애나는 결혼해서 저를 두고 떠날 거예요. 아,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죠? 다이애나의 남편이 미워요.미치도록 미워요. 제가 상상을 해봤거든요. 결혼이랑 모든 걸요. 다이애나는 눈처럼 하얀 옷을 입고, 면사포를 썼어요. 정말 여왕처럼 아름답고 당당하게 보였어요. 신부 들러리인 저도 퍼프소매가 달린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었고요. 얼굴엔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 얼굴 뒤에 감추어진 제 가슴은 찢어질 것만 같았어요. 그리고 다이애나에게 안녕이라고 말했어요."
그리고 앤은 완전히 슬픔에 잠겨 눈물을 펑펑 쏟아 댔다. (189쪽)
이렇게 풍부한 상상력으로 즐겁게 해주는 소녀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대화에서 은근하게 드러내는 퍼프 소매가 달린 옷은 앤의 로망이다. 100년전 그 지방에서는 퍼프 소매가 유행했는데, 시회성이 부족한 마릴라는 허영심을 이유로 앤에게 퍼프 소매가 달린 옷을 만들어 주지 않았으며, 앤은 늘 퍼프 소매를 꿈꾸는 소녀였던 것이다.
드리아스의 샘, 유령의 숲, 제비꽃 골짜기, 빅토리아 섬, 한가로운 황야, 연인들의 오솔길, 버드나무 연못, 자작나무길은 앤의 단짝인 다이애나와 상상으로 만들어낸 낭만의 공간들이다. 밤에는 촛불 신호로 의사 소통을 하는 두 소녀의 우정은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다. 그러던 어느 날, 다이애나를 초록 지붕 집으로 초대하여 대접하면서 실수로 술을 먹여 보낸 사건이 발생 한다. 그 일로 배리 부인은 자신의 딸이 더 이상 말썽꾸러기 앤과 놀지 못하도록 차단해 버려서 두 소녀의 슬픈 상상은 점점 깊어진다.
그러나 이별도 잠시 뿐, 부모님이 안계실 때 다이애나의 동생 미니 매이가 후두염에 걸려 생사를 오락가락 하는 지경에 놓여지고, 에이번리에 오기 전에 남의 집 보모 생활을 많이 경험했던 앤이 의사가 도착하기 전에 침착하게 구급조치를 해서 살려 낸 사건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앤은 이제 다이애나와 정말 영원한 단짝이 될 수 있게 된 것이다.
다이애나의 친척인 조세핀 고모 할머니가 주무시는 침대에 뛰어 오르는 실수를 해서 노여움을 사기도 하지만 앤의 사과를 받으며 어느새 소녀에게 매료된 노부인은 앤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시내로 두 단짝 친구를 초대하기도 하고, 선물로 예쁜 신발도 보내준다. 앤을 만나는 사람들마더 그 못생긴 소녀의 매력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마릴라 아주머니, 내일이 아직 아무런 실수도 저지르지 않은 새 날이라고 생각하면 기쁘지 않으세요?"
"내일도 너는 많은 실수를 저지를 거다. 너처럼 실수투성이인 애는 본적이 없으니까."
앤이 애처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요. 저도 잘 알아요. 하지만 저한테도 한 가지 장점이 있는 건 아시죠. 마릴라 아주머니? 저는 같은 실수를 두 번 저지르지 않는다고요."
"항상 새로운 실수를 저지르니까 그런 장점이 있는지 모르겠다."
"어머, 마릴라 아주머니, 모르세요? 한 사람이 저지를 수 있는 실수에는 한계가 있을 거라고요. 그래서 제가 실수를 끝까지 다 저질러 버리고 나면 더 이상 저지를 실수가 남지 않을 거라고요.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져요."
"알았다. 그 케이크는 돼지에게나 갖다주거라. 사람이 먹을 수 없으니까. 제리 부트라도 그건 먹지 않을거다." (274쪽)
앤은 새로 부임한 앨런 목사 부부를 위해 직접 케익을 굽겠노라고 호들갑을 떨었다가 바닐라 대신 진통제를 넣는 실수를 저질러 버렸던 것이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제리 부트는 엑스트라로 일꾼으로 고용한 아이이다. 커스버트 남매가 원래 원했던 것은 제리 부트와 같은 아이였는데, 입양을 알선한 알렉스 스펜서 부인의 실수로 앤이 오는 바람에 늙은 남매는 따로 일꾼을 쓸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겉으로는 쌀쌀할지라도 앤이 없는 생활을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소녀는 초록 지붕의 집에 중요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상략) 저도 어른이 되었을 때 사모님처럼 됐으면 좋겠어요. 제가 그럴 수 있을까요. 마릴라 아주머니?"
"별로 그럴 것 같지는 않은데, 앨런 부인이 너처럼 바보스럽고 건망증이 심한 아이였을 것 같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앤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었겠죠. 하지만 지금처럼 항상 착하기만 했던 것도 아니었대요. 사모님이 직접 그러셨어요. 사모님도 어렸을 때는 장난이 아주 심해서 늘 말썽을 일으켰대요. 그 말을 듣고 정말 위로를 받았어요. 다른 사람이 못되고 장난이 심한 애였다는 소리를 듣고 안심 하다니, 그러면 안되는 거죠. 마릴라 아주머니? 린드 아주머니는 아무리 어린 아이라도 나쁜짓을 했다는 얘기를 들으면 항상 몸서리가 쳐진대요. 그래서 언젠가 목사님이 어릴 적에 목사님 숙모님 댁 부엌에서 딸기 과자를 훔친 적이 있다고 고백했을 때 존경하는 마음이 싹 사라져버렸대요. 하지만 저 같으면 그러지 않을 것 같아요. 목사님이 그런 고백을 하신 건 훌륭한 행동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나쁜 짓을 하고 후회하는 어린 남자 애들한테도 용기를 줄 수 있잖아요. 그런 고백을 듣고 자기가 비록 나쁜 짓을 했지만 자기도 나중에 크면 목사님처럼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얼마나 위로가 되겠어요. 전 그런 생각이 들어요. 마릴라 아주머니."
"지금 내 생각에는 네가 설거지를 끝냈어야 한다는 거다. 그 수다 때문에 설거지를 30분이나 더 하고 있잖니. 일을 먼저 끝내고 수다는 나중에 떨어야 한다는 것부터 배워야겠다." (324쪽)
이렇게 우리는 앤의 즐거운 상상력으로 웃지만 그 웃음 속에서 대단히 교훈적인 문장들을 만나면서 뭉클한 감동을 느끼기도 한다.
그래도 여자이기에 언제나 빨강머리가 싫었던 앤은 독일계 유태인 행상의 꾐에 빠져 머리를 적갈색으로 물들일 수 있는 염색약을 싸게 넘겨주겠다는 말만 믿고 구입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염색 후에 머리는 더욱 보기 싫은 초록 색으로 변해버렸다. 방에 틀어 박혀 절망으로 울먹이던 소녀는 마릴라의 도움을 받어 비누와 물로 박박 문질로 탈색을 시도해 보지만 그 유태인의 말이 다 거짓말있지만 염색이 빠지지 않는다는 말만큼은 거짓말이 아니었기에 더욱 슬퍼진다. 결국 일주일 내내 머리를 감아도 초록이 탈색도지 않아 아주 짧게 머리를 자르고 생활하게 된다.
이 사건이 있고 얼마 뒤에 우리의 미운 오리새끼가 백조로 거듭나는 중간 단계에 접어든다. 물론 염색약 탓은 아니겠지만 키도 마릴라보다 더 커지고, 머리색도 약간씩 변해가게 되는 것이다. 이미 매슈는 앤을 위해 퍼프 소매가 달린 드레스를 준비해줬고, 앤의 실수는 점점 줄어들며 학교에서도 정말 열심히 공부를 해서 커스버트 남매를 자랑스럽게 한다. 스테이시 선생님이 가르치는 학교도 예전과 달리 즐겁다. 상상력이 통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싫어하던 수학 공부도 열심히 하는 앤은 결국 에이번리 학교를 벗어나 퀸즈 학교에 진학할 준비를 한다. 다만 아쉬운 점은 단짝 친구 다이애나는 퀸즈에 도전할 생각이 없었다는 것인데, 결국 길버트와 공동1등으로 퀸즈 학교에 입학하는 영광을 누리고야 만다.
사람들은 더 이상 빨강머리에다 주근깨가 많은 못생긴 소녀를 기억하지 못한다.
앤은 이미 기품이 넘치는 우아한 소녀가 되어 퀸즈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를 한다. 초록 지붕의 집을 떠나온 향수병도 있고, 다이애나에 대한 그리움도 있지만 가끔 너도밤나무 저택으로 배리 할머니를 찾아 가는 것으로 달랜다. 고집쟁이 노처녀 할머니 또한 앤을 점점 더 사랑하게 된다.
퀸즈 학교에 공동 수석으로 입학한 길버트에 대한 노골적인 적개심은 예전과 달리 어느 정도 누그러지고, 그저 선의의 경쟁자로 인식하는 성숙함을 보이는데, 그러한 길버트와 경쟁하여 에이버리 장학생이 되는 영광도 차지한다. 장학금을 받고 레드먼드 대학교에 진학하는 것은 매슈와 마릴라에게 그 이상 더 큰 선물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다이애나를 만나 장학금을 받지 못한 길버트가 가정 형편상 학업을 마치고 교사가 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 앤은 선의의 경쟁자가 사라지는 아쉬움과 함께 묘한 실망감을 느낀다.
"오늘 일을 너무 많이 하셨어요. 매슈 아저씨. 일을 좀 줄이셔야 해요. (중략) 제가 아저씨가 보내달라고 했던 남자였다면 지금쯤 아저씨한테 큰 도움이 되고, 여러 가지로 아저씨 일을 덜어 드렸을텐데요. 그래서 제가 남자였기를 바라는 거예요."
매슈가 앤의 손을 토닥이며 말했다.
"글쎄다. 나는 사내 아이 열두 명보다 너 하나가 더 좋다. 잘 들어둬라. 사내 아이 열두 명보다 네가 더 낫다! 에이버리 장학금을 탄 아이가 남자였던가? 여자 아이였어, 내 딸. 내가 자랑스러워 하는 우리 딸이었단 말이다." (438쪽)
건강이 좋지 않은 매슈와 앤의 이 대화 이후에 매슈의 장례식이 있었다.
수줍고 조용하기만 했던 매슈 커스버트가 처음으로 마을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매슈와 마릴라가 어려서 이사왔을 때 그들의 어머니가 심어 놓았던 매슈가 말없이 사랑했던 오래된 꽃들로 관을 장식하였다.
앤은 매슈가 생전에 좋아했던 스코틀랜드에서 가져왔다는 하얀 장미 묘목을 무덤가에 심는다.
이제 소녀의 얼굴에서는 주근깨를 찾아 볼 수 없고, 머리는 완전한 적갈색이 되어 있었다.
마릴라는 존 브라이스와 싸우고 화해하지 않았던 자신의 지난 날을 앤에게 들려준다. 그녀의 삶에도 로맨스가 있었는데 스스로도 까먹었던 그 기억을 존의 아들인 길버트를 보면서 다시 떠올랐노라고 이야기 해준다.
앤이 레드먼드 대학으로 떠나면 혼자 남게 되는 마릴라, 결국 초록 지붕의 집을 팔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앤은 초록 지붕의 집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며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섬에 남아 길버트처럼 학교 교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모교인 에이번리 교사에 부임하기로 했던 길버트는 앤을 위해 그 자리를 양보하고, 보다 거리가 먼 화이트샌즈 학교를 지원한다.
그 일이 개기가 되어 오랜 저주를 풀고, 앤은 길모퉁이에서 길버트를 만나 화해를 청한다.
Never ending stories...
앞서 거론 했듯이 안델센 동화 '미운 오리새끼'를 보는 듯한 빨강머리 앤의 이야기는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이제 미운 오리에서 백조가 된 소녀가 어떻게 처녀시절을 보내고, 어떻게 결혼을 하며, 어떤 엄마가 되고, 어떤 할머니로 살아가는지 그 우아한 모습을 경험을 하고 싶다면 우선 이 책을 빨강머리 앤의 전집을 찾아보면 될 것이다.
이 책은 비록 빨강머리 앤의 어린시절만을 따로 떼어 엮은 것이지만 원본 빨강머리 앤은 캐나다의 장엄한 대하소설이다.
나는 이 감동적인 빨강머리 앤에 필적할만한 우리의 문학작품으로 박경리의 '토지'를 생각해 봤다. 하지만 토지의 서희는 앤만큼 성격이 밝지 못하고, 길상이는 길버트만큼 낭만적이지 못하여 오히려 어둠이 그늘이 있는 비운의 사나이였다는 결론에 다다르면서 마음이 착찹해졌다. 심지어 앤과 길버트 부부의 행복한 결혼 생활도 토지에서는 길상과 서희뿐만 아니라 수 백명의 등장인물 그 누구에게서도 부부애라고는 도무지 찾아 볼 수가 없어서 더욱 대비되는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1908년, 루시 모드 몽고메리가 너무도 아름답고 감동적인 성장 소설로 빨강머리 앤을 처음 발표했을 때, 일제는 식민지 착취기관이라 할 수 있는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우리나라의 토지와 자원을 본격적으로 수탈했었다. 루시 모드 몽고메리보다 50년쯤 뒤에 태어난 박경리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식 교육을 받고 일본식 문체를 그대로 답습하며 성장한데다 그 우울한 시대상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 그대로 작품에 투영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나는 빨강머리 앤을 읽을 때마다 그러한 멋진 작품이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된 캐나다와 아름다운 섬 프린스에드워드가 부럽고 또 부럽기만 하다.
우리는 비록 힘이 없어 의식주에만 연연하는 부끄럽고 아픈 시대를 사는 동안 이다지도 아름다운 글이 생산되고, 지구 반대쪽에서는 여유롭게 그 글을 읽고 공감 혹은 감동하며 작가에게 자신의 문화를 알려줄 수 있는 멋진 선물을 전달하고, 작가의 후손들은 대를 이어 기뻐하며 서로가 문화적인 긍지를 느낄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 저자와 독자가 모두 아름답게 비춰졌다. 우리도 멀지 않은 미래에 이렇게 멋진 문학작품이 탄생하여 널리 퍼져 나가기를 기대해 본다.
처음 이 책을 펼쳤을 때는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므로 대충 한 번 훑어 봐야지 하는 마음이었는데, 읽다보니 단 한 글자도 빼먹지 않고 다시 읽고 싶어졌고, 책을 덮은 아쉬움은 마치 내 모든 상상력이 감퇴해 버린 듯 아쉽다. 나는 언젠가 이 책을 다시 또 즐거운 마음으로 읽게 될 것이며, 내가 아는 어린이들에게도 선물하고 싶어졌다.